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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
12월 열이레, 북도성.
천천히 눈을 뜬 아소륵은 유백색 장막 천장을 보았다. 오색으로 땋아진 줄이 하나 드리워져 있고 그 아래로 작은 구리 방울이 엮여 있었다.
아소륵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일생처럼 긴 꿈이었다. 꿈에서 아소륵은 아직 남회에 있었다. 넘실대는 물결 위에서 아소륵과 우연, 희야는 훔쳐온 뗏목을 저으며 봉황지를 떠다녔다. 아소륵은 아직 온전히 정신이 들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눈앞의 모든 것이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아주, 아주 오래전 이곳에 누워서 오색 줄과 구리 방울을 보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불현듯 여기가 목려의 집이며 자신이 이미 북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릴 적 목려에게 칼을 배우다가 가끔 늦어지거나 지쳐서 탈진하면 영씨 부인이 제 장막에 데려와 재워주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이 줄과 구리방울이 보였다. 10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것은 없었다. 양젖 냄새까지도 똑같았다.
아소륵이 애써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데 부드러운 손이 아소륵의 이마를 짚었다.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아름답고 위엄 있으면서도 온화했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주름만 몇 가닥 더 졌을 뿐이었다. 아소륵은 한눈에 알아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유모.”
이 세상에서 그가 유모라 부르는 사람은 단 둘이었다. 가륜첩 유모는 이미 철선강 가에서 죽었고, 남은 이는 목려의 아내 영씨 부인이었다.
“대나안, 깨어나셨군요. 이달 내내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대합살께서 오늘 깰 거라고 하기에 눈이 빠져라 보고 있었는데 정말 대합살 말씀이 맞았네요.”
영씨 부인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소륵의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영씨 부인이 아이를 막 예뻐라 하는 여인은 아니지만 호방하게 미소를 지을 때면 곁의 어떤 아이라도 그녀를 가장 미더운 유모로 여길 것이었다.
“목려 장군은…….”
아소륵의 목소리가 떨렸다.
“묻었어요. 대군께서 목려는 충성스럽고 용맹한 무사였다면서 패배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금장궁에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무사는 언제고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날이 오게 마련이죠. 저는 알고 있었어요.”
영씨 부인은 아소륵을 부축해 잘 눕히고 손을 뻗어 땋은 줄을 잡고 흔들었다. 방울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달 전 일이랍니다. 한 달을 꼬박 잠들어 계셨어요.”
“한 달이나…… 잤다고요?”
아소륵은 깜짝 놀랐다.
장막 휘장이 젖혀지고 반짝이는 민머리가 나타났다. 달려 들어온 사람은 사냥하는 들고양이처럼 급했다. 그는 다가와 영씨 부인을 밀치고 아소륵의 어깨를 덥석 붙잡고는 상하좌우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대합살, 저 괜찮아요.”
대합살은 안도했는지 자리에 앉아 민머리를 더듬거렸다.
“저번에 기절했을 때는 깨어나서 날 못 알아봤었다. 그러니 내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소륵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가볍게 웃었다. 북도성 성벽을 본 이래, 처음으로 영씨 부인이나 대합살처럼 변하지 않은 것도 있음을 알았다. 이들은 헤어진 이후의 일들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지도 않았고, 얼마나 그리웠는지 유난스레 표현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그저 아소륵이 사냥을 한 번 나갔다 온 것처럼 이야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죠?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았는데요.”
“동륙에서도 뜨거운 피가 솟구친 적이 있었지?”
대합살은 엄숙해졌다.
사형장에서의 일이 떠올라 섬뜩해진 아소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무시무시한 힘과 의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소륵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극도로 위험한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아소륵이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희야는 갈가리 찢겼을 수도 있었다.
대합살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떠날 때 네가 너무 어렸던 터라 선대 대군께서는 말해주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고 또 두려워할까 봐 걱정했지. 네가 돌아온 지금, 선대 대군이 안 계시니 이 늙은이가 말해주마. 네 병은 치료되지 않았다……. 사실 애당초 네게 병은 없었다. 네 혈통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너는 청동의 피를 가졌어!”
“청동의…… 피요?”
아소륵은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무엇이 청동의 피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청동의 피는 오랜 세월 파소이 가문에 전해오는 전설이었다. 무신이 파소이 가문에 하사한 것으로 이 혈통을 가진 자는 무신의 화신으로 변할 수 있으며 전장에서 혼자 수천 명을 죽일 수 있다. 마지막 청동의 피 보유자로 알려진 파소이 가문의 후손은 바로 아소륵의 할아버지 흠달한왕이었다. 그러나 흠달한왕이나 아소륵의 아버지도 만인이 우러르는 청동의 피를 길한 징조로 보지 않고 악마라고 말했다.
사형장에서 자신도 피에 굶주린 마귀 같지 않았던가? 아소륵은 살짝 몸서리를 쳤다.
