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17화 (31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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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2)

“대나안! 철수하시죠! 지금은 출전해선 안 됩니다!”

불화랄은 거의 형태를 갖춘 화살 진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늑대가 너무 많아요!”

“압니다. 저기 보세요.”

낯빛이 살짝 창백해진 아소륵이 먼 곳을 가리켰다.

불화랄은 아소륵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가슴 깊숙이에서 솟구친 섬뜩한 한기가 목까지 차올랐다. 다른 거대한 늑대보다도 더 크고 우람하며 위풍당당한 형상 하나가 제왕 같은 자태로 지평선에 올라섰다. 놈의 걸음은 느리지만 힘이 있었고 매 걸음 눈송이가 흩날렸다. 놈이 바람 속에서 몸을 털었다. 말갈기 같은 긴 털이 전기(戰旗)처럼 휘날렸다. 놈의 등 뒤로 붉은 태양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놈의 등에는 검은 인영 하나가 타고 있었고 그자의 손에 들린 으스스한 월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늑대의 황제가 우뚝 서서 고개를 쳐들고 갓 떠오른 태양을 향해 울부짖었다. 모든 늑대가 놈을 향해 모여들며 따라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대열을 짓고 있던 청양 무사들은 넋이 나갔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 밀물처럼 밀려왔다.

늑대 수천 마리가 고지대로 미친 듯이 질주해와 앞서 시체를 베어 먹던 늑대 떼와 회합했다. 늑대 떼와 함께 나타난 것은 전투 도끼와 거대한 월을 든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늑대 등에 타고 있었다. 맨 먼저 나타난 사내가 낡아빠진 깃발을 힘껏 눈밭에 꽂았다. 깃대가 절반쯤 들어가고 늑대를 모는 사내들이 그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백야창랑기.”

불화랄은 공포가 포말처럼 내면 깊숙이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삭북의 늑대왕입니다! 백랑단 전원이 다 저기에 있어요!”

9왕 여표은이 말을 몰아 질주해왔다.

“철수해라! 철수해! 진격해서는 안 된다! 저들은 이미 대비했다. 우리 공격 시간을 놈들이 알아냈어!”

아소륵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고개를 저었다.

“철수할 수 없습니다.”

“전쟁할 때가 아니다!”

9왕은 애가 타고 또 화도 났다.

“누염과 대면해 보았느냐? 저자는 사람이 아니라 마귀다!”

“늦었습니다.”

아소륵은 뒤편의 북도성 성문을 가리켰다.

“성 밖에 3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있습니다. 모두 저 성문으로 나왔죠. 지금 철수를 시작한다고 해도 성안으로 전부 철수해 들어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우리가 반도 못 들어갔을 때 백랑단은 우리 등 뒤를 공격할 겁니다. 최후방의 인원이 백랑단을 막지 못하면 늑대 떼는 퇴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북도로 들어갈 겁니다……. 늑대가 북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첩자로군!”

9왕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두 번째야! 또 정보가 넘어갔어!”

청양 군대가 한바탕 술렁였다.

세 사람이 동시에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깃발 하나가 더 늘어나 있었다. 호도로한의 황금창랑기 아래 삭북부 기병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우람한 설령가 군마가 황금창랑기를 에워싸고 잔달음을 쳤다. 원형의 기병 대오는 점차 수백 명에서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무사들은 질주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멀지 않은 곳, 무쇠처럼 말이 없는 백랑단과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철진과 철익, 목해양도 모두 말을 몰아 다가왔다. 청양부의 장군들은 눈앞의 상황을 파악했다. 말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초조한 시선을 교환한 이들은 동시에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아소륵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성문을 닫으십시오.”

결심한 아소륵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 전술대로 삭북부와 성 밖에서 싸웁니다.”

장군들은 시선을 몇 차례 교환한 뒤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아소륵에게 예를 행했다. 이미 전장을 겪을 만큼 겪은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이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알 수 있었다.

“늘 청양에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 말했지만 이렇게 목숨 바쳐 충성하게 될 줄은 몰랐군.”

9왕의 서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전에는 전장의 공로를 다투느라 잘 지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함께 후퇴할 곳 없는 전쟁을 치르는 게 되었군. 모두 전력을 다해주길 바랄 뿐이오.”

“알겠습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9왕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는 줄곧 목려를 싫어했었소.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그가 함께 있었으면 싶군.”

9왕은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3천 호표기로 구성된 본대로 돌아갔다. 다른 장군들도 각자 흩어졌다. 아소륵과 불화랄만이 남아 나란히 서 있었다.

“대나안, 또 분부하실 게 있는지요?”

“그제 성벽 위에서 장군께 했던 말은 우리 둘만 압니다. 다들 우리가 ‘천심’ 전술을 쓰는 것은 알지만 마지막 쐐기를 박을 사람이 장군인 것은 모릅니다.”

아소륵이 나직이 말했다.

“아는 사람은 장군과 나뿐입니다. 북도성에 확실히 첩자가 있어요. 하지만 이 소식은 새어나갈 리 없습니다. 첩자가 장군이나 제가 아닌 이상에는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늑대왕을 암살하시게요?”

불화랄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아소륵이 손을 내밀며 불화랄을 쳐다보았다.

“제가 호도로한의 기병 대대를 끊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호도로한의 황금창랑기도 부러뜨리지요. 백야창랑기는 장군께 맡기겠습니다.”

불화랄은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문득 앞선 전투에서 그와 악수를 나누었던 비쩍 마른 목려가 떠올랐다. 하는 행동도 비슷했고 눈빛도 조금 닮았다. 불화랄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손을 내밀어 아소륵의 손을 꽉 붙잡았다. 힘주어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상대방 손바닥에 밴 식은땀이 느껴졌다.

