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07화 (30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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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2)

대합살은 아소륵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 대합살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자왕은 네게 ‘아소륵’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지. 우리 모두는 네가 ‘장수’하기를 바랐다. 네가 저주의 피를 억누르고 오래오래 살아간다면 네 아버지 평생의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겠느냐!”

“장…… 생왕.”

아소륵이 중얼거렸다.

장생왕이란 말이 원래 이런 뜻이었구나. 기억 속 그 사내의 눈에는 의연함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소륵은 묵묵히 몸에 긴장을 풀고 푹신한 침상에 누웠다.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꽤 지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서서히 옅어졌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아소륵은 제 아버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정작 ‘이해한다’는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아소륵은 로 선생이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다가 돌연 이야기를 멈추고 말없이 창밖의 오동나무 한 그루를 쳐다보았던 기억이 났다.

로 선생은 이리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열두 해가 넘었습니다. 어릴 적 저희 집은 가난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저를 위해 오동나무를 심어주셨지요. 여름에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으면 아버지께서는 대신 부채질을 하여 모기와 파리를 쫓아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야 무럭무럭 자라라, 아들도 무럭무럭 자라라. 이 나무가 지붕처럼 우뚝 자라나면 내 아들도 높은 관직에 올라 화려한 가마를 탈 것이다.’”

아소륵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대합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광혈을 사용할 때마다 저주가 네 몸을 잠식할 것이다. 네 몸은 보통 사람처럼 건장하지도 못하지. 철익에게 전쟁터에서의 상황을 들었다. 동륙인들은 당시 모종의 비술을 사용해 네 핏속의 사나운 성질을 강제로 억눌렀다. 나도 비술은 잘 모르지만 강한 비술일수록 위험하다. 광혈을 억제할 비술이라면 더더욱 위험할 것이야. 동륙 곡예꾼들의 줄타기처럼 자칫하면 네 몸에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 이들 동륙인의 힘만이 당시 그들이 네 몸속에 봉인했던 금제(禁制)를 풀 수 있다. 넌 그 힘에 침범당해 한 달 내리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반드시 명심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알겠어요!”

아소륵이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유, 이제 막 깨어난 애한테 무슨 말이 그리 많으세요? 배들 안 고파요?”

영씨 부인은 분위기가 좀 누그러지자 늙은 대합살을 향해 투덜거리며 아소륵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잠든 한 달 동안 양젓으로만 연명했으니 배고파 죽겠죠? 우리 대나안도 벌써 열여덟 먹은 사내가 되었으니 당연히 양젖만으론 부족할 거예요. 한타고기 드실래요?”

아소륵의 배가 영씨 부인에게 대답하듯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꼬르륵 소리를 냈다. 아소륵은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영씨 부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치마를 추켜들고 일어나 장막 밖으로 향했다. 휘장을 젖히자 철익이 두 아들을 데리고 분주하게 달려 들어와 아소륵의 침상 주위를 에워쌌다. 오는 내내 동륙 군영에서 가져온 군복을 입고 있었던 철안과 철엽은 새로운 만족 장삼을 입었다. 한눈에 봐도 만족 소녀들이 그리는 건장한 만족 사내였다. 철안과 철엽은 목을 빼고 동시에 같은 말을 뱉었다.

“깨어나셨네요, 놀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철익은 흠칫하며 두 팔로 아들들의 허리를 밀어냈다. 마치 난폭한 멧돼지가 그들 사이를 헤집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비를 제치고 어디서 먼저 입을 여느냐!”

성격도 제 형보다 활달하고 아버지를 어려워하지도 않는 철엽이 말대답을 하려 하자 철안이 팔꿈치로 쿡 찌르며 아버지 말씀이 끝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라고 눈치를 주었다.

철익은 10년간 못 본 아들들이 자신의 위엄에 복종하는 모습에 매우 만족하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점잖게 아소륵에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깨어나셨군요. 놀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한 말이랑 똑같네.”

철엽은 입을 틀어막고 피식 웃었다.

“같은 말이라도 아비가 하면 다르다!”

철익이 강조했다.

철안은 그만 다투라며 제 아버지를 향해 손을 내둘렀다. 철익은 확실히 제 아들만큼 말주변이 뛰어나지 못했다.

아소륵은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철익이 처음 자신의 두 아들을 제게 심복으로 보내주던 날,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새끼들입니다. 세자께서도 분명 맘에 드실 겁니다!”

아소륵은 철안과 철엽이 좋았다. 이렇게 세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10년간 변하지 않은 무사, 철익은 더 좋았다. 이곳은 그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아소륵은 자신의 벗들과 다시 만났다.

대합살의 품에서 자그마한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파태라는 이름의 나그네쥐가 가만 못 있고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다. 아소륵은 문득 대합살이 파태라는 이름을 지을 때 이들 막속이 가문 무사의 아명을 따라 지은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나 파태는 때를 잘못 맞춰 머리를 내밀었다. 영씨 부인의 장막에서 기르는 얼룩 고양이가 침상 한쪽 구석에서 튀어나오더니 번개처럼 다가가 파태를 잡으려 발을 쭉 뻗었다. 파태는 허둥지둥 침상 아래로 달려갔다. 대합살은 평생 이 귀한 녀석 하나만 길렀다. 원래 나그네쥐는 몇 년을 못 사는데 대합살은 십 수 년을 키웠다. 놀란 대합살이 얼룩 고양이를 막으러 달려갔다. 막속이 가문의 부자(父子) 세 사람은 대합살을 도와 고양이를 막으려다가 그만 서로 부딪치고 말았다. 건장한 체구에 힘도 좋은 이들이라 부딪치면서 한 걸음씩 비켜나게 되었고 얼룩 고양이는 그 틈에 곧장 파태를 잡으러 내달렸다.

