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19화 (319/360)

319

2장. 요궁(妖弓)의 화살 (14)

비호부 기병이 삭북부 전방의 취약한 수비를 뚫었다. 삭북 기병의 방어를 완전히 뚫자 전 부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황금창랑기까지 남은 거리는 수백 보 남짓. 깃발을 빼앗는 이는 영웅이 될 것이었다. 그들 모두는 영웅이 되고자 갈망했고 삭북부 세자는 뜻밖에 자신의 깃발을 챙기지도 못하고 후퇴하며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아소륵은 말을 몰아 스쳐가는 순간 영월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오른손으로 미처 피하지 못한 삭북 무사를 말 등에서 붙잡아 들어 한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짤막한 비명 뒤, 내던져진 삭북 사내는 비호부 기병의 쇠발굽 아래 사라졌다. 살짝 마음에 걸린 아소륵은 놀라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아소륵과 황금창랑기 사이에는 더 이상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아소륵은 깃발 아래 호도로한이나 다른 삭북인이 하나도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깃발 아래에는 딱 한 사람,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그자는 리국 국사 뇌벽성과 매우 닮은 노인, 산벽공이었다.

산벽공은 등을 구부린 채 깃대를 잡고 서 있었다. 산속에 기거하는 노인이 고목(古木)을 짚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기병대가 일으키는 바람에 노인의 회색 도포가 펄럭였다. 산벽공은 차분하고 고독하고 또 쓸쓸해보였다. 기세등등하게 밀려오는 철기병을 대면하고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아소륵과 시선을 맞추더니 뒤돌아서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창랑기 주위를 거닐었다.

기이한 광경에 비호부 기병들은 불안해졌다. 잇달아 군마를 붙잡고 산벽공과 200여 보 떨어진 곳에 섰다. 거대한 기병대가 멈춰 서기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기병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소륵의 명령을 기다렸다.

합륵찰이 아소륵의 말 앞을 막았다.

“대나안, 저자는…… 진월 교사(敎師)입니다!”

“알아.”

아소륵은 영월도에서 나는 불안한 울림을 들으며 말했다.

“지위가 아주 높은 진월 교장이야.”

“어쩌죠? 교란 작전일까요?”

아소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저자가 호도로한입니다. 백야창랑기 쪽으로 후퇴하고 있네요.”

철안이 먼 곳을 가리켰다. 그들은 이미 고지대에 올라 부근 몇 리 안의 형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소륵이 장도를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멈출 수 없어. 황금왕과 늑대왕에게서 멀지 않은 거리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9왕 말이 맞아. 우리에게는 퇴로가 없어.”

산벽공은 맞은편의 살기등등한 대오를 아득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많이 늙었지만 시력은 아직 쇠하지 않았다. 뭇 군대에 빼곡히 둘러싸인 청년이 보였다. 청년은 흰색 가죽 갑옷에 천구 우두머리의 장도를 들고 있었다.

1만 쌍의 눈이 산벽공을 쳐다보았다. 1 대 1만의 눈싸움이었다. 산벽공의 눈빛은 차분했다.

먼 곳의 교전 소리가 바람에 휩쓸려 고공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앉았다. 산벽공이 서 있는 고지대는 사해(死海)의 백사장 같았다. 망자의 피와 울부짖음으로 이루어진 사해의 바닷물이 일으킨 사납고 거대한 파도가 휩쓸려와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늙을 대로 늙은 산벽공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몰랐다. 전장의 한가운데 서면 슬프지는 않지만 늘 피곤했다.

난세에는 항상 사내들이 칼을 들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포효하고 베어 죽이고 슬피 통곡한다.

‘이것은 사람의 죄가 아닌, 이 세상의 죄다.’

산벽공이 속으로 읊조렸다.

이 세상은 전쟁터로 만들어졌으니 새빨간 피로 물들게 되어 있으며 세상을 지키려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해도 결국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

산벽공은 손을 내두르며 공을 세우고자 하거나 혹은 복수에 급급한 청년들에게 ‘물러가라. 사지로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산벽공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도 소용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복수와 피에 눈이 먼 이들의 귀에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산벽공은 묵묵히 제 발아래를 쳐다보며 황금창랑기 주위를 돌았다. 발자국이 완벽한 상징 문양을 이루었다. 산벽공이 천천히 호흡하자 문양은 은은하게 가물거리더니 점점 산벽공의 호흡에 박자를 맞추어갔다.

“부근에 매복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척후가 아소륵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삭북인의 기병이 벌써 뒤에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아소륵이 고개를 돌렸다. 후군의 철진 부대를 토벌하던 삭북 기병 대대가 벌써 포위를 포기하고 군마를 전력으로 달려 본대를 지원하러 오고 있었다. 상대는 2만 명이나 되었고, 살상에 눈이 뒤집혀 있는 터라 비호부가 승리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리고 가로막혔던 청양부 전군(前軍)은 전력을 다해 비호부 쪽으로 모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좌우 양봉의 철기병들은 내내 공격에 나서지 않은 1천 명을 가운데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불화랄의 귀궁으로 검은 외투 위에 회백색 삼베를 한 겹 덮어쓰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보통 신병 같았다. 그들은 칼은 지니지 않고 독화살 5만 대만 가져왔다.

백야창랑기까지는 아직 3리나 남았다. 그곳에는 흰 늑대 3천 마리뿐이었다.

“활!”

아소륵이 호령했다.

“저자를 쏴 죽여라! 황금창랑기를 벨 것이다!”