불화랄은 말머리를 돌려 떠나가는 아소륵을 보면서 투골룡의 긴 갈기를 어루만지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성문을 닫아라!”

아소륵의 목소리가 진 안에서 들려왔다.

북도성 북문은 톱니가 달린 거대한 구리 갑문이었다. 문은 기괄의 작동 아래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고 톱니가 바닥의 철제 홈에 맞물리며 안팎을 완전히 봉쇄했다. 성 꼭대기, 반찰렬이 이끄는 무사들이 장궁을 당겼고 날카로운 화살 3천 대가 성 밖을 향했다. 성 아래의 군대는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혼전 중에 우군일지라도 성벽에 다가오면 화살을 퍼부어 죽일 것이었다. 훈련이 잘 된 호표기와 귀궁 군대는 침착했으나 중군에는 은근한 불안이 들끓었다. 귀엣말로 숙덕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울렸다.

“출발!”

아소륵이 명령을 내렸다.

아소륵은 부하들을 위로할 말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긁어모은 군대 중에 1만 명은 급히 노예와 평민 중에서 선발한 청년 사내들로 모두가 중군에 자리했다. 처음 전장에 나가는 이들에게는 어떤 말로도 그들이 느끼는 부담감을 줄여줄 수 없었다. 영광과 책임에 관한 어떤 부르짖음도 두려움을 잊게 만들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저들은 가장 처참하게 학살당할 것이고 중군은 무참하게 끊어질 것이다. 이것이 ‘쇄전(碎箭)’진의 최대 관건이었다.

이것이 전쟁터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들을 가여워할 수는 있으나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소륵은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돌덩이를 치워버리려고 회백색 하늘에 대고 크게 호흡했다.

모처럼 남풍이 부는 겨울이었다. 청양 무사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서 있었다.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일어난 눈먼지가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 서 있는 삭북부 기병들에게로 향했다. 청양부에 유리한 풍향이었다. 행군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준마의 속도는 언제나 용감하게 전진할 용기를 주었다. 종종걸음을 치던 군마도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흥분하자 머리를 쳐들고 울부짖었고 달리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대규모 군마의 울부짖음이 바람을 타고 삭북 기병의 진영으로 흘러들었다. 삭북 무사들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청양인이 결코 투지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청양인의 진형이 긴밀하게 좁혀지고 군마 3만 마리가 떼 지어 돌격했다. 좌봉은 어떤 적도 방심할 수 없는 초원의 최강 기병 호표기였다. 삭북군의 회오리 같은 원형진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갈라졌다. 벌어진 틈은 정확히 빠른 속도로 접근 중인 청양군 진형을 향했다. 쇄전진을 집어삼키려 거대한 입을 쩍 벌린 것 같았다.

‘원형진이 반월진으로 변했군.’

아소륵은 속으로 읊조렸다. 적군에도 동륙의 전투 진법을 아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아소륵은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스승은 동륙 진법의 최강자 식연이었다. 천계성 연무 대회에서 황제를 놀라게 한 소년 천재이자 풍염 황제 시대의 이릉심에 비교되는 명장이 바로 아소륵의 스승이었다. 아소륵은 제 스승에게 사사받은 진법에 자신감이 넘쳤다.

청양군은 점점 더 빠르게 전진했다. 군마들은 세차게 일어나는 눈 먼지 속에서 앞다투어 서로를 쫓았다. 칼이 차례로 칼집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군의 훈련을 받지 않은 신병들은 차츰 돌격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청년들은 전력을 다해 군마를 채찍질했지만 대형은 차츰 흩어지기 시작했다. ‘화살’의 중간 부분은 서서히 팽창하며 느슨해졌고 3리 만에 전체 대형은 벌써 두 배로 길어졌다.

아소륵의 예상대로였다. 지세가 더 높은 곳에 있는 호도로한도 쇄전진의 변화를 쉽게 알아챘다. 그들은 좌봉과 우봉의 군대가 더 정예하며 훈련이 한참 못 미치는 중군이 청양군의 약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삭북부의 반월진도 바뀌고 있었다. 좌우 양측이 쭉 뻗어나간 초승달 형태가 빠른 속도로 길게 늘어났다. 달의 모양이 점점 커지고 수만 명의 기병 대대가 좌우 양익으로 날아오르는 형태가 되었다. 명백한 포위 진형이었다.

늑대 기병 하나가 백야창랑기를 뽑았다. 백랑단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빠른 속도로 철수하며 정면의 전장을 호도로한이 이끄는 기병단에 내주었다.

모든 상황이 성제 3년 식연이 진법 수업에서 설명한 것과 일치했다. 일부러 드러낸 약점은 기병이 대진할 때 반드시 적군이 양익을 포위하게끔 유도할 것이라 했다. 식연은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없는 늑대 기병을 상상했다. 아소륵조차도 치랑 군대가 정말 초원에 존재하는지 몰랐을 때 식연은 이미 치랑 군대가 정면충돌에 이용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들의 존재는 너무 귀해서 손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치랑들은 사람을 태우고 있는 데다 오래 싸울 지구력이 없으므로 필히 기습병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성공적인 첫걸음을 뗀 아소륵은 내심 고무되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남회 감옥 안에 있을 사내를 생각했다. 식연은 일빈일소하면서 아소륵과 희야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제 가장 고귀한 지식의 씨앗을 그들 마음에 심어두었다. 그 씨앗이 싹트기를, 제자들이 영웅으로 자라나기를 고대하면서.

‘장군, 제가 돌아갈 때까지 살아 계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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