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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여우의 분노 (3)
윤 성제 5년 12월 열하루. 진북국 북쪽 바닷가 인근의 북고산성.
북고산성은 항구이자 설성(雪城)이었다. 매년 란주의 첫눈이 이곳에 내렸다. 북고산성의 북쪽은 청주와 란주의 우연해협으로 나뉘었다. 먼 바다에서 흘러들어온 한류(寒流)가 밤낮으로 이곳을 지나 드넓은 유해(濰海)로 흘러들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비구름에 이곳은 일 년 내내 어두침침했고 햇빛은 황금처럼 귀했다. 그러나 안 좋은 날씨는 멀리 외진 곳에 위치한 이 작은 성을 지켜주기도 했다. 이곳으로부터 북쪽 120리가 바로 우족의 청주 땅이었다. 우족은 그곳에 ‘각인성(刻印城)’이라는 견고한 요새를 지었다. 우연해협에서 가장 좁은 지점은 천척해협보다도 좁았다. 동륙 왕조의 변경(邊境)은 수천 년 동안 이 두 해협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우연해협은 천척해협보다도 더 조용했다. 더 좁음에도 불구하고 차디찬 해류는 멈추지 않고 빠르게 흘러갔다. 우인의 목란장선만이 이 일대의 해수면을 항해할 수 있었는데 목란장선에 바람을 다루는 우인의 능력이 더해져도 우연해협을 건너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었다. 배는 언제든 해류가 일으킨 소용돌이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면 폭풍우를 만나 근처 절벽에 부딪쳐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한 무더기의 나뭇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동륙인은 이 해협을 신이 동륙을 보호하기 위해 쪼개어 만든 것이라 했다. 우인들은 이곳을 천연(天淵)1)처럼 뛰어넘을 수 없다 하여 우연해협이라 이름했다.
그럼에도 수비는 느슨하지 않았다. 대윤을 개국한 백윤은 백작 하나를 북고산성에 분봉하고 북고산백이라 불렀다. 이 무사 가문은 대대로 북고산성을 지켰는데 진후 뇌천엽의 관할 아래에 있으나 이곳 항구 도시의 세금을 걷는 특권을 가졌다. 이 작은 성은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수백 리가 전부 파도가 세차게 치는 바다를 마주한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파도가 낭떠러지 아래에 부딪치며 수십 척 높이의 물보라를 일으켜서 정박할 수 있는 배가 없었다. 북고산성은 이러한 낭떠러지 지형의 빈틈에 자리했다. 이곳은 천혜의 항구였다. 양쪽으로 쭉 뻗어나가는 곶 가운데는 물이 잔잔해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한때 백윤은 이 도시의 높은 곳에 올라 오랫동안 바라본 후 이렇게 말했다. 훗날 우인의 공격은 반드시 이곳에서 시작될 거라고. 그래서 백윤은 북고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화정(火鼎)을 설치했다. 화정에 불이 지펴지면 우인이 이미 북고산성을 함락했다는 뜻이었다. 장장 600리에 달하는 봉화가 진북 추엽산성까지 이어지면 진후는 바로 황성에 사태를 알림과 동시에 전 군대를 일으켜 반격할 것이었다.
고월의가 출운기군 2천500명을 이끌고 북고산성에 서둘러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린 후라 날씨가 흐렸다. 이번 대(代) 북고산백이 쩔쩔 매며 성문 앞에서 기다렸다. 멀리서 하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궁기병 대대가 진흙탕을 밟으며 빠르게 질주해왔다. 젊은 무사들은 하나같이 경장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허리칼 하나도 없이 각궁 한 자루만을 들었다. 앞장선 무사는 스물 남짓해 보였고 검은색 칼집에 든 장도를 한 자루 찼다. 황금으로 장식된 것이 장관이 사용하는 무기 같았다.
궁기병들이 신속하게 성문 앞에 대오를 지었다. 앞장 선 무사가 진후의 친필 서신을 건넸다.
“출운기군 고월의 장군이오?”
북고산백은 추엽산성에서 온 진후의 사자가 이렇게나 젊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진북국 출운기군 부도통(副都統) 고월의가 북고산백을 뵙습니다.”
