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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1)
산벽공이 천천히 일어나 전방을 향해 손을 힘껏 내둘렀다.
“우리는 곧 저들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육신부터 영혼까지 전부!”
누염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갑자기 전쟁터에 나간 장군 같아진 산벽공을 쳐다보았다. 이 순간 산벽공의 위엄은 온 초원을 뒤덮을 듯했다. 산벽공의 위엄에도 누염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냉랭하게 물었다.
“청양에는 아직 호표기와 귀궁이 있고 철부도도 있소. 뭘 믿고 이리 자신하는 게요?”
“지원군이 있습니다! 교종께서 늑대왕께 한 약속을 이행하고자 동륙에서 지원군을 보내셨고, 그들이 막 도착했습니다.”
산벽공이 손을 흔들어 뒤편을 가리켰다.
누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가 살짝 떨렸다. 등 뒤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 소리와 바람이 금속 날 위를 흐르는 소리, 군마의 쇠발굽이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외에 모든 것이 고요했다. 최정예 대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고 심지어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그들의 말조차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기병 대대 하나가 천천히 고지대에 올랐다.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그들은 새카만 준마를 타고 새카만 외투를 걸쳤으며 외투의 쓰개로 얼굴을 가렸다. 외투 아래 순은으로 감싼 활고자와 덩굴 무늬의 화려한 화살집이 드러났다. 그들은 대열을 지은 뒤 일제히 말 위에서 허리를 숙이며 누염에게 경의를 표했다.
“쓰개를 벗고 늑대왕께 너희의 얼굴을 보여라.”
산벽공의 말에 그들은 새카만 외투의 쓰개를 벗었다. 옅은 금빛 혹은 은백색인 머리카락과 정교한 솜씨의 갑옷, 그리고 견갑 위의 청익 가문 휘장이 드러났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지닌 활이었다. 정교한 장궁은 초원인이 사용하는 각궁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화살을 더 멀리, 더 힘 있게 쏠 수 있으며 화살길도 더 곧게 나아갔다.
“우인?”
잠자코 있던 누염의 얼굴에 한 줄기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재미있군.”
수백 년 이래 우인 군대가 한주 초원을 밟은 것은 처음이었다. 수백 년간의 숙적인 만족과 우족은 십여 보를 사이에 두고도 상대에게 화살을 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12월 스무사흘, 한밤중.
불화랄은 자기 장막에 앉아 새 활의 활시위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기고 소리를 기다렸다.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 갑주를 갖춰 입었고 목려가 남긴 투골룡에게 여물도 든든히 먹였으며 목려가 남긴 낭봉도도 제 칼집에 꽂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화살집에는 파갑전을 가득 채웠으며 새로 고른 활은 활시위를 바짝 조이고 기름도 칠했다. 언제든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채비를 마치고 기고 소리가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밤 전장에 나갈 수 있는 북도성의 사내들은 기고 소리를 기다리느라 잠들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이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승부를 지어야 했다. 전쟁 준비로 대량의 식량과 마초를 소진하는 바람에 비축분은 더 줄어들었다.
새벽까지는 몇 시진 남지 않았다. 불화랄은 결전의 시간이 새벽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번에는 출전하는 정확한 시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정보가 새어나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귀족들과 장군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목려가 참패한 이유는 백랑단의 매복 탓이었다. 누군가가 목려의 전술을 누설했고, 그자는 북도성에서 지위가 낮지 않은 인물이었다. 목려는 조심스럽게 비밀을 지키다가 출전 직전에야 각종 명령을 전달했으니 최종 결전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일 리 없었다.
밤이 되기 전, 대군은 돌연 귀궁 1천 명에게 양 500마리와 고이심 독주 200단지를 하사했다. 양고기와 독주의 향기가 장막 안에 가득 퍼졌다. 불화랄은 대군이 양고기와 술을 하사한 이유를 알았다.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틀간 불화랄의 머릿속에는 그 전술의 마지막 순간이 끊임없이 그려졌다. 좌측의 호표기 대대가 돌연 흩어지고 백랑단이 가장 교만해진 순간에 검은 옷을 입은 궁수 1천 명이 흩어진 좌측 대대를 뚫고 나와 곧장 백랑단의 심장을 찌른다. 파갑전은 낮게 나는 메뚜기 떼처럼 누염에게로 날아갈 것이다. 상대방은 활과 선회하는 쇠도끼로 반격할 테고 오랜 세월 함께해온 형제들은 한 명씩 말에서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들은 마치 쇠 화살처럼 가장 단단한 갑주에 쏘아져 끊임없이 파고들고 끊임없이 닳아갈 것이다. 화살촉이 완전히 닳아 없어지기 전에 그 갑주를 뚫으면 승리였다.
불화랄은 쏘아질 마지막 화살이 자신이기를 바랐다. 곧바로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두렵지 않았다. 이번 전투로 세상을 떠난 목려와 패알륵 무사 3천 명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불화랄은 그 늙은이를 향해 달려가던 순간을 기억했다. 큰 소리로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목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가 희뿌연 하늘과 어우러진 광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펐다.
불화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결전을 앞두고 계속 슬픈 광경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장막 휘장이 젖혀지고 인영 하나가 빠르게 들어왔다.
“불화랄 장군, 귀궁을 데리고 북쪽 성문을 나가 정렬하십시오.”
아소륵 대나안의 심복 철안이었다. 철안은 이미 북도성 내에서 유명한 무사였다.
“북을 친다 하지 않았나?”
불화랄이 일어나며 물었다.
철안은 금 화살 하나를 불화랄에게 건넸다.
“성 밖으로 나가는 명령은 제가 각 장군들께 일일이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간차를 두고 성을 나가며 모든 대오가 정렬하면 북을 쳐 출발할 것입니다.”
