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09화 (309/360)

309

2장. 요궁(妖弓)의 화살 (4)

북도성 밖,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누염은 늑대 가죽에 앉아 자신의 늑대가 멀리서 뻣뻣하게 굳은 시체를 뜯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도로한이 제 아버지의 뒤로 걸어갔다.

“성벽에 접근하는 청양인 한 놈을 붙잡았습니다. 청양에서 내보낸 사신 같습니다.”

“이리 데려와라.”

누염이 명령했다.

늑대 기병 둘이 누염 앞으로 한 청년을 끌고 왔다. 청년은 열여덟, 열아홉쯤 되어 보였고 소박한 목민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뽀얗고 가느다란 손이 그가 귀족 신분임을 드러냈다. 목에 건 은사슬에는 기괴하게 생긴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흑수정을 갈아 만든 원형의 얇은 조각이 정교한 금속 테에 끼워진 물건이었다. 섬약한 청년은 삭북의 늑대왕 같은 악마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던 까닭인지 진동하는 현악기 줄처럼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혼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누염은 의외로 차분하게 그를 쳐다보고는 입을 뗐다.

“안정룡. 사한 소덕랍급의 제자이지.”

안정룡은 멍해졌다. 제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다. 스승님조차도 타고난 자질이 너무 부족하다면서 장차 대합살의 자리를 어떻게 이어받을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초원의 늑대왕이 고작 눈길 한 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다.

“내 아들 호도로한에게 북도성에 주의해야 할 인물이 누가 있는지 알아보라 시켰다. 내 아들 말로는 사한이 아직 살아있으며 자신에게 뛰어난 제자가 있다고 했다더군. 나는 사한을 잘 안다. 그의 눈에 든 제자라면 나 또한 눈여겨볼 것이다.”

누염은 의아해하는 안정룡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다.

“너의 내의 옷깃이 네가 무당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목에 걸린 안경도.”

안정룡은 고개를 숙이고 제 옷깃을 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목민 차림을 했지만 속에는 여전히 무당 특유의 오색 깃이 달린 내의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에서 왔지?”

누염이 물으면서 제 늑대를 바라보았다. 목민이 풀 뜯는 양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란마부요.”

안정룡이 고개를 숙였다.

“지원을 청하러 갔었겠지. 란마부가 고리격대회도 거치지 않은 대군을 추대하며 기꺼이 지원군을 보내준다 하더냐?”

안정룡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직이 말했다.

“란마부에서 지원군을 보내준다 했습니다. 하지만 눈 때문에 진군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런 날씨에 란마부 군대가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무래도 한 달 넘게 걸리겠지?”

누염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던졌다.

“란마부의 기마병은 훌륭하지.”

안정룡은 말을 잇지 못했다.

“청양부가 이길 것 같으냐?”

누염이 숫돌로 자신의 청동 월을 갈며 물었다.

안정룡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무기를 보자 눈에 두려움이 잔뜩 어렸다. 그는 한참을 숨죽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성 아래로 가서 네 부족민들에게 투항하라 설득해라. 그들을 구하러 올 지원군은 없다고 해. 나는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북도성뿐이다. 내가 이 도시를 도륙내기로 마음먹기 전에 네가 그리 하면 부족민을 구할 수 있다. 일을 마치면 저들이 성을 열고 투항하든 안 하든 네게 목민 100명과 양 3천 마리, 아리따운 여인 다섯을 줄 것이며, 내 무당을 시켜주마.”

누염이 담담하게 말했다.

안정룡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월의 예리한 날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슥슥 숫돌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답답해진 호도로한이 안정룡의 뒤로 걸어와 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안정룡은 놀라 눈밭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한번 해봐라.”

누염은 안정룡을 데려가라 손을 내두르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저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나는 저들의 머리를 어떻게 벨지 그 궁리를 조금 더 해야 할 뿐이다.”

안정룡은 늑대 기병에게 눈밭 멀리까지 끌려갔다. 뒤편에서 지시를 내리는 누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호도로한, 저 녀석에게 사람을 붙여라. 수작을 부리려 하거든 죽여 버려.”

순간 안정룡은 발이 삐끗하며 넘어질 뻔했다. 늑대 기병 하나가 닭을 잡듯 그를 들어 올렸고 안정룡은 비틀거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북도성 북문. 대합살은 도포 자락을 들고 허둥지둥 성벽 위로 달려갔다. 표범 깃발 아래에서 불화랄이 매의 눈으로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장궁에는 검은색 우전이 한 대 얹어져 있었다.

“대합살의 제자 안정룡이 맞습니까?”

불화랄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대합살에게 눈짓했다.

대합살은 성가퀴를 붙잡고 내다보았다. 성벽으로부터 200여 보 거리에 청년 하나가 용맹한 삭북 무사에게 붙잡힌 채 무릎을 꿇고 눈밭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불화랄이 나직이 말했다.

“삭북인 말로는 대합살의 제자라는데, 투항을 권유하라 보낸 것 같습니다. 누구의 투항 권유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청양부에 그런 겁쟁이는 없습니다. 대합살께서 타이르십시오. 아니면 제가 화살로 경고하겠습니다.”

대합살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칙1)이냐?”

청년이 눈밭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수려하고 뽀얀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으며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눈빛은 게슴츠레했다. 대합살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대합살은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지원군을 청하라고 보냈던 제자임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대합살은 두어 번 기침을 뱉고는 쉰 목소리로 밖에 대고 외쳤다.

“아마칙, 불화랄 장군이…… 청양부에는 겁쟁이가 없다고 나더러 널 잘 타이르라 했다. 안 그러면 화살로 네게 경고하겠다는구나……. 아마칙, 명심해라!”

