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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여우의 분노 (7)
“공격해. 오래 타지는 못하지만 저놈을 죽이기엔 충분할 거다.”
그자의 등 뒤, 어둠 속에서 활등 모양으로 구부러진 검 한 자루가 천천히 나타났다. 용맹한 인영 하나가 성큼 나와 빗물을 밟으며 사규를 향해 다가왔다. 타오르는 종이가 주위를 환히 비추며 뇌벽성의 제자가 몸을 감추었던 어둠을 몰아냈다. 사규의 측면 근처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뇌벽성의 제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강청색 장도를 한쪽으로 떨구자 빗물이 빠른 속도로 핏자국을 씻어내며 흘러내렸다.
호검(弧劍)을 든 자가 사규 앞으로 걸어왔다. 열예닐곱쯤 된 사내였다.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든, 몸에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리지만 호방해 보이는 얼굴이었고 머리카락은 대충 하나로 묶어 어깨에 늘어뜨렸다.
뇌벽성의 제자는 그를 등진 채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검이 아주 좋군. 살수검인가?”
사규가 말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물러났다.
“영호(影虎). 직접 만들었다.”
청년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때 청년이 검을 회전시켰다. 검신에 우산을 든 자의 손아귀에 놓인 불빛이 반사되면서 눈이 부셨다.
“서둘러. 시간 허비하지 말고.”
우산을 든 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재촉했다.
청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청년과 뇌벽성의 제자는 2장 남짓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거리면 사규가 긴 창으로 맹렬한 일격을 날릴 수도 있는 위험한 거리였다. 하지만 양측은 공격에 급급하지 않았다.
“천라, 뒷일은 생각하고 이러는 건가?”
뇌벽성의 제자가 담담히 물었다.
“누가 알겠어? 어르신네들은 아마 생각했겠지만 우리에게 말해줄 리 없잖아.”
우산을 쓴 자는 한 마디, 한 마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리는 건 빗소리뿐이었다. 청년이 ‘영호’를 회전시켰다. 검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빛이 매우 빠르게 번쩍거렸다. 그러나 청년의 발은 땅에 못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구 무사들이 천천히 모였다. 사규는 우산을 든 자의 손바닥에 떠 있던 종이가 서서히 재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그 종이가 타는 속도는 무척 더뎠다. 그러나 사규는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일단 비술로 지핀 불이 꺼지면 어둠이 다시 찾아올 것이고 효동을 지닌 뇌벽성의 제자가 다시금 우위를 차지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우산을 든 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청년은 무표정했다.
마침내 종이가 다 타고 우산을 든 자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 떠 있던 종이는 사그라지기 전 폭발하듯 3척 높이의 화염으로 솟구쳐 올랐다. 청년의 검이 급속도로 진동하며 웅웅 귀를 찌르는 소리가 났다. 태양 같던 빛이 삽시간에 꺼졌다. 천구 무사 6명은 순간 무기를 들어 올리며 방어했다. 사규는 빛이 꺼지기 직전, 검을 끌며 쏘아져 나가는 청년을 보았다. 발등을 넘지 않을 정도로 고인 물속에서 검날이 한 줄기 은빛 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어둠이 내리고 효동의 녹색 빛이 다시 살아났다. 뇌벽성의 제자는 이번에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두 눈에서 형형한 잔광이 길게 드리워졌다. 어둠 속에서 불 붙인 선향을 흔드는 것처럼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사규도 간신히 쫓아갈 뿐이었다. 녹색 빛 두 줄기가 어둠 속에서 돌연 번뜩이더니 급속도로 전진했다가 후퇴했다. 청년의 검 ‘영호’가 사규의 창보다 훨씬 위협적인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이 물을 딛는 소리가 한데 울리고 금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둘의 무기는 단 한 번도 엇갈리지 않았다.
우산을 든 자가 근처에서 가볍게 웃으며 부시를 비벼 횃불을 켰다. 종이를 태워 밝게 비추는 비술이 정신을 상당히 소모하는 탓인지 두 번은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불똥이 떨어지며 횃불이 타올랐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발소리와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잠잠해졌다. 우산을 든 자가 횃불을 높이 들어올렸다. 사규가 실눈을 떴다. 청년이 든 ‘영호’가 보였다. 폭우가 청년의 시커먼 갑주에 쏟아지며 반짝이는 물방울이 튀었다.
“내가 필요 없어 보이네. 칼이 너무 뛰어나니 파수꾼은 할 일이 없단 말이지.”
우산을 든 자가 웃으며 말했다.
