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13화 (31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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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8)

여수우는 아소륵의 눈을 보았다. 한참 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해주니 기뻐야 마땅하나 기뻐할 수가 없구나.”

여수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논의하는 광경을 너도 다 보았겠지. 대귀족들을 필두로 북도성의 귀족 대다수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늑대왕과 교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와 양을 주고 인구를 주고 북도성까지 내주더라도 청양부가 살길은 남겨야 한다는 게지. 이 전쟁을 치르기 전에 우리는 삭북부 세력이 강하다는 것만 알았지 백랑단의 진짜 위력은 알지 못했다. 하여 교섭을 바라던 이들도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목려는 패했고 철진은 중상을 입었다. 9왕의 호표기마저도 누염의 매복에 당했다. 북도성에 삭북부와 전쟁을 할 용기를 가진 이가 또 어디 있겠느냐? 내가 전쟁을 고집한다고 해도 누가 군을 이끌겠어?”

아소륵이 제 소매를 정돈하더니 일어섰다. 아소륵이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여수우는 놀라 고개를 들고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형님, 저는 열여덟입니다. 제가 북도성에서 자랐다면 열여섯 살 때 소고절을 지내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이후 어른 대접을 받았겠지요. 동륙에서 10년간 살면서 칼을 배우고 군무(軍務)를 배웠습니다……. 더는 형님 기억 속의 어린 아우가 아닙니다. 아소륵 파소이는 이제 출정할 수 있는 사내가 되었습니다.”

아소륵은 여수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형님, 어릴 적 무용지물이었던 아우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여수우는 낯선 사람 보듯 아소륵을 보았다. 아소륵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애썼지만 무쇠 같은 단호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수우가 아소륵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소륵, 네가 그리 말하니 내 무척 기쁘고 안심이 되는구나…… 정말이다……. 하지만 이건 네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목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북도성의 어느 누가 할 수 있겠느냐? 너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 막내 아우가 목려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형님, 제가 자만하는 게 아닙니다. 철진 장군이 부상을 입지 않고 목려 장군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저는 그저 그들의 말 뒤를 따르며 형님을 위해 싸웠을 겁니다.”

아소륵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요. 청양에서는 누군가가 나서야 합니다. 오늘 제가 형님을 찾아온 것도 어제 밤새 생각해 보고 자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기병 1만 명에 귀궁 전부를 주십시오. 그들이면 충분합니다. 삭북부를 물리칠 수 있어요!”

“기병 1만에 귀궁 전부라.”

여수우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아소륵, 네가 뭘 바라는 건지 알고는 있느냐? 네가 바라는 것은 결코 적지 않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청양은 다시 회생하기도 어려워진다.”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터에서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요. 하지만 내일 모두의 앞에서 제 전술을 설명해보이고 그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기병 1만과 귀궁 전부를 기꺼이 제 목숨과 맞바꾸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목숨이지만 실패하면 저는 도망쳐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소륵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소륵 파소이도 초원인의 자손입니다.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수우는 고개를 쳐들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짧지만 힘차게 기합을 뱉으며 두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거면 됐다!”

여수우가 고개를 휙 들었다.

“나는 이런 말이 듣고 싶었다! 내가 장군들과 귀족들을 물고 늘어진 이유도 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충분하다! 저들 모두 입을 다물어도 된다! 내 막내 아우가 이미 말했으니까!”

여수우가 금장궁 밖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반찰렬!”

반찰렬이 대답하며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여수우는 품에서 손가락 두 개 너비의 황금 영부(令符)를 꺼냈다. 영부 윗면에는 아름다운 비호(飛虎)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여수우는 그 영부를 반찰렬에게 던져주었다. 반찰렬은 순간 멍했다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금장궁을 나갔다.

“형님?”

아소륵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지만 여수우는 더 말할 필요 없다며 손을 들어보였다.

“들어봐라.”

아소륵은 여수우와 함께 눈을 감고 바깥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아소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격앙된 말 울음소리가 바람 소리를 뚫고 나왔다. 쇠발굽 소리가 폭풍우처럼 몰아쳐왔다. 군마 수천만 마리가 동시에 질주할 때나 날 법한 소리였다. 지면이 살며시 진동했다. 등불도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소륵은 벌떡 일어나 허리춤의 칼자루를 잡았다. 감히 대군의 금장궁 근처에서 말을 달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렇게 큰 부대의 기병이 갑작스레 쳐들어올 유일한 가능성은 반란뿐이었다.

“나를 따라와라!”

여수우가 아소륵을 이끌고 금장궁을 나섰다.

금장궁의 휘장이 젖혀지고 놀란 아소륵은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밖에는 눈먼지가 한 사람의 키 높이만큼 높게 일었다. 준마 수천 필이 횃불을 높이 들고서 금장궁 주위를 달리고 있었다. 기병들은 전부 적홍색 외투를 덮어썼고 쇠칼에 철갑을 지녔다. 갑옷과 투구에서는 위협적인 차가운 빛이 반사되었다. 아소륵의 손목을 꽉 움켜잡고 금장궁 앞에 선 여수우가 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켰다. 기병 수천 명도 함께 패도를 뽑아 머리 위에서 흔들며 함성을 터뜨렸다.

아소륵을 쳐다보는 여수우의 눈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1만 명이다. 한 사람당 좋은 말을 두 필씩 갖고 있으며 동륙 장인이 만든 최상품 철갑 한 벌과 강철 칼 한 자루를 가졌다.”