대합살은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차가운 바람에 살얼음으로 얼어붙었다. 불화랄은 대합살을 흘긋 보고는 묵묵히 장궁을 당겼다.

안정룡 뒤에 있던 삭북 무사 둘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한 면이 소가죽으로 덮인 방패를 안정룡 앞에 세웠고 다른 하나는 칼을 뽑아 안정룡의 뒷목을 겨누었다.

“일어나서 말해!”

삭북 무사가 나직이 호통쳤다.

안정룡은 묵묵히 일어나 무릎의 눈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성 꼭대기의 스승과 청양 무사 수백 명을 쳐다보았다.

“청양의 부족민들이여…….”

안정룡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지만 유난히 우렁차 눈밭 멀리까지 전해졌다.

“지원군을 요청하러 란마부에 다녀왔습니다. 구남부와 사지부에도 다녀왔습니다…….”

안정룡도 성 꼭대기에 있는 제 스승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들이 승낙했습니다! 지원군이 올 겁니다! 투항하지 맙시다!”

안정룡이 갑자기 목이 찢어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가냘프고 연약한 청년은 일체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냅다 달려들어 어깨로 방패를 든 삭북 무사를 밀쳐내고 미친 듯이 북도성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칼을 든 삭북 무사는 예상치 못한 반전에 순간 경악했으나 이내 칼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며 안정룡의 등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불화랄이 삭북 무사보다 더 빨리 정신을 차렸고 검은색 우전이 쌩 하고 활시위를 떠났다. 칼을 든 삭북 무사는 정면에서 누군가에게 가격당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그는 제 가슴에 꽂힌 우전을 보고는 천천히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육시랄 청양놈들!”

근처에서 보고 있던 호도로한이 크게 분노했다.

“저놈을 죽여라!”

호도로한 뒤에 있던 삭북 기병 수십 명이 동시에 활을 당기고 눈밭을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인영을 조준했다.

“지원군이 올 겁니다! 지원군이 올 거예요!”

안정룡은 달려가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머리칼도 잔뜩 헝클어져 미치광이 같았다. 아마칙은 북도성 성문으로 달려갔다. 흘러내린 눈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속상한 아이가 어미 품으로 달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칙! 서둘러라! 어서!”

대합살이 미친 듯이 포효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200보. 안정룡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우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말 한 마리가 호도로한의 등 뒤에 불쑥 나타났다. 삭북의 늑대왕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이었다. 누염은 무사 하나의 팔을 눌러 들고 있던 활을 내리게 했다. 삭북 무사들은 깜짝 놀라 서로 멀뚱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활시위를 놓았다.

“정말 재미있는 청년이군. 용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 성에 들여보내 주어라. 그는 청양인에게 분명 안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럼 청양의 마지막 희망도 끊길 게야.”

누염이 냉담하게 말했다.

“안 좋은 소식이라니요?”

호도로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놈은 우리를 속이려고 란마부가 북도성에 지원군을 보낼 거라 했다.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린 탓에 눈빛까지 감추지는 못했어. 저 녀석은 지원병을 부르지 못했다. 하나도 오지 않을 것이다. 성에 들여보내면 녀석은 이 나쁜 소식을 여숭의 아들에게 전하겠지. 청양인에게는 두려움만 더해질 뿐이다.”

누염은 말머리를 돌리고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천천히 떠나갔다.

“모든 부락에서 지원을 거절했다는 것이냐?”

여수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금장궁 안, 한껏 기대를 품고 모인 장군들과 귀족들은 차가운 물 한 대야가 머리에 쏟아진 느낌이었다. 금장궁 밖에서는 지원군이 곧 온다는 소식이 무사와 노예, 목민들의 입을 타고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침울하던 성은 돌연 분위기가 고조되며 수많은 사람이 장막들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그러나 정확한 소식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양가죽 외투를 휘감은 안정룡은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연신 몸을 벌벌 떨었다.

“다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지원병을 보낼 수 없다 했습니다. 란마부에서는 심지어…… 반달 천신이 청양에 내린 재난이라며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수우는 입을 다물었고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수십 년이래 북도성의 대군이 처음으로 만족 전체에 거부당했다. 대군의 명령과 요청이 더는 초원에 통하지 않았다. 여수우는 극도의 무력감에 짓눌려 무너질 것 같았다.

“달덕리 칸의 자손이 란마부에서 새로 권력을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선대 대군이 달덕리 칸을 죽인 일로 깊은 원한을 품은 것이겠지요?”

9왕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여수우는 하려던 말을 거두었다. 당시 선대 대군이 여러모로 가늠해본 끝에 고통스럽지만 한때 자신을 아낌없이 지지해주던 달덕리칸을 죽인 것이라고 해도 ‘반달 천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에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도 해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예상했던 일입니다. 다만 시도는 해보고 싶었습니다.”

대합살이 말했다.

“저들은 삭북인이 북도성을 공격하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을 심산인가? 북도성의 주인이 삭북의 악독한 늑대로 바뀌면 그들에게 득 될 것이 뭐 있다고?”

여수우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대군, 사실 북도성의 주인이 우리 청양이라 해도 저들에게 달리 좋은 점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청양이 이 전쟁에서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기더라도 큰 타격을 입을 테니 그들을 토벌하러 올 병력이 없다 여기는 게지요.”

대합살이 고개를 저었다.

“온 초원이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질 것이라고 여긴단 말이오?”

여수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무도 대답이 없었고 금장궁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 * *

1) 아마칙은 안정룡의 만족 이름. - 저자 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