말에서 뛰어내린 고월의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이리 젊고 유능한 장군인 줄은 몰랐구려. 귀한 손님들이 외진 북고산성에 와주니 참으로 황공하외다. 진후의 서신을 받고 황급히 수하에게 지시해 장군의 수하들이 머물 민가를 마련해두었소. 장군도 알겠지만 북고산성은 인구가 몇 만이 안 되는지라 단시간에 수천 명의 막사를 만들기는 어렵다오.”
북고산백은 손을 맞비비며 비위를 맞추듯 웃고는 에둘러 물었다.
“평소 진후께서 국방을 시찰하러 사람을 보내실 때는 수십 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평상시가 아닙니다.”
고월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이오. 진후 대인께서 계획하신 바가 있겠지.”
북고산백은 토를 달지 못했다.
“장군은 부하가 많고 우린 수천 명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기가 실로 어려운지라 음식물과 차 정도밖에 준비하지 못했소. 장군을 위해서는 누추한 내 집에 따로 해산물을 한 상 봐두었소. 이 지역에 달리 나는 건 없어도 물고기 하나는 란주 최고라오. 잡히는 것은 다 깊은 바다에서 나는 대어지. 내가 지난번에 바다에 나가 잡아온 용왕화반기(龍王花斑鰭)는 크기가 이만하다오…….”
북고산백은 두 팔을 펼치며 손으로 2척 길이의 진귀한 바닷물고기를 만들어 보였다. 유혹하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이 어시장에서 제집 물고기를 사라고 호객하는 장사꾼 같았다. 고월의는 그런 북고산백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설핏 웃었다. 700년 동안 동륙과 우족 사이에는 어떤 전쟁도 벌어지지 않았다. 백작 가문의 후손이 견고한 갑옷도 꿰뚫는 우인의 날카로운 화살을 잊어버리고 평범한 시골 귀족으로 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평온한 날들이었다.
“북고산백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리 큰 용왕화반기는 꼭 맛보겠습니다. 다만 이번 방문의 주목적은 우족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함이며 진후께서도 이 일에 매우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해안을 살펴볼 수 있도록 데려가주시겠습니까?”
고월의의 말에 북고산백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살짝 얕보는 기색을 띠었다. 고월의가 북고산성에 온 이유를 알게 된 그는 순간 속으로 안도했다. 지난달 추엽산성에 보낸 물고기가 신선하지 않아서 그 죄를 물으려 진후가 군을 보낸 줄 알았다. 지난달에는 조수가 너무 거센 탓에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지 못했고 북고산백도 어쩔 수 없어 죽은 물고기를 몰래 얼음에 묻어 수를 채웠던 것이다.
“고 장군, 그건 걱정 마시오.”
북고산백은 국방 얘기가 나오자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이 성은 반석처럼 견고하며 성 밖의 우연해협은 천연 요새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곳을 지켜왔지. 매일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며 이 항구를 눈에 담은 터라 이곳 지형은 손금 보듯 훤하다오. 우인이 감히 이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해류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며 나 또한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오.”
“그러하다면야 제일 좋겠지요. 저도 안심할 수 있도록 데려가 보여주십시오.”
고월의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좋소. 진북의 명장 고 장군이 우리 북고산성 같은 작은 지역에 행차하였으니 바다부터 보고 식사를 하는 것이 순리겠지.”
북고산백은 친절하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가십시다.”
북고산성의 가운데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엄한 보루 하나가 도시 전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처음 백윤이 이 보루를 지으라 명령했을 때 부근에는 거주하는 어부가 없었고 보루 안에는 해전(海戰)에 능하고 활을 지닌 정예 무사들만 있었다. 당시 이 보루가 곧 북고산성이었다. 보루는 말없는 거인처럼 북방의 풍설을 맞으며 만 앞에 외로이 우뚝 서 있었다.
보루 제일 높은 곳에 오른 고월의는 먼저 수천 근에 달하는 청동 정(鼎)을 살펴보았다. 이 정은 백윤의 지시에 따라 추엽산성에서 재료를 구해 단조하고 느린 말 40필에 실어 북고산성으로 운송한 뒤 이곳에 안치하고 700년간 옮기지 않았다. 정 안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등유에 흠뻑 적신 숯이 들어 있었다. 이 숯은 연소할 때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뭉게뭉게 짙은 연기를 피워내 몇 리 밖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커다란 정은 고월의의 키보다 3척은 더 높아서 사다리를 타야 올라갈 수 있었다. 안을 보니 야트막하게 물이 잠겨 있고 등유에 적신 숯이 그 속에 쌓여 있었다.
