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14화 (314/360)

314

2장. 요궁(妖弓)의 화살 (9)

12월 스무하루, 새벽.

아소륵은 북도성 성벽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았다. 이번 겨울들어 모처럼만의 화창한 날씨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에 햇빛의 광채가 반사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과거에는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북도성의 대귀족들은 사냥개와 준마, 노예를 끌고 나가 사냥을 했고 이를 ‘겨울 사냥’이라 불렀다. 겨울 사냥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간만의 따뜻한 날씨에 몸을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아소륵은 어릴 적 이 겨울 사냥을 제일 좋아했다. 아소륵은 아버지의 말안장에 앉아 구경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호화로운 준마를 타고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금이나 은으로 모서리를 감싼 멋진 활이 활자루 밖으로 드러나 있고 말안장의 양쪽 주머니에 줄지어 꽂힌 장우전은 유난히 위풍당당해 보였다. 사냥개는 신나서 이리저리 달리며 냄새를 맡았다. 소년들은 말 타기 시합을 했고 뒤에서는 연신 어른들이 호통을 쳐댔다.

지금 어린 시절을 돌아보자니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아소륵은 살짝 실눈을 뜨고 최대한 멀리 내다보았다. 화창한 날씨에는 대략 5리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5리 밖의 눈밭에서 왔다 갔다 어슬렁거리는 인영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불화랄 장군, 잘 보입니까?”

아소륵이 옆에 있는 귀궁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흰 늑대입니다. 수십 마리쯤 되는데 시체를 뜯어먹고 있네요. 사람은 없습니다.”

불화랄이 대답했다. 그는 아소륵보다 시력이 훨씬 좋았다.

“요 며칠 늑대들이 계속 시체를 먹으러 옵니까?”

“화창할 때는 거의 다 보입니다. 적을 때는 수십 마리고 많으면 백여남은 마리가 함께 오지요. 척후가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에 나가보았는데 시체들 꼴이 말이 아니랍니다. 늑대는 내장을 즐겨 먹는지라 시체를 죄다 찢어발겨 놓았다더군요.”

이틀 전 대군은 불화랄과 그의 귀궁에게 아소륵 대나안의 지시를 따르라 명령했다. 불화랄은 반대하지 않았다. 전장 경험이 별로 없는 소년이라 조금 걱정 되었지만 대나안의 용기를 믿었다. 그리고 막속이 가문의 철아 무사 철진과 철익도 그 자리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불화랄의 대답에 아소륵은 고개만 끄덕이고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불화랄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대나안께서 귀궁과 1만 기병을 달라 하셨고 대군께서 동의하셨으니 불화랄은 반드시 대나안의 군령을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나안의 전술을 알 수 없어 불안합니다. 목려 장군의 태납륵강 일전에서 거의 10만 기병이 출동했지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기병 1만과 귀궁 1천 명뿐인데, 어찌 하실 계획이십니까? 비밀이라면 말해주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말해줄 수 있습니다.”

아소륵이 차분하게 말했다.

“1만 1천 명만으로 백랑단과 삭북 기병을 물리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럼요?”

“하지만 한 사람을 죽일 자신은 있습니다.”

아소륵이 고개를 돌려 불화랄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한 사람을 척살할 겁니다. 목표는 삭북의 늑대왕입니다.”

불화랄은 흠칫 놀랐다.

“척살요?”

아소륵의 물처럼 평온한 두 눈이 아니었다면 불화랄은 농담으로 여길 뻔했다. 기세 높은 대군 1만 명이 무슨 척살을 한단 말인가?

“동륙 전술에서는 이를 ‘천심(穿心)’이라 합니다.”

아소륵의 말에 불화랄은 고개를 저었다. 초원의 영웅들은 대결에서 ‘용기’를 중시하여 칼을 들고 말을 달려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전술은 선조들이 사냥을 통해 도출해낸 경험일 뿐, 딱히 큰 명분은 없다. 불화랄도 다른 장군들처럼 동륙에서 전해진 병서로 수년간 진법을 독학했다. 그러나 결국 그림을 통해 피상적으로만 습득했을 뿐, 심오한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나안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간단합니다. 풍염 황제가 북륙을 두 번째 침략했을 때 사용한 전술이 바로 ‘천심’입니다. 당시 우리 초원인은 빠른 말에 의지한 기병 유격 전술로 유명했습니다. 풍염 황제가 계속해서 우리 유격병의 교란에 대응했다면 전진 속도는 매우 느려졌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했지요. 휘하의 ‘우림상장군’ 소근심에게 정예병 전군을 이끌고 거의 일직선으로 북도까지 전진하라 명령했습니다. 당시 이 천심 전술로 북도성이 함락되었다면 다른 부락은 투항했을 겁니다. 삭북군에 미치는 늑대왕의 권위는 당시 초원 각 부락에 미친 청양부의 권위와 맞먹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우리가 늑대왕을 죽이면 삭북군은 군심이 무너져 싸우지 않고 도망칠 겁니다.”

불화랄은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심은 속도를 앞세우는 전술이군요. 새로이 전쟁에 나간 군대의 사기로 상대방의 본진까지 곧장 뚫고 들어가 적의 우두머리를 베는 것이네요. 하지만 누염은 거의 항상 늑대 기병 3천 명과 함께 있습니다. 설령가 종의 군마를 제외하고 다른 말들은 늑대 떼를 보면 겁을 먹고 사방으로 달아나 대형이 흐트러집니다.”

아소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백랑단 최대의 장점은 전투력이 아니라 늑대를 두려워하는 말의 천성이지요. 일전에 태납륵강 서쪽 기슭에 가서 당시 전장을 보았습니다. 어젯밤에는 전체 지형을 지도로 그렸고요.”