청년이 사규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뇌벽성의 제자가 뒤로 쓰러졌다. 목 아래에 난 상처 하나가 다였다. 구멍 난 물 자루처럼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빗물과 섞여 아래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규로서는 믿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청년은 어둠 속에서 순간 사라지면서 영호검으로 상대의 턱 아래를 찔러 머리까지 그대로 꿰뚫었다. 뇌벽성의 제자는 고인 물속에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손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소매 갑옷에서 무언가가 쏘아지며 밤하늘에 날카로운 울림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순간 사규의 안색이 변했다.
“난 이자를 죽이라는 명령만 받았다. 이자는 죽었고, 다른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규를 보았다.
사규는 아무 말 없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고 경계를 유지한 채 청년이 느릿느릿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규는 청년의 눈에서 호랑이 같은 빛살을 보았다. 몰아붙이면 안 되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청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더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보이던 검은 옷에 자잘한 상처가 수십 개나 나 있었다. 새빨간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일부 상처는 급소에 매우 가까웠다. 뇌벽성의 제자가 한 치만 더 깊게 찔렀어도 이 싸움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었다.
“용양, 버릇없이 굴지 마라. 천구무사단의 사규 선생이시다.”
우산을 든 자가 느릿느릿 말했다.
청년은 멈추지 않고 검을 검집에 넣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우산을 든 자가 구석에서 걸어 나와 사규와 나란히 섰다. 그는 떠나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고용주를 실망시키지 않았지요? 청년의 오만함은 양해해주십시오. 저희 천라산당에 50년 만에 나온 도술이 가장 뛰어난 청년입니다. 능력이 너무 출중하여 저희도 어떤 임무에 보내야 좋을지 모른답니다. 녀석에게 적절한 목우(木偶)를 찾아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우’는 자객이 죽일 목표를, ‘칼’은 살인 임무를 행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파수꾼’은 빠져나간 물고기를 확인사살하거나 도망칠 수 없는 살수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에 말했던 보수인 5천 금수에 해당하는 금표요. 완주 강씨가 발행한 것이니 완주와 황성 어디에서든 교환할 수 있소.”
사규는 품에서 밀봉된 작은 대나무 통을 꺼내 건넸다.
우산을 든 이가 대나무 통을 받아 들고 소매 속에 넣었다.
“무사들께서 운이 좋으셨습니다. 이런 암살 무술을 훈련한 진월 교도는 여러분처럼 전쟁에 나가 적을 베어 죽이는 무사들이 능숙하게 상대하기 어렵지요.”
“금표의 액수는 확인 안 하나? 천라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장사꾼이라 1푼 1리까지 정확히 셈한다던데.”
사규가 우산을 든 이를 흘겨보며 말했다. 갈색 대나무 우산은 여전히 은근하게 그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천구의 신용을 믿으니까요.”
우산을 든 자가 뒤돌아 떠나려 했다.
“자네들이 중시하는 것이 5천 금수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사규가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천라가 이깟 푼돈에 자객을 내보낼 리 없다. 자네는 이름이 소학휘라 했고 저 청년은 용양이라 불렀지. 천라의 3대 가문 중 용가는 극치의 암살 무술을 연구하고 소가는 살인 비술에 가장 정통하지. 절대적인 이익 없이 천라가 자네들 같은 최강의 조합을 내보낼 리 없지 않나?”
“자객은 임무를 실행할 뿐, 책략을 묻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이유를 지나치게 궁금해하면 결심이 흔들릴 수 있으니까요.”
소학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래가 끝났으니 어서 벗을 구하러 가시지요.”
“살펴가게.”
소학휘는 쏟아지는 폭우 속을 몇 걸음 걸어 가다가 멈추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르신들께서는 이 시대가 다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진월의 이번 계획이 성공하든 못하든 대윤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천구든 진월이든 누가 새로운 시대를 주재할지 알고 싶습니다. 염(魘)은 식 장군을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식 장군이 장차 동륙에 평안한 새 시대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객도 평안한 시대에 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사이에 더 많은 거래가 생길지도 모르지요.”
“진월과도 좋은 거래를 하지 않나?”
소학휘가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진월의 교도들이 값은 더 후하게 부릅니다……. 하지만 어르신들께서는 진월과의 이전 거래를 별로 만족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완주 상인처럼 말하는군.”
“그게 우리의 차이지요. 우리는 천구도, 진월도 아닙니다. 이상이나 신을 위해 전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소학휘는 멀리서 인사하듯 살짝 몸을 숙이고 느릿한 걸음으로 떠나갔다.
사규는 말없이 빗속으로 들어가는 소학휘의 뒷모습을 보았다. 폭우에 녹아들 듯 사람은 돌연 사라지고 우산 하나만 툭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