대합살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래 전에는 이런 혈통을 ‘광혈(狂血)’이라 불렀다. 이 혈통을 지닌 자는 신의 보호를 받는 것인지 악마의 저주에 걸린 것인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보다 훨씬 힘이 강하고 속도가 빨라 무사가 될 자질을 타고 난다. 핏속의 힘이 전부 터져 올 때면 그들은 ‘광전사(狂戰士)’가 된다. 광전사에게는 혼자서 군대 하나를 쓸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광전사의 몸은 불가사의한 능력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를 테면 상처가 빠르게 아문다거나 시력과 청력이 평범한 사람보다 예민하지. 고통도 모르고 피로도 모른다. 이성이 없어서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을 죽이려고만 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체력이 다 소모되어 죽을 때까지 사람들을 죽인단다.”
아소륵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무서운 점은 또 있다. 광혈은 종종 초원의 무신을 만들어내고 그를 완전히 훼멸시켜버린다. 지금까지 광혈을 지녔던 모든 사람은 금기된 힘을 거듭 사용함에 따라 서서히 본성을 잃어갔다. 네 조상인 의마덕은 우리가 아는 첫 번째 광전사다. 그는 결국 실성했고 자신이 유린한 친누이들을 협박해 광란의 밤을 보낸 뒤 그들을 차례로 물어뜯어 죽였다. 그리고 칼로 제 근육을 조각조각 베어냈지.”
아소륵의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머리 꼭대기로 치솟아 랐다.
“네 할아버지는 사실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젊었을 적에는 청양의 선조 의마덕보다 훨씬 올곧았지. 하지만 그도 광혈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당시 집권했던 청양의 5대 가문 노인들이 비밀리에 모의해 그의 어머니를 죽이면서 처음 광혈이 폭발했지. 그때 네 할아버지는 혼자서 수백 명을 죽였다. 힘에 도취된 네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으스댔다. 무신의 사자라 자처하면서 점점 난폭해지는 성격은 아랑곳하지 않았어. 결국 그는 점점 미쳐갔다. 모든 것을 의심했고 심지어 가장 사랑하던 여인도 의심했다. 네 할머니 활란팔실 대연지 아흠막도가 다른 이와 간통했으며 아소륵 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아내와 아들을 내쫓았지. 네 할머니는 그래서 죽었다. 정신을 차린 네 할아버지는 그 일을 떠올리고 비통해 울부짖었다. 그는 점점 광혈이 솟구칠 때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감각에 집착하며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진안부 주군에게 시집간 네 고모는 원래 네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딸이었다. 하지만 네 아버지를 구하고 또 천리 길을 달려 북도성에 와서 그를 봐달라고 애원하자 네 할아버지는 통제력을 잃고 채찍으로 자기 딸을 때려 죽였지…….”
“언젠가 저도…… 그렇게 되겠군요?”
아소륵이 나직이 물었다.
“미친놈처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고 대합살과 유모도 알아보지 못하겠죠.”
마음이 시큰해진 영씨 부인이 다가가 아소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합살에게 그만 말하라고 손을 내둘렀다.
“하지만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착한 아이다.”
말 많은 노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더 진지해졌다.
“의마덕도 아니고 납과이굉가도 아니지. 너는 누구도 증오하지 않아. 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이리 말했었다. 이번 대 우리 파소이 가문에는 청동의 피를 가진 아들이 하나뿐인데 신은 왜 하필 그 혈통을 내 가장 나약한 아소륵에게 하사하셨을까? 나는 가장 강한 아들에게 하사했다면 더 두렵지 않았겠느냐고 되물었다. 네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더구나. 나는 그럼 된 거 아니냐고, 당신 아들 아소륵은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제가요?”
아소륵은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았다. 나이든 두 눈에 청년보다도 더 뜨거운 빛이 번뜩였다.
“힘이 세다고 강한 것이 아니다.”
대합살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람의 강건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소륵, 이해하겠느냐? 너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 없다. 이건 네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악마 같은 피를 억누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한 내면이 아니겠느냐? 네 아버지가 너를 남회에 보낸 이유이기도 하다. 네 아버지는 네가 형제들 간의 전쟁에서 멀리 떨어져 그의 가장 큰 염원을 이루어주기를 바랐다.”
“가장 큰…… 염원요?”
아소륵의 기억 깊은 곳에서 눈동자에 백흔을 가진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가 아소륵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이 무엇이었더라…….
“동륙에 가려무나! 아들아, 아비와 어미는 널 생각할 거다. 네가 돌아오는 날, 네 모친을 데리고 호표기 부대와 함께 천척협 해변에 가서 너를 태운 큰 배가 바람을 타고 물살을 가르며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마. 그때 이 아비가 너를 새로운 대군으로 금장궁에 앉힐 것이고 초원의 모두가 널 장생왕이라 부를 것이다!”
남회에서 지내는 동안 아소륵은 내내 이 말이 공허한 격려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정말로 강한 형들에게서 대군의 자리를 빼앗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아버지의 두 눈은 아소륵과 달리 몹시도 진실하고 간절했다.
“이 세상에 네 아버지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바로 청동의 피다! 그 피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네 아버지의 어머니와 누나를 죽이고 그가 지위를 잃고 떠돌며 수모를 당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잘못을 자기 아버지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어. 하지만 네 아버지는 너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너를 사랑했고 네가 청동의 피를 억눌러 네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일들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