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02화 (302/360)

302

1장. 여우의 분노 (6)

감옥의 죄수들이 전부 철창을 붙잡고 식연을 쳐다보았다.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감옥 동기가 죽기 직전에 이르자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가 싶었다. 식연은 꼭 누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묘당은 높고 화려한데 들려오는 제악 소리는 낡았구나

초는 다 타들어가고 어렴풋한 노랫소리만 들리나니.”

식연이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노래를 읊조렸다. 그의 손안에서 36현이 명료하게 움직였다. 손가락을 구부려 고목을 치고, 칼을 뽑아 기둥을 두드리는 듯했다. 갑자기 식연의 열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며 깃털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뇌벽성의 제자도 동시에 단적(短笛)을 불었다. 그의 피리 소리는 유난히 맑았다. 백의의 퉁소 소리에 깃든 강직함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피리를 상당히 공들여 배운 게 분명했다. 피리 소리는 식연의 공후 소리를 좇았다. 식연의 공후 소리를 절대 압도하지 않으면서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흰색 봉황 한 쌍이 매우 빠른 속도로 구름을 가르고 나란히 날아올랐다가 동시에 머리를 돌려 바다 속으로 급강하하는 것 같았다. 음률을 논할 조예 따위 없는 죄수들이었지만, 피리와 공후 소리가 조화로우면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뒤엉켜 싸우는 듯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연의 공후 소리가 절정에 이르렀다. 더는 흰색 봉황처럼 아름답고 우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매 같았다. 피리 소리도 공후를 따라 가파르게 올라가며 조금도 뒤처지려 하지 않았다. 뇌벽성의 제자는 한 호흡이 극도로 길었다. 피리 소리는 호흡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가느다란 대나무 관은 소리를 그러모으지 못했다. 피리 소리는 속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한 마리 용 같았다. 공후의 36현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흠차 하나와 죄수 하나가 대체 무슨 광대놀음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피리와 공후 소리는 이미 비바람 소리를 압도했다. 모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렴풋이 어떤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랬다, 캄캄한 밤 꿈틀대는 검은 뱀과 같은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식연의 공후 소리가 한 차례 멎었다가 최고음을 쳤다. 동시에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백 년 남짓한 인생, 그 누가 의미 있는 죽음을 맞으려나

차라리 한잔 술에 취하리, 달빛 내린 아름다운 이곳에서

검을 뽑는 영웅은 보지 못하였으나, 우렁찬 철적 소리와 용의 포효를 들었노라

연지에 붉게 물든 눈물은 보지 못하였으나, 용의 선혈로 눈썹을 붉게 그리리.”

피리 소리가 끊기고 뇌벽성의 제자가 칼을 뽑았다. 칼빛은 새파랗고 칼몸은 곧았다. 날밑의 쇠구슬이 빠르게 진동하며 소름끼치는 날카로운 울림이 일었다. 손을 뻗어 등에 걸친 외투를 자 전신을 두른 철린갑이 드러났다. 흑철 조각들 위로 빙정(氷晶,) 무늬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풍호 철기의 갑옷을 만드는 철, 순국 특산품 냉단어린강이었다. 뇌벽성의 제자가 감옥 대문을 열더니 퍼붓는 폭우를 슬쩍 보고는 칼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식연의 공후 소리는 점점 우렁차졌다. 무장한 병사 10만 명이 진을 치고 군마 10만 마리가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장도 10만 자루가 칼집 속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뇌벽성의 제자가 홰 한 자루에 불을 붙였지만 어둠을 밝히기에는 부족한 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미한 검은 인영 여섯이 빗속에 서서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무기를 꽉 쥐어야 했기에 이들은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칼을 들고 한 사람은 중검을 들었다. 한 사람은 쌍수중추(雙手重錘)를, 다른 하나는 긴 창을 들었고 또 하나는 쇠사슬이 달린 아구(牙鉤)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전신에 갑주를 갖춰 입었다. 차가운 비가 투구에 떨어져 물보라가 튀었다. 물방울은 갑옷 솔기를 따라 흘러내리며 내의에 스며들었다. 이런 추위에 온몸이 흠뻑 젖으면 견디기가 매우 힘들 터였지만 이들은 땀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이 밤, 이들은 하나같이 땀을 흘렸다.

뇌벽성의 제자가 몇 걸음 나아갔다.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포위망도 함께 움직였다. 다들 뇌벽성의 제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횃불을 높이 들어 가장 가까운 거리의 적을 가까스로 비추어 보았다. 창을 든 이는 꽤 젊고 영민했는데 낯이 익었다.

“우림천군 도통, 사성. 황성에서 보았다.”

뇌벽성의 제자는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천구무사단, 사규. 그게 내 진짜 이름이다.”

긴 창을 든 청년이 말했다.

“네 진짜 이름은 알 필요 없다. 네놈들의 묘비를 세워줄 것도 아니니.”

뇌벽성의 제자가 담담히 말했다.

“내 진짜 이름을 말해준 이유는 곧 죽을 자에게는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규가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뇌벽성의 제자는 횃불을 공중에 내던지고 양손으로 칼자루를 꽉 움켜잡은 뒤 칼끝을 하늘로 향하며 오른쪽 가슴 앞으로 칼을 거두었다. 그는 석상처럼 조용했다. 횃불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빗물에 꺼졌고 한 점의 빛도 남지 않았다. 모두 암흑을 마주한 채 주르륵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규의 땀은 남들보다 더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는 이 상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았다. 뇌벽성의 제자는 절대 약할 리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이자가 상양관의 시무사처럼 망자를 부리는 비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아마 모든 정력을 칼에 쏟았을 것이었다. 사규는 상양관에서 백의와 식연이 어떻게 손을 잡고 시무사에게 중상을 입혔는지 알고 있었다. 이들 여섯 명이 힘을 합치면 소월과 묵우, 그들 둘에 비할 수 있을까? 사규는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이 두 점 일렁였다. 반딧불이 같은 연녹색 빛이 불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녹색 불빛이 차디찬 금속 위를 미끄러지고 쇠구슬이 급격하게 진동하며 스산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비바람을 갈랐다.

