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08화 (308/360)

308

2장. 요궁(妖弓)의 화살 (3)

철진의 성격상, 이는 매우 심하게 한 말이었고 대귀족 가문 가주들은 낯빛이 변했다. 젊은 액일돈달뢰의 눈에 흉악한 빛이 번득 스쳤다.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려는 그를 알적근 가문 가주가 억지로 눌러 앉혔다.

“철진 장군, 우리 늙은이들이 용기가 없다고 비웃는 거요? 제 가축과 장막을 지킬 생각뿐이라고 비웃는 건가?”

알적근 가문 가주가 냉소를 던졌다.

“우리도 장군들과 똑같이 삭북인의 칼에 맞서 싸웠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알적근 가문의 사내 수천 명의 시체가 아직 성벽 밖에 누워 있소!”

여수우가 미간을 바짝 조이며 고개를 저었다. 여복이 황급히 나서 중재했다.

“큰 적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 좋게 얘기합시다. 삭북인들은 우리가 자기 편도 못 믿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사실 삭북도 이번 전투에서 적잖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기병 수만 명이 죽었지요. 호도로한의 병력도 손실이 큽니다. 사기를 잃은 점이 우리 패배의 주 원인이니 지금은 삭북인들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교섭을 한다면 뒤로 미뤄야 합니다. 몇 차례 작은 승리라도 거두어야 회담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어요.”

입을 연 이는 여응양이었다. 한때 북방에서 과부와 전쟁을 치른 나안 여응양은 본디 군사(軍事)에 관해 발언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파면과 사면을 겪은 후 유달리 말이 없었다. 오늘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고 말을 꺼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여응양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가 눈을 부라리며 멸시하는 눈초리로 여응양을 흘긋 보았다.

“늑대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말을 삼가시오.”

여응양의 옆에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하의 눈에 순간 흉악한 빛이 번득였다. 손을 뻗어 칼자루를 잡으려 하자 여응양은 시선을 내리깐 채 묵묵히 손을 뻗어 여하의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여응양은 반박하지 않았고 장막 안은 그대로 침묵에 잠겼다.

여수우의 심복 하나가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대군, 아소륵 대나안이 깨어나셨습니다. 지금 금장궁 밖에 대군을 알현하러 와 있습니다.”

여수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고리격대회는 계속할 테니, 다들 각자 장막으로 돌아가 잘 생각해보시오. 내 다시 소집하겠소.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소. 성안에 굶어죽는 노예가 있다는 걸 알고 있소. 남은 식량이 많지 않다는 건 알지만 노예도 사람이니 목숨은 부지해야지 않겠소. 특히 지금은 사람이 필요한 때요.”

아소륵이 심복을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회의를 하던 이들은 아소륵과 반대로 걸어 나가며 그를 흘긋 훑어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아소륵은 그들의 차가운 눈초리에 얼굴이 베이는 것 같았다. 장막 밖에 서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성 밖의 적은 아소륵의 외조부 누염이니까.

잠시 후 장막 안에는 여수우, 아소륵, 그리고 아소륵을 인도한 심복만 남았다. 여수우는 표범 가죽이 깔린 황금 옥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제 아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아소륵은 자기가 예를 갖추는 것을 깜빡했음을 깨달았다. 형은 이미 대군이었고 대군을 보면 당연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소륵은 약간 적응이 되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구부렸다.

여수우가 멀리서 손을 내두르며 아소륵을 제지했다.

“아소륵, 꿇을 필요 없다. 네가 깨어나 무척 기쁘고 안심이 되는구나. 용감하게 전장에 나선 모습을 보니 그 또한 무척 기쁘다. 무사하면 되었다. 네 어머니께 가봐라. 널 많이 보고 싶어 하실 게다.”

아소륵은 순간 멍해졌다. 감사하단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드는데 여수우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소륵은 여수우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슬펐다. 아소륵은 자신이 불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텅 빈 금장궁 안에 서 있는 제 모습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아소륵은 여수우의 심복을 따라 금장궁 뒤로 갔다. 어릴 적부터 익숙한 곳이었다. 만족은 대군의 막사 전체를 알이타1)라 불렀고 그곳에는 대군을 모시는 여인들과 노예들이 살았다. 동륙 황제의 후궁과 거의 비슷했다. 멀리 내다보던 아소륵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눈밭에 똑같은 흰색 장막 두 채가 있었다. 만족은 대군의 아내들을 알이타의 안주인이라 불렀고 대연지와 측연지로 정실과 첩실을 나누었다. 동륙의 황후, 귀비와 같은 개념으로 그녀들이 낳은 아들만이 적출로서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대연지가 머무는 장막은 지붕이 붉은색이었고 측연지가 기거하는 장막은 하얀색이었다. 아소륵의 어머니 늑마 알이한은 줄곧 하얀 장막에서 지냈다. 갈림길에 선 아소륵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좌우로 난 길을 두리번거렸다.

“저곳은 새로운 대연지의 장막입니다. 줄곧 본인은 비천한 노예 출신이라 붉은 장막에 머물 수 없으며 대군께서 훗날 진짜로 알이타를 관리할 대연지를 맞으실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군께서는 그분이 대연지이며 저희에게도 그리 부르라 지시하셨습니다.”