“소식이 새어나갈까 봐서?”
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횃불은 너무 많이 켜지 마십시오. 시야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불화랄을 필두로 귀궁 1천 명으로 구성된 기병대가 북도성의 마도(馬道)1)를 행진했다. 북도성 전체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사내들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영채를 나섰다. 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말발굽도 솜과 가죽으로 감쌌고 사람도 말도 하무2)를 입에 물었다. 횃불은 많이 켜지 않았고 만나도 인사는 하지 않았다. 점점 많은 깃발이 모여들었다. 각기 다른 가문의 휘장과 다른 색깔의 깃발들이었다. 무사들은 눈빛으로 인사하고 북문으로 전진했다.
고무된 불화랄은 화살집 안의 독사처럼 위험한 파갑전을 더듬어보았다. 침묵의 행군 속에서 그는 희망을 감지했다. 그들은 잠행하는 자객 같았다. 삭북인들은 청양인들이 공격을 시작했음을 알아채는 순간 크게 놀라며 당황해 어쩔 줄 모를 것이다.
북문 밖에 도착한 대군(大軍)은 철안과 철엽의 지휘 아래 각자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불화랄은 초원인이 이렇게 복잡한 진을 이루는 것은 처음 보았다. 면면이 전부 깊은 뜻을 내포하는 듯했다. 불화랄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깨달으려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무사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흑색 려롱구가 불화랄의 곁으로 와 멈추었다. 전신에 갑주를 걸친 아소륵과 불화랄이 시선을 맞추었다.
“대나안께서도 직접 출전하십니까?”
“제 스승님께서 진정한 장군은 진 후방에 있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격렬한 곳에서 싸우지 않으면 전쟁터의 피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사람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전장을 이해할 수 없어 하달하는 명령도 미덥지 못하다고 하셨죠. 제가 성안에 앉아 지휘하는 걸 희야가 알게 되면 비웃을 겁니다.”
“희야요?”
“제 친한 벗입니다. 사형장에서 저를 구해주었던 그 친구요.”
아소륵이 빙그레 웃었다. 불화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대나안께서는 어디에 계실 겁니까?”
“중군(中軍)에서 철부도와 형님께서 주신 1만 기병을 이끌 겁니다. 우리의 전군과 후군이 끊어지면 제가 군대를 이끌고 앞으로 돌진할 겁니다.”
불화랄이 화들짝 놀랐다.
“안 됩니다! 가장 위험한 위치입니다. 대나안께 변고가 생기면 누가 군을 지휘합니까?”
아소륵이 고개를 저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이 진형대로만 움직이면 지휘는 필요 없습니다. 아무도 지휘할 수 없어요. 적과 우리 모두 혼전에 빠질 겁니다. 각 부분이 전부 흩어지며 양군은 서로가 서로를 가르게 될 거예요. 장군만 정확한 때에 돌입해 백랑단의 진 중앙으로 곧장 찔러 들어가면 승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화랄은 잠시 침묵했다.
“대나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해도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대나안께서는 평범한 무사가 아닙니다. 파소이 가문의 후손이자 본디 대군에 올랐어야 할 분입니다.”
아소륵이 고개를 숙이고 싱긋 웃었다.
“나 같은 사람이 대군이 되면 많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처럼 젊고 경험이 없는 자가 전장에도 있지 않으면, 무슨 수로 나를 믿게 만들겠습니까? 모두가 나를 믿어야 합니다. 모두가 의구심을 품는다면 우리의 희망도 없어지는 겁니다.”
아소륵이 고개를 쳐들고 캄캄한 하늘을 향해 한숨을 뱉었다.
“희야는 나보고 늘 자신감도 없고 스스로를 쓸모없어 한다고 했지요. 나는 내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무척 기쁩니다.”
아소륵이 멀리 북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들은 흰 늑대인가요?”
하늘은 어느새 살짝 밝아져 있었다. 매처럼 예리한 불화랄의 눈에 전방 몇 리 떨어진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검은색 형상이 어렴풋이 보였다.
“네, 흰 늑대입니다. 밤에 시체를 먹으러 나온 늑대들입니다.”
불화랄은 한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보통 주인은 따라오지 않으니 저 짐승들은 우리가 대열을 지은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음, 가능한 한 적이 알아채기 전에 저들 진영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이 매복 같은 걸 놓지 못할 테니까요. 적진의 위치는 확실합니까?”
“절대 확실합니다. 태납륵강 일전 후, 출중한 척후가 눈밭에 몸을 숨기고 후퇴하는 삭북인을 쫓아가 진영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그간 계속 사람을 보내 은밀하게 감시도 했고요.”
아소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좀 이상하네요……. 왜 오늘 시체를 먹으러 온 늑대의 수가 전보다 더 많은 것 같죠?”
불화랄은 말 등에 뛰어올라 먼 곳을 관찰하며 검은 형상의 수를 하나하나 세어보았다.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이 치밀었다. 아소륵의 말이 맞았다. 이전까지 시체를 먹으러 온 늑대의 수는 많아야 100마리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저곳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는 최소 200~300마리는 되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벌써 새벽이 되어 하늘은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지만 초원은 아직 칠흑처럼 캄캄했다. 지평선이 점점 칼날처럼 또렷해졌다. 치랑 한 마리, 또 한 마리가 지평선 위로 훌쩍 뛰어올라 시체를 뜯어먹는 늑대 떼에 합류했다. 늑대의 수가 어림잡아 500마리를 넘었을 때서야 불화랄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 * *
1) 연병장(練兵場)이나 성벽 위로 말을 달릴 수 있게 닦은 길.
2) 군중에서 떠들지 못하도록 병사나 말의 입에 물리던 가는 나무 막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