“효동(梟瞳)!”

사규도 들어보았다.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도 열을 내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비술이었다.

여섯 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누가 손뼉을 쳐서 명령을 하달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실제로 박수를 친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식연의 공후 소리였다. 그 순간 공후 소리가 그치면서 온 세상의 비바람 소리가 유난히도 또렷해졌다.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지면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선을 스쳐 지나갔다. 무기가 그 선을 끊어내며 치명적인 호를 그렸다. 천구와 진월의 최정예 무사가 교차하며 지나갔다. 무기는 부딪치지 않았다. 사규의 창끝이 향한 곳은 녹색 효동 사이, 뇌벽성 제자의 미간이었다. 그러나 사규의 창이 명중하기 전 효동은 꺼졌다. 뇌벽성의 제자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었다. 사규가 허탕임을 깨닫자마자 뜨거운 액체가 손에 튀었다. 동료 하나가 그 순간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생사를 건 격투 중에는 호흡 한 번 하는 순간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목표를 잃은 천구 무사들은 동시에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천구 무사들은 손발을 맞춰 2차 공격 시에는 사각지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는 축축한 공기 속에서 몇 차례 휙휙 무력한 울림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뇌벽성의 제자는 어둠속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았다. 천구 무사들은 즉시 서로를 등지고 방어에 나섰다. 격렬하게 뛰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사규는 긴 창의 중간을 잡았다. 익천첨에게 전수받은 ‘쌍라만단수진’으로 우인이 여러 대에 걸쳐 다듬어낸 전술이었다. 그는 방심했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머릿수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비오는 밤, 머릿수는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뇌벽성의 제자는 날밑의 쇠구슬 소리와 녹색 효동으로 그들을 홀렸다. 이들이 접근에 성공했다고 느끼면 쇠구슬 소리와 효동의 녹색 빛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사규는 그자가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구석 어딘가에서 올빼미처럼 자신들을 관찰하며 다음 공격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공격 방식이 무사가 아닌 자객처럼 은밀했다. 뇌벽성의 제자가 다시 나타나면 이들 중 누군가는 쓰러질 것이었다.

사규는 고개를 들지 않아 머리 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떠지는 가느다란 녹색 눈 한 쌍을 보지 못했다. 그 눈은 허공에 떠 있다가 칠흑 같은 하늘의 장막에서 틈이 벌어지면 박쥐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구를 든 천구 무사가 다급하게 경고했다. 효동이 떨어지기 직전 그는 거울처럼 반드르르한 무기에서 녹색 빛이 한 줄기 스치는 것을 보았다. 여섯 명은 불가사의하게 머리 위로 다가오는 공격을 거의 동시에 느꼈다. 다섯 명이 앞으로 달려 나가고 사규는 창을 들고 공격에 맞섰다. 사규의 창은 명중했지만, 적의 몸에 맞지는 않았다. 그의 홍창(紅槍)과 적의 패도가 공중에서 맞부딪치며 급박한 충격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쌍라만단수진’은 거의 허점이 없는 방어였다. 사규는 뇌벽성의 제자가 착지하기 전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사규는 그가 착지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한 발 늦고 말았다. 동료 무사들은 사규의 등 뒤에서 푸른빛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보았다.

사규는 동료의 비명에 적의 위치를 예감하고 힘껏 앞으로 내달렸다. 등 뒤에서 적의 칼이 윙윙대는 소리가 혼을 엮는 밧줄(索魂)처럼 따라왔다. 사규는 더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돌아 막기에도 늦었다. 사규는 이미 힘이 다 빠져 숨 돌릴 겨를도 없었다. 쇠구슬이 급격하게 진동했다. 적은 거침없이 제 위치를 드러냈다. 사냥감은 곧 죽을 것이니 사냥꾼도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규는 멈춰 서서 꼼짝 않고 등으로 칼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온몸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사규는 자신의 모험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승님께 듣기로 빠른 칼이 진짜로 몸을 가르면 죽어가는 사람은 그 순간 온 세상을 얼려버릴 정도의 냉기만 느낀다고 했다. 사규는 우림천군 외투 아래 중갑을 입었고 뇌벽성의 제자는 공격 전에 힘을 축적할 시간이 없었기에 정제된 갑옷을 가를 정도의 힘을 칼에 싣지 못한 것이다.

사규는 몸을 돌려 긴 창을 가로로 쓸었지만 또 다시 목표를 놓치고 말았다. 뇌벽성의 제자는 또 눈을 감고 이전처럼 완전히 어둠에 녹아들었다.

이번에야 운이 좋았다지만, 다음에 그자가 나타나면 누가 죽게 될까? 사규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돌연 긴 창을 내던지고 힘껏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지만,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능력이 없었다. 상대는 사규의 몸 앞으로부터 한 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규가 손뼉을 다 치기도 전에 단칼에 그의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다.

사규는 죽지 않았고 그의 박수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2척 길이의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종이 한 장이 타올랐다. 하지만 종이 한 장이 이렇게 환한 빛을 내뿜으며 타오르는 것은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소기름을 뿌린 횃불 같았다. 종이는 한 사람의 손바닥 위에 떠 있었다. 그자는 우산을 쓰고 멀지 않은 구석에 서 있었는데 우산을 드리워 얼굴 대부분을 가렸고 우산 챙 아래로 콧수염이 난 입만 드러나 있었다.

그자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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