품에서 매끈한 양가죽 한 장을 꺼낸 아소륵은 손수 그린 지도를 불화랄에게 펼쳐 보였다. 아소륵은 지도를 그리는 법을 식연에게 배웠고 식연은 백의에게 배웠다. 백의는 전체 상양관 및 주위의 산과 강까지 두 사람 키 높이만 한 큰 지도에 전부 그려냈다. 아소륵의 솜씨는 백의의 3~4할 정도였지만 양가죽 전체에 기호들이 빼곡했으며 태납륵강에서부터 북도성 일대의 지세를 두루 망라하고 있었다.

아소륵은 지도에서 태납륵강 서쪽 기슭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시 전장은 여기였습니다. 태납륵강 서쪽에서 1리가 못 되는 곳이지요. 백랑단이 출격하기 전, 우리 기병은 절대적으로 우세했습니다. 백랑단이 전장에 들어온 후에도 머릿수에서 우리는 상대방보다 2만 명이나 많았어요. 우리가 패한 이유는 사전에 백랑단의 매복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매복에 당한 후로 군사들은 두려움이 생겼고 군마도 늑대를 무서워하니 저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군심이 무너진 겁니다.”

“말이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은 천성입니다. 더구나 백랑단의 늑대가 아닙니까. 당시 저도 그 늑대들을 보고 섬뜩해져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지요.”

“동륙에서 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군마 한 무더기가 실성한 듯 통제를 잃었죠. 하지만 동륙 장군 한 분이 말의 귀를 틀어막으면 말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아소륵이 불화랄의 눈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말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코도 감싸서 무사의 지휘만 따라 전방으로 돌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럼 말은 맹인이나 다름없잖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바입니다.”

아소륵은 녹색 환약 두 알을 불화랄의 손바닥에 놓았다.

“장군, 전장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두려움은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동륙 장군들은 이리 말했습니다. 죽을 각오가 없이는 살길을 찾기 어렵다!”

“죽을 각오가 없이는 살길을 찾기 어렵다?”

불화랄은 아소륵의 눈을 보며 묵묵히 그 말을 읊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환약을 코에 대자 비릿한 냄새가 났다.

“어젯밤에 만든 겁니다. 여인의 분가루에 어성초 가루를 섞었죠. 말의 콧구멍에 한 알씩 넣고 면사로 감싸면 모든 냄새를 흡수해버립니다. 출격 전, 모두에게 두 알씩 줄 겁니다.”

손바닥의 환약 두 알을 만지작거리던 불화랄의 눈빛이 번득였다.

“대나안께서 저만 이곳에 따로 불러 전술을 설명하고 환약을 주시는 이유가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아소륵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 전술에서 마지막에 늑대왕을 죽이는 사람이 장군이니까요.”

“제가요?”

불화랄의 동공이 커졌다. 전신의 피가 빠르게 흘렀다.

아소륵은 불화랄을 흘긋 보고는 소매를 더듬어 목탄 한 토막을 꺼내 반드르르한 양가죽 뒷면에 진형을 그렸다.

“화살 진형으로 출전할 겁니다. 칸이 호표기 5천 명과 함께 좌봉(左鋒)에, 목해양 장군이 호표기 3천과 함께 우봉(右鋒)에, 한가운데에는 노예와 목민들 중에서 새로 모집한 기병들이 설 겁니다. 이들이 이 화살의 화살대를 이룰 겁니다. 그리고 철진 장군이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진 후방에서 꼬리 깃이 되어 언제든 지원할 수 있도록 대기할 겁니다.”

불화랄이 고개를 저었다.

“신병을 가운데에 둔다고요? 노예와 훈련받지 않은 목민들을요? 늑대가 달려오는 것을 보면 놀라 대형이 흐트러질 겁니다. 삭북부에 참살을 당하고 말 거예요.”

“삭북인도 이 점을 알아챌 겁니다. 좌봉과 우봉은 인원수가 많지 않지만 모두 정예병이니 바로 처리하기 어렵죠. 하지만 중군(中軍)은 실력이 없는 신병입니다. 이들은 기병을 이용해 좌우 양익을 포위 공격하고 신병으로 이루어진 화살대를…….”

아소륵은 불화랄의 화살집에서 화살 한 대를 뽑아 작은 비수로 반 토막을 내며 말을 이었다.

“중간에서 잘라버릴 겁니다! 그럼 저들은 우리 군대를 둘로 나누어 포위하게 됩니다. 우리보다 병력이 우세하니 충분히 그리할 수 있죠.”

불화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삭북부를 이끄는 장군이라도 그리 할 것 같습니다. 좌우의 정예병들을 피해 우회하고 양측에서 번갈아가며 중군을 베겠지요.”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아소륵은 반 토막 난 ‘화살대’를 슥 흝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대군이 주신 정예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중군 앞부분에 숨어 있을 겁니다. 저들은 ‘화살대’를 자른 뒤 먼저 비교적 약한 뒷부분을 해치우는 데 병력을 집중할 겁니다. 이때 저들은 다수의 기병을 이용하겠지요. 그때 좌우 양봉(兩鋒)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1만 정예 기병이 나타나 정면에서 적군을 뚫고 곧장 후방의 호도로한에게로 진격할 겁니다.”

불화랄은 진형도(陣形圖)를 보고 감탄했다.

“알겠습니다. 이때 이 진은 더 이상 화살이 아니라 한 마리 독사가 되겠네요. 1만 기병이 바로 뱀의 혀겠군요!”

“아뇨, 뱀의 혀는 거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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