“요 며칠 비가 왔소.”
북고산백이 허허 웃으며 설명했다.
“물이 좀 고였는데 군사들이 물 빼는 마개를 깜빡한 모양이오. 그래도 괜찮소. 등유에 흠뻑 젖어서 물이 좀 있어도 불은 붙는다오. 오히려 불이 붙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 오보를 전하면 큰일이니까.”
고월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고산백이 정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골동품이오. 순(純) 청동에 수천 근이나 나가서 성인 남성 여남은 명으로도 들 수가 없소. 고 장군, 여기 보시오. 이 위에 장미 황제의 시도 있다오…….”
고월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사다리에서 내려와 1리 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도 없고 파도도 잔잔한 날이었다. 드넓은 해수면 위로 오가는 어선들이 무척 분주해보였다. 며칠 후면 가까운 바다는 얼어붙을 것이었다. 살얼음 정도일 뿐이나 사람이 다닐 수 없으니 어선도 바다에 나갈 수 없었다. 어부들은 이 마지막 기회에 새해를 지낼 수산물을 마련해두어야 했다.
“이쪽 바다는 자원이 풍부하오. 진북국에서 생산되는 물고기의 절반이 이곳에 나는 터라 가난한 지역은 아니지. 다만 너무 외져서 타향 여인들이 시집오려 하지 않아 이곳 젊은이들은 늘 밖으로 나가려 한다오.”
북고산백은 농사꾼이 제 논밭을 바라보듯 바다를 바라보며 개탄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진후께 출사하여 위풍당당한 무사가 될까도 생각했었소. 당시의 나는 고 장군 같은 출중한 인물을 가장 우러러봤었지. 하지만 지금은 늙어서 이 바다를 떠날 수 없게 됐소. 하룻밤이라도 어탕을 마시지 않으면 속이 근질근질하거든. 사실 젊었을 적 나는 50근짜리 활도 당기지 못했다오. 한데 무슨 출사를 하겠소? 고생을 자초하는 게지. 저마다 주어진 인생이 다른 법, 내 이번 생은 어부구려.”
고월의는 그 얘기에 빙그레 웃었다.
“북고산백 일가는 대대로 군인 가문이 아닙니까. 천계성의 폐하도 대인께서 자신을 위해 북쪽의 우연해협을 지킨다고 생각하실 텐데요.”
“에이!”
북고산백이 손을 내둘렀다.
“이 작은 도시가 엄청 중요한 것처럼 말하는구려. 아우, 이 성은 사실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라 우인이 공격 자체를 할 수가 없다오!”
북고산백은 고월의가 진후의 특사 같지 않게 상당히 서글서글하자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아우’라고 불러버렸다.
“어째서 그러한지요?”
고월의는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듯 공손하게 물었다.
북고산백은 위신이 서는 듯한 기분에 어탕으로 가득 찬 배를 쑥 내밀며 말했다.
“이 항구에 들어오려면 우선 우연해협을 건너야 하오. 우연해협의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해류가 얼마나 빠른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 거요. 우인이 바다를 건넌다고 해도 항구 입구에 등유를 뿌린 장작을 가득 채운 어선 10척을 놓아 막아두었다가 우인이 접근해오면 불을 붙이면 된다오. 큰 배가 바람을 타고 나아가면서 바람에 불길이 더 거세어져 화르륵 타오르게 되지. 불 공격이 효과가 없어도 괜찮소. 이쪽 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고 지하에 파랑추(破浪錐) 200개가 묻혀 있소. 장미 황제 때 묻어둔 것이지. 하락 장인에게 부탁해 만든 것인데 수정정(水晶精)이라는 쇠로 만들어서 수백 년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다오. 현지 사람들만 파랑추의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항행할 때 피해서 가지. 우인의 배는 가볍고 바닥이 두껍지 않아 부딪치면 바로 가라앉는다오. 파랑추로 적들을 바다 밑에 가라앉히지 못해도 우인 역시 해안에 올라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일단 해안에 오르면 물속에서의 능력은 별 소용이 없지. 이곳의 성벽은 높고 두터운 데다가 우리가 노를 일제히 발사할 테니까, 히히!”
* * *
1) 하늘과 깊은 못처럼 현격한 차이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