대군의 심복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소륵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소륵은 모종의 경고 혹은 위협이 담겨 있는 듯한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복이 아소륵을 다른 흰색 장막으로 인도하자 젊은 여자 노예 하나가 먼저 나와서 장막 발을 젖혔다.

“호마는?”

아소륵은 별 생각없이 물었다. 호마는 제 어머니 곁에 있는 가장 유능한 노예였다. 아소륵은 호마가 조금 보고 싶었다.

“호마는 지난해 겨울에 죽었습니다.”

젊은 노예의 말에 아소륵은 울컥했다.

“호마가…… 죽었다고?”

“나이가 들어 죽었습니다. 편안히 떠났어요.”

아소륵은 멍한 얼굴로 안쪽 휘장을 젖히는 노예를 쳐다보았다. 어둑한 불빛 아래 여인 하나가 말없이 침상 가에 앉아 있었다. 세월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앗아가지 못했다. 그녀는 아소륵의 누나인 것처럼 젊었다. 다만 생기를 잃은 두 눈은 한때 초원의 선녀다운 광채를 띠지 않았다. 그녀는 헝겊 인형을 하나 안고 나직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침상에는 담비털 외투가 깔려 있었다. 아소륵은 아버지의 외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깊은 밤에는 가져다가 덮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그리고 제 어머니는 그녀의 낭군이 언제 다시 돌아오나 하고 있을 것이었다.

문득 누군가를 힘껏 끌어안고 싶어진 아소륵은 달려가 제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아소륵은 그녀가 따스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며 머리를 어머니 가슴에 묻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리하지 않고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헝겊 인형만 안고 있었다.

심복은 손을 휘휘 내둘러 노예에게 휘장을 내리게 하고는 뒤돌아 떠났다.

아소륵은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 눈물은 이미 말끔히 닦아낸 뒤였다. 밖에는 젊은 여자 노예만이 숯 화로에 불을 붙이고 있고 아소륵을 데려온 심복은 없었다.

“너 혼자서 시중을 드느냐?”

아소륵이 담담히 말을 걸었다.

“전에는 몇 명 더 있었는데 호마만큼 빠릿빠릿하지 못했어요. 시중을 잘 들지 못하자 주인님께서는 가끔 화가 나 우셨고, 바로 밖으로 쫓아 보내셨죠. 저 혼자도 충분합니다. 새로운 대연지께서 주인님께 얼마나 잘하는데요. 매일 와서 함께 계십니다. 가끔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세요. 그럼 대군께서는 저쪽 흰 장막에서 밤새 기다렸는데 얼굴도 못 봤다며 불평하신답니다.”

젊은 여자 노예는 직설적으로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노예는 아소륵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멍해져 고개를 돌려보았다. 밖에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젊은 대나안은 묵묵히 휘장을 젖히고 걸어 나갔다.

아소륵은 길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눈이 머리카락에 나부꼈고 천지는 아득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남긴 족적이 서서히 새로 내린 눈에 뒤덮여갔다. 저 멀리 흰 장막 두 채가 흐릿해 보이기 시작했다. 두 장막은 하나의 성문 같았다. 아소륵은 신발로 주위 눈을 쓸어보았다. 갈림길에 어귀에 서 있었다. 그는 발아래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른 쪽 흰색 장막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그 장막까지 여남은 걸음밖에 남지 않았을 때 아소륵은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피리소리였다. 듣고 있으면 달밤에 소녀가 혼자서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소마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리로 표현했다. 아소륵은 속으로 피리 선율을 좇으며 약간 고리타분한 선비 같은 백리욱이 진지하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연주한 거지? 이를 테면 아득히 넓은 초원에서 가족이 멀리 떠난 거야. 피리를 부는 사람은 장막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며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래서 곡조가 내내 낮게 맴돌았던 거야. 이따금 바람만 불어오고, 멀리 목민과 말 떼가 보여 맞으러 가보지만 가족이 아니야. 그래서 또 바람소리만 들리는 초원을 여전히 애틋하게 바라보는 거지. 다만 약간의 실망이 더해진 채로 말이야.”

아소륵은 어릴 적 그가 한밤중에 잠에서 깼을 때 들었던 피리소리가 떠올랐다. 그때 소마는 밖에 있었고 자신은 안에 있었다. 아소륵이 기침을 한 번이라도 하면 소마는 바로 들어와 아소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불을 잘 여며주었다. 아소륵은 자신이 밖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소마가 안에 있는 광경은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소마, 그동안 잘 지냈어?”

아소륵은 작디작은 목소리로 눈에 대고 말했다.

장막 밖에서 잠시 서 있던 아소륵은 피리소리가 차츰 잦아들자 그제야 뒤돌아 떠났다.

갈림길 어귀까지 돌아와 아소륵은 다시 한 번 눈보라 속 흰 장막을 돌아보았다. 문득 희야가 빌려주었던 <사주장전록>에 나온 이야기가 떠올랐다. 맨 마지막, 장미 공주를 품에 안고 설야교 가에서 지평선의 천계성을 바라보는 장미 황제의 모습은 더없이 외로웠다. 아소륵은 장미 황제의 심정이 이러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고향이지만, 정말 외로웠다. 잃어버린 무언가는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

* * *

1) 고대 터키어, 몽골어로 황제의 궁전을 뜻하는 오르도(Ordo)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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