“발도아! 발도아!”

아소륵이 다급히 얼룩 고양이의 이름을 외쳤다.

얼룩 고양이가 멈춰 서더니 아소륵을 돌아보았다. 낯선 사람이 제 이름을 왜 부르는지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그 틈에 얼룩 고양이를 뛰어 넘어간 대합살이 파태를 붙잡아 양가죽 두루마기 안에 밀어 넣었다.

막속이 부자 세 사람은 어깨를 툭툭 털면서 서로 왜 이리 덤벙대느냐면서 투덜대다가 아소륵이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냉큼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물 드릴까요? 뭐 드실래요? 제 새끼들한테 시키면 됩니다.”

철익이 아버지의 위엄을 보였다.

아소륵은 살짝 머쓱해졌다.

“용변을 좀 보러…….”

“아, 네. 밖이 아주 추우니까 장막 안에서 볼일 보시면 됩니다. 이따가 노예들 시켜 흙 한 겹 덮으면 되거든요.”

마침내 기회를 잡은 철엽이 제 아버지를 쿡 찔렀다.

“대나안은 동륙인의 서책을 수년간 읽으신 분이에요. 동륙에서는 잠자는 방에서 볼일을 보지 않아요. 방 안에서 본다고 해도 기물을 사용하죠. 고양이도 아니고 무슨 흙을 덮어요? 더구나 영씨 아주머니의 장막은 이렇게 깨끗한데…….”

아소륵은 부자간의 실랑이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양가죽을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좀 나갔다 올게요. 한타고기 요리가 다 됐는지 유모도 좀 보고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군침이 뚝뚝 흐르는 눈빛을 하고서 침상 가에 기대 앉았다.

아소륵은 장막 휘장을 젖히는 순간 아연실색했다. 장막 밖은 끝도 없이 눈으로 뒤덮여 있고 장막 옆에는 여인 하나가 구리 대야를 든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인은 향긋한 향이 코를 찌르는 한타고기 덮밥이 든 대야를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없이 흐느꼈다. 손수 요리한 한타고기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소륵은 여인의 뒷모습에서 그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슬픔이 느껴졌다. 아소륵의 몸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마디마디 얼어붙어 갔다.

“유모…….”

아소륵이 입술을 달싹였다.

영씨 부인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지만 초췌한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아소륵은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평생의 반려를 잃었는데 어떻게 상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 앞에서 목려가 스스로 목을 베었으니 당연히 슬프겠지. 목려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패전을 야기한 늙은 노예로 여기는데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목려는 유모의 부군이었다! 부군이 어떤 의미던가?

아소륵은 마음 깊이 무력감을 느꼈다. 다들 아소륵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이들의 눈에 자신은 여전히 아이였다. 그러나 아소륵은 행복할 수 없었다. 목려가 죽었다. 목려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던 순간이 눈에 선했다. 북도는 여전히 포위되어 있고 성 밖에는 대략 수만 구의 시체가 드러누워 있다. 아소륵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그의 고향 하늘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소륵은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영씨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유모, 내가 있잖아요……. 목려 장군이 있을 때와 다를 것 없어요!”

금장궁. 여수우와 장군들, 귀족 가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복은 쿵쿵 뛰는 가슴을 안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장군들은 철진을 필두로 하여 전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유지했다. 귀족들도 안색을 굳힌 채 말이 없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알적근 가문의 가주였다. 나이가 제일 많고 세력도 제일 컸다. 3 대 대귀족 중에 원래는 합로정 가문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그러나 가주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 액일돈달뢰가 막 가문을 이어받았는데 액일돈달뢰가 아직 너무 어린 탓에 본래 합로정 가문에 의탁하던 작은 가문들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청년은 눈에서 칼이라도 뽑아낼 듯 섬뜩한 눈빛을 하고 알적근 가주 옆에 앉아 있었다. 여수우도 말없이 한 손으로 황금 옥좌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여복은 유달리 불안했다. 여수우는 손잡이를 붙잡고 가만히 있을 때 항상 손에 힘을 꽉 주었는데 그가 애써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수우의 침묵이 너무 오래 이어지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누구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다. 다른 부락에서 논쟁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벌써 칼을 뽑아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청양은 어쨌든 동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부락이었다. 예를 중시했으며 대군의 위엄을 무시한 채 칼을 뽑아들고 아우성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여수우가 황금 옥좌에서 일어나 군중 속으로 걸어오더니 양손을 펼치며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다들 의견이 다르니 손왕의 방법에 따라 작은 고리격대회를 열어보겠소. 다들 앉아서 발언하시오. 누구나 말할 수 있소. 타인의 발언 자격을 의심하지 말고 우려하는 바를 다 말해보시오.”

알적근 가문 가주가 고개를 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대군, 제 생각과 대군의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장군들은 대체로 전쟁을 하자는 입장이고 우리 가주들은 대부분 교섭을 하자는 입장입니다. 그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요. 장군들이 말할 자격 없다고 한 이유는 장군들의 용기와 충성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늙은이들도 젊었을 때 추앙받는 용사였고 손에 든 칼과 검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제 가문에 딸린 식솔만 수만 명에 이르다보니 그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습니다. 북도성 안 수십 만 명의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장군들은 선조들의 존엄이 삭북인에게 더럽혀져서는 안 되며 선조들의 땅을 늑대 새끼들에게 내줄 수 없다 하는데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철진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우리는 지금 알적근 가문의 존망이 아닌 청양의 존망을 이야기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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