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01화 (301/360)

301

1장. 여우의 분노 (5)

흠칫 놀란 식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형 당할 만하군. 그 정도 금액이면 자량가 절반은 살 수 있겠어.”

“장군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남회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식 장군이 이런 나락으로 떨어질 정도면 보통 작은 죄는 아니겠지요.”

늙은 죄수가 되물었다. 죄수들은 식연보다 갇힌 지 오래 되어 외부와 소식이 끊긴 터였다.

식연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사적으로 군대를 동원했다고 꼬투리를 잡혔지.”

“군대를 동원해요? 얼마나 동원했는데요?”

늙은 죄수가 계속 캐물었다.

“3~4만 명.”

식연은 늙은 죄인의 말투를 따라했다.

“참형 당할 만한 죄네요. 그 인원이면 나라 하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어요.”

늙은 죄인은 의기양양하게 복수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피차 곧 목이 베일 처지라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늙은 죄인이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운이 좋은 편 같습니다.”

“책형(磔刑)1)을 당하지 않아서 운이 좋다는 겐가?”

“아뇨, 어차피 가족도 없어 죽으면 그만이거든요. 연연할 게 없으니 그것도 운 아니겠습니까. 진즉 알았으면 200만 금수를 위조해줄 걸 그랬습니다. 그래도 목이 베이는 건 똑같을 거 아닙니까?”

“긍적적이군.”

식연이 웃었다.

“요즘 도처에서 전쟁이 나는 것을 보니 남회성의 평화도 얼마 못갈 것 같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누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장담하겠습니까? 법을 어겼든 어기지 않았든 날아오는 칼에 목이 떨어질 것을요. 이것이 난세이지요. 어쩔 수 없어 살고,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며 살아가는 것이 살길 찾는 개랑 비슷하지요. 저는 운이 좀 나빴을 뿐이에요.”

늙은 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말이 없던 식연은 잠자코 감옥 벽에 난 유일한 창문을 보았다. 창밖에는 차가운 비가 퍼부었고 밖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죠. 내 판세가 아주 좋거든요. 장군을 이길 겁니다. 어서 던지세요, 어서요.”

늙은 죄수가 연거푸 재촉했다.

식연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감옥 대문의 녹슨 쇠 축이 천천히 돌아가더니 문이 열렸다. 음습한 지면을 비추는 횃불 빛에 기다란 그림자 두 개가 비쳤다.

죄수들은 돌연 고요해졌다. 숨소리도 작아졌다. 죄수들은 자유시간이 따로 없었다. 대문은 음식물을 넣거나 누군가를 처형할 때만 열렸다. 쇠 축이 돌아가는 소리는 명을 재촉하는 소리 같았다. 다만 누가 죽을 차례인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깊은 밤이었다. 옥졸들도 당연히 기분 좋게 죄수들에게 먹거리를 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처형인가? 이런 열악한 날씨에 회자수가 사람을 베려고 할까?

‘사람 죽어나갈 날씨로구나!’

적잖은 이들이 속으로 이리 생각했다.

두 사람이 복도를 따라 앞으로 걸어왔다. 그중 한 사람은 옥졸이었다. 옥졸이 걸으면서 쇠몽둥이로 난간을 쳐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났다. 다른 한 사람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발소리도 고양이처럼 조용했다. 두 사람은 식연의 감옥 앞에 멈췄다. 식연은 익숙한 검은색 외투를 보았다. 쓰개로 얼굴을 가렸는데 외투 아래로 철갑옷이 어렴풋이 보였다. 가느다랗고 긴 칼을 한 자루 찼는데 날밑의 빈 부분에는 반짝이는 쇠구슬이 하나 들어 있었다.

뇌벽성의 제자 넷 중 한 사람이었다. 상양관 아래에서 제자 넷이 뇌벽성을 보호하며 천군만마의 포위를 뚫고 지나갔었다. 천지신명이 군을 지키듯 그들은 강대하고 과묵했다.

“나를 죽이러 온 흠차인가?”

식연은 그자를 다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7어사가 식 장군 사건에 이미 판결을 내렸다. 식 장군은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배신하고 반역을 저질렀으니 사형에 처하며 사면은 없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손에 든 문서를 펼쳐 철창 한쪽에 있는 식연에게 건넸다.

문서를 받아든 식연은 슥 훑어보고는 옆에 던졌다.

“됐다. 네 말을 믿는다. 이미 너희가 황실을 장악한 지금, 이런 판결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하나 써내고 황제의 국새를 찍는 건 일도 아니겠지.”

검은 옷을 입은 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인한 셈이었다.

“넌 내 형을 죽였지만 난 널 원망하지 않는다.”

잠시 말이 없던 그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식연은 눈썹을 치키고 재차 그자를 다시 훑어보았다.

“상양관의 그 시무사가 네 형이냐? 형제가 많이 다르군.”

“나는 형에 못 미친다. 형은 제자들 중에서 스승님께 제일 인정받던 제자였다.”

“날 원망하지 않는다고? 왜지?”

“너와 내 형이 똑같기 때문이다. 둘 다 신의 제단에 오른 제물이지.”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담담히 말했다.

식연은 잠시 말이 없다가 비싯 웃었다.

“실력은 좀 모자라도 말은 합리적으로 하는군. 네 형보다 머리는 훨씬 잘 돌아가네. 쓸데없는 소리는 관두고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36현 공후 하나와 술 한 병, 안주 조금, 피리를 불 줄 아는 여인 한 명을 부탁한다. 내가 공후를 연주하는 동안 피리로 반주를 맞출 수 있는 여인 말이야.”