“형님께서 훈련시킨 병사들입니까?”

아소륵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다. 이들 1만 명은 내가 왕자일 때부터 훈련시킨 기병이다. 나는 십수 년간 심혈을 기울여 이들을 키워냈다. 그동안 이 군대로 욱달한1)과 죽은 칸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이를 갈았지.”

여수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칸들을 죽이면서 그들도 늙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사 1만 명은 애초에 필요도 없었어. 칼을 들고 장막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칸들은 놀라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애걸했다. 생각해보면 우습지. 십수 년간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필요 없는 군대라니…….”

아소륵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형님…… 태납륵강 일전에서 이 기병들은 출전하지 않았군요…….”

“그래.”

여수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군대를 장악하고 제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귀족들을 꾸짖을 용기가 없었다…….”

여수우가 아소륵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미 짐작했겠지. 네 짐작이 맞다. 저들이 자기 세력을 지키고자 하듯 나 역시도……. 난 목려가 지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청양의 대군으로서 내 목숨은 걸 수 있었지만 소마의 목숨까지 걸 수는 없었어. 1만 기병이 없다면 갓 즉위한 대군인 나는 북도성에서 지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진다. 내가 태납륵강 가에서 죽는다면 그들은 평화를 청하는 조건으로 소마를 잡아다가 바칠 것이다. 그래서 100명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 병사들은 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소마를 엄호해 남문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여수우는 소리 없이 웃고는 잠시 침묵했다.

“아소륵, 비웃어도 된다.”

아소륵은 여수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누구를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 나약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 약해질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아소륵, 이제 네 휘하에 1만 기병이 생겼다! 그리고 네 지휘를 따를 귀궁 1천 명도 있다. 이들은 내가 가진 전부다.”

여수우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끌러 아소륵에게 건넸다.

“아버지가 쓰시던 검이다. 목려도 썼었지. 가져가라! 그리고 네 형과 소마의 목숨도 함께 가져가라!”

아소륵은 손을 내밀어 중검을 받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꿇지 마라. 우리는 주인과 노예 사이가 아니라 형제다.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 다오.”

“무엇입니까?”

“내일 아무에게도 네 전술을 설명하지 마라. 네 출전 계획도 말하지 마.”

여수우가 목소리를 낮추고 눈빛을 번득였다.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 같다.”

“첩자요?”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삭북인의 마지막 전쟁터인 태납륵강 가에 백랑단이 딱 매복하고 있었다. 그 전쟁의 전반부는 목려의 계획과 일치했다. 다만 목려는 단 한 가지를 예상하지 못했다. 바로 백랑단의 위치다. 그런데 백랑단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딱 나타났다. 그 지점은 우리의 숨통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요지(要地)였고 그곳에서 놈들은 족히 한나절을 매복해 있었다. 마지막 전장이 그곳임을 알지 못했다면 늑대왕은 제 무사들을 그리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여수우가 아소륵의 눈을 응시했다.

“누가 말해주었을까?”

아소륵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가슴속까지 오싹해졌다.

“누가 말했을까요?”

“금장궁에서 논의하던 사람들 모두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귀족들도 그리 생각했고 9왕도 그리 생각했다. 욱달한과 귀목2)도, 철진도, 나도 그리 생각했다.”

여수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첩자가 그들 중에 있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저들 중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 나도 혐의가 있다. 하지만 너는 없다. 그때 너는 막 동륙에서 돌아와 곧장 전장으로 달려갔으니까. 지금 너는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마.”

“네!”

아소륵이 나직이 외쳤다.

여수우는 아소륵을 일으키고는 손을 내둘러 기병들을 물렸다. 그는 아소륵을 데리고 다시 금장궁 안으로 들어갔다.

“대사는 논의가 끝났으니 이제 형제끼리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이제 술도 잘 마시니 좀 더 마시거라!”

아소륵은 그날 밤 여수우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잊어버렸다. 동이 틀 무렵 비틀거리며 일어나 금장궁을 나선 기억이 다였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병과 술잔은 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아소륵, 최근의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난 오늘밤 네게 이리 기탄없이 소마 얘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수우가 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웃으며 일어나 아소륵을 잡아끌었다. 아소륵은 눈썹을 찡그리며 꺼억 술 트림을 했다.

“왜요, 무슨 일 났습니까?”

여수우가 아소륵의 눈을 보며 천천히 미소를 짓더니 두 손으로 아소륵의 어깨를 붙잡고 나직이 말했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려는 것 같았다.

“더는 날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 하지만 드디어 소마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낭군을 보는 시선으로 날 바라본단다. 내게 아들도 낳아주겠다 약속했다.”

아소륵은 문득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훈훈한 술기운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소륵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에 달아올랐던 피가 뇌에서부터 온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가며 서서히 식어갔다. 아소륵은 여수우가 웃으면서 금장궁 뒤편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금장궁 측문은 알이타의 흰색 장막으로 통했다. 하지만 여수우는 문을 나가지 못하고 황금 옥좌 옆 바닥에 넘어져 토를 하더니 깊이 잠들었다.

아소륵은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한참을 그곳에 서 있다가 뒤돌아 금장궁을 나섰다. 밖은 어렴풋이 동이 트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소륵은 고개를 들고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세상은 온통 새하얗고, 온통 빛바랬다.

* * *

1) 욱달한은 여응양의 만족 이름. - 저자 주

2) 귀목은 여하의 만족 이름. - 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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