철안과 철엽은 수십 명의 비호부 기병을 데리고 앞으로 달려갔다. 산벽공까지 100보 남은 거리에서 일제히 활을 당기고 화살을 얹었다. 그들은 이름난 명사수였다. 특히 철엽은 동륙에서 지낼 때도 대류영 연무대회 때마다 활쏘기에서 1등을 차지하곤 했다.

멀리서 산벽공이 서서히 시선을 들어 흉악하게 빛나는 화살촉을 보았다.

“발사!”

철안이 호령했다.

우전 수십 대가 동시에 활시위를 떠났다. 비호부 기병들은 활을 거두고 칼을 뽑아 돌격을 준비했다. 무쇠 인간이 아닌 한 이런 집중 사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쌔앵. 우전이 공중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황금창랑기를 잡은 산벽공이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움칫했다. 그러자 파도가 암초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우전의 울림을 압도했다. 비호부 기병들은 눈앞에 환각이 나타난 것 같았다. 산벽공이 깃대를 치자, 순간 붉은 빛이 번쩍하더니 숨결 같은 파동이 깃대를 중심으로 사방에 퍼져 나갔다.

산벽공 앞에 도달했던 비호부의 화살은 그 파동을 만나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쇠로 만든 화살촉은 쇳물로 녹아내렸다. 눈밭에 떨어진 쇳물은 다시 얼어붙었다가 터지면서 쇠똥이 되었고 쇠똥에서는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철엽은 옆에 있던 제 형의 허리춤을 걷어차 말에서 떨어뜨렸다. 동시에 자신도 몸을 뒤로 젖히며 말안장에서 뛰어내렸다. 곧바로 형에게로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힘껏 눈밭에 내리눌렀다. 머리 위로 돌개바람을 방불케 하는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한여름 같은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빨갛게 달궈진 칼을 지닌 뜨거운 바람이 두 사람의 뒤통수를 가르려는 듯했다.

이들 형제는 당황하며 일어났다가 두 사람과 함께 왔던 비호부 기병들이 말없이 말 등에 앉아있음을 알아챘다. 그들은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허리부터 무릎까지 완전히 타서 새카맸다. 말도 마찬가지였다. 목이 전부 새카맸다. 뜨거운 바람이 사람과 말의 몸에 새카만 칠을 한 것 같았다. 이어 까맣게 탄 부분이 으스러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말의 목이 떨어져나갔고 사람의 상반신도 떨어져나갔다. 시뻘건 피가 한 움큼씩 그들 주위로 흩뿌려졌다. 피로 가득 찬 주머니들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 피가 끓어올라 부글부글 기포를 내뿜으며 눈밭에 흩뿌려졌고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뜨거운 바람은 멀리 300보 밖의 본대에까지 밀려들었다. 뜨거운 열기를 정면으로 맞은 아소륵은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들이마신 열기는 인두처럼 뜨거워 오장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분풍(焚風)!”

이 비술에 대해 들어보았다. 비술사들은 햇빛의 정수를 취해 적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비술이 100보 밖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두 손을 들어 올린 산벽공이 하늘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인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발아래 문양에서 광채가 솟아나며 그를 빙글빙글 에워쌌다. 매 호흡이 점점 길어지고 그에 따라 광채 역시 깃대 꼭대기를 넘어 높아져 갔다.

“철안, 철엽! 돌아와!”

아소륵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 대형 흩어진다! 모두 활을 준비해라!”

비호부의 사정거리는 150보에 달했다. 그들은 사방 150보 거리에서 산벽공을 집중 사격 할 수 있었다. 분풍의 살상 거리는 100보 내외, 게다가 비술사가 비술을 펼칠 때 시간차가 있으니 그 틈을 포착하면 산벽공을 쏘아 죽일 수 있었다.

비호부 기병들은 적의 불가사의한 힘 앞에 불안해 벌벌 떠느라 순간 아무도 아소륵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데리고 돌진하겠습니다! 대나안께선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합륵찰이 말안장에서 자신의 송곳창을 떼어내며 말했다.

“나를 따르라! 저 요괴를 죽이자!”

합륵찰은 아소륵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함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최전선에서 돌진하던 비호부 기병 수백 명은 순간 멍했다가 이내 이 용감한 무사의 말 뒤를 쫓아가며 흩어져 반월진을 이루었다.

철안과 철엽이 포복으로 눈밭을 기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살인적인 열풍에 맞을까봐 몸을 일으키지도,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불타라, 양호지정(陽昊之井)!”

명상을 완성한 산벽공은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반월진을 향해 손을 내둘렀다.

철안과 철엽은 지면의 진동을 느꼈다. 분풍이 습격했을 때와 달랐다. 그보다 열 배는 더 격렬했다. 눈가루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반짝이는 눈이 작열하는 불꽃을 감쌌다. 대지 깊은 곳은 봉해져 있던 용광로 같았다. 깊은 우물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불기둥이 검처럼 곧게 하늘로 치솟는 듯했다. 화염을 집어삼키고 있던 깊은 우물은 눈밭에서 꽃이 피듯 피어났고 매 불기둥은 천둥 같은 굉음을 울리며 날숨처럼 뿜어져 나왔다.

한 차례의 폭발은 철씨 형제의 위치로부터 불과 2장 거리에서 발생했다. 휘몰아치는 파풍(破風)에 휩쓸려온 눈덩어리가 철안의 등을 때렸다. 철갑옷에 맞았음에도 철안은 여전히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철안은 필사적으로 제 아우를 붙잡고 힘껏 눈 속에 눌러 넣은 뒤 자신의 몸으로 그 위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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