“자량가에 가서 식 장군에게 줄 술 한 병과 안주를 사와라. 최상품으로 사오도록 해. 사용한 적 있는 오래된 36현 공후도 가져오고.”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옥졸에게 명령했다.

옥졸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보고 내키지 않았지만 황성에서 온 흠차에게 토를 달수는 없었다. 어쩐지 지난번에 온 흠차보다도 훨씬 모시기가 까다로웠다. 옥졸은 방수포 우비를 걸치고는 이를 악물고 문 밖으로 나갔다.

식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한 공후가 좋지. 금을 아는 자로군. 공후는 백옥 같아서 다듬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 근데 피리 불 줄 아는 여인은?”

“폭우가 쏟아져 지금 찾아서 데려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제 옷소매 안에서 갈색 단적(短笛) 하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나도 피리를 불 수 있다.”

“좋군!”

식연이 웃으며 말했다.

“진월이 피리를 불고 천구가 금을 연주한다니. 전쟁에 나가 검을 뽑아들고 생사를 다투는 것 같군.”

“장군, 곧 죽습니다요.”

이야기를 듣던 죄인은 눈앞의 아직 끝내지 못한 쌍륙 말판을 보며 그동안 감옥 동기인 식연과 벽을 사이에 두고 놀이를 하며 나눈 우정이 떠올랐다. 문득 죄인은 제 처지를 보는 듯해 소매로 눈시울을 훔쳤다.

“누구나 죽네.”

식연이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허리는 굽히지 말아야지.”

식연은 뒷짐을 지고 감옥 안을 거닐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는 철창 밖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쓰개 아래로 철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표정이랄 것도 없었다. 죄수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난간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동륙에 이름을 떨친 영웅이 어떻게 죽어갈지를 가만히 기다렸다. 이미 감옥 동기들을 많이 떠나보낸 이들이었다. 밖의 비는 더욱 거세졌다. 바람과 빗소리 속에서 식연의 걸음은 분명하고도 편안했다.

식연이 감옥 안을 40바퀴쯤 돌았을 때 옥졸이 돌아왔다. 방수 우의가 별 도움이 못 되어 옥졸은 전신이 흠뻑 젖었다. 옥졸은 남회 사투리로 상소리를 퍼부으며 검은 옷을 입은 자 앞에 사온 물건 한 무더기를 놓았다. 검은 옷을 입은 자는 싸늘하게 옥졸을 쳐다보고는 칼집으로 물건들을 헤쳐보았다. 하나하나 살펴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졸은 철문을 열지도 않고 철창 사이로 하나하나 건넸다.

식연은 술병을 따고 향을 맡아보더니 기름종이를 뒤적였다. 장미 땅콩, 매실 정과, 절임 앵두 같은 과실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술은 오래 묵은 술인데 과일은 전부 단 것뿐이니 어찌 술맛이 돋겠나? 술맛 돋우기에 좋은 안주는 비계가 적당한 돼지 머릿고기, 바삭하게 튀긴 오리 껍질, 절인 족발 몇 점, 튀긴 후에 가는 소금을 살짝 뿌린 땅콩일세. 사온 것들을 보니 술을 안 마시는 자로군.”

잔뜩 치민 울화를 풀 곳이 없었던 옥졸이 막 눈을 부릅뜨는데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안주가 별로면 다시 사오면 되지.”

그가 나직이 명령했다.

“식 장군이 말한 대로 돼지 머릿고기와 오리 껍질, 절인 족발과 짭짤한 땅콩을 사와라.”

“됐네.”

식연이 손을 내둘렀다.

“곧 죽을 사람이 술안주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비웃음만 사겠지……. 좋은 공후로군!”

식연이 낡은 공후를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평범한 양식에 달리 명문(銘文)도 없는 것을 보면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거리에서 파는 똑같은 종류의 새 공후도 금수 몇 냥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공후는 수십 년은 된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이 만졌는지 표면에 칠이 벗겨진 곳이 아주 많았지만 진갈색 호박(琥珀)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식연은 세심하게 현을 조율했다.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어느 나이든 악사가 사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좋은 나무로군.”

식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 공후의 주인은 이미 죽었고 그 후손이 멋모르고 꺼내다 판 것이겠지? 금을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오래된 공후를 버릴 수 있겠나?”

옥졸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공후는 비를 무릅쓰고 늙은 악사의 집에 찾아가 싼값에 사온 것이었다. 그 악사는 예전에 길거리 이야기꾼이었다. 장미 황제에 관한 오랜 이야기들을 해주고 푼돈을 벌며 매우 궁상맞게 살다가 지난달에 막 죽었다. 악사의 아들은 공후를 남겨둬 봤자 쓸모가 없었기에 금수 한 냥에 옥졸에게 팔아버렸다.

식연의 손끝이 현을 퉁겼다. 맑고 서늘한 우음(羽音)2)에 밖의 빗소리가 더욱 도드라지며 불현 듯 적막감이 넘쳐흘렀다. 식연의 표정도 변했다. 더는 웃지 않았고 쓸쓸히 창밖의 어둠으로 시선을 옮겨 창턱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다. 별안간 식연은 살짝 늙은 듯 보였다. 이제야 진짜 서른 넘은 사람처럼 보였다.

“당신 같은 사람은 원래 떠도는 넋처럼 유랑해야 하는데 어쩌다 실수로 이 새장에 들어온 것이라 했었지.”

식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손 가는 대로 조율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실수로 새장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하게 된 새가 아니겠소…….”

* * *

1) 기둥에 묶어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

2) 동양 음악의 오음 중 하나로 피타고라스 음률의 ‘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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