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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여우의 분노 (2)
뇌벽성이 담담히 말하며 손을 내둘렀다.
“그러니 어사 대인들도 식연의 사건을 다시 잘 살펴보라 하시오.”
난대령은 뇌벽성의 물러가라는 손짓에 대사면을 받은 사형수처럼 장공주에게 황급히 인사를 올리고 허둥지둥 계궁을 빠져나갔다. 계궁 담 밖의 햇살 아래 이르러서야 난대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와 내의가 흠뻑 젖었다.
오늘 난대령이 두려웠던 이는 장공주가 아니었다. 장공주의 음산함과 욱하는 성질은 익숙했다. 그러나 뇌벽성이 천천히 눈을 뜨는 순간 난대령은 놀라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뇌벽성의 담담한 눈빛 속에서 어떤 음산하고 차가운 혼백이 난대령의 몸으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계궁 안, 뇌벽성이 입을 열었다.
“장공주, 고정하십시오. 어사들도 멍청하지 않습니다. 저들도 장공주의 뜻은 알지만 다른 이에게 협박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영무예의 수하 중에 사현이란 자가 있습니다. 리국 삼철구 중 제일가는 인물이고 권모술수에 매우 능하지요. 영무예가 천계를 점거한 동안 사현이 나서서 상당수의 황성 고관들을 매수하면서 그들의 부정행위에 대한 증거도 수집해 약점으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7어사의 의견이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제 짐작이 맞는다면 사현이 몰래 협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공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영무예가 식연을 구하려 한단 겁니까? 영무예가 왜 식연을 구하려 하지요?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가 아닙니까.”
“적과 맹우는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지요. 저도 한때는 영무예의 수하였으나 이제는 장공주를 위해 영무예의 머리도 취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식연은 시종일관 영무예를 진짜 원수로 보지 않았습니다. 식연이 막지 않았다면 백의는 상양관에서 영무예를 쏘아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뇌벽성이 담담히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장공주는 깜짝 놀랐다.
“확실합니다. 제가 리국 군대에 잠입시켜 둔 제자에게 들은 소식입니다. 식연은 영무예를 죽일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백의 역시 망설였다 합니다. 두 사람은 제후국에 출사한 무사로 황실의 대권을 장악한 장공주께 대놓고 반항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영무예는 남만의 수사자로 장공주의 최대 적이지요. 영무예가 살아있는 한 제후들을 굴복시키려는 장공주의 계획은 실현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뇌벽성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백의와 식연의 눈에 최대의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황실입니다!”
“황실?”
장공주는 소름이 쫙 끼쳤다.
“백의와 식연이 일찌감치 불충한 마음을 먹고 병권을 이용해 제후국에서 군림하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황실에 공격의 창끝을 겨눌 셈이랍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다더이까?”
“백의는 어전월장군이면서도 10년간 단 한 번도 천계에 들어 폐하를 알현하지 않았습니다. 백의에게 황실은 그저 상징일 뿐이며 초위국이야말로 그가 충성을 다하는 국가이지요. 황실은 제후국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리국이 우선이고 그 다음 차례는 초위국이지요. 백의는 초위국 영토가 왕역에 편입되는 것을 절대 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식연은 현재 동륙 천구의 우두머리입니다. 풍염 황제 이래 천구는 거의 씨가 말랐고, 이는 모두 황실의 지시였지요. 그러니 식연이 황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의와 식연은 무사입니다. 황실이 두 사람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부흥하게 되면 저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폭도가 될 것입니다!”
장공주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벽성 선생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드는군요! 그리 생각하니 역적 식연은 절대 살려둬서는 안 되겠습니다!”
“영명하십니다. 가장 엄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사대에 봄을 기다릴 것 없이 즉시 단죄하고 형을 집행하라 하십시오.”
뇌벽성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연은 무시무시한 여우입니다. 하루라도 더 살려두면 그만큼 위험해집니다!”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성 선생의 뜻에 따르지요! 녕경, 오후에 직접 어사대에 다녀와라. 사흘 내에 죄를 언도한 문서를 남회성으로 보내고 백리경홍에게 즉시 집행하라 해! 열흘 내로 식연이 죽지 않는다면…… 어사대는 뒷일을 책임져야 할 것이야!”
“명을 받들겠나이다!”
녕경이 숙연하게 예를 올렸다.
“그럼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폐하께서 오후에 부르셔서요. 내일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뇌벽성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한쪽 구석에 있던 검은 복장을 한 제자도 일어섰다. 제자는 내내 그곳에서 장도를 짚고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난대령은 이 궁에 들었을 때 한쪽 구석의 그늘진 곳에 이런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멀리서 보면 그냥 무릎을 꿇은 무사 인형 같았다.
“벽성 선생, 내게 졌는데 상으로 무엇을 바칠 겁니까?”
장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모든 부를 가진 이에게는 천하만이 상이 될 수 있겠지요?”
뇌벽성도 웃으며 말을 건네고는 뒤돌아 문을 나섰다. 검은 옷을 입은 제자가 뇌벽성의 걸음을 쫓았다. 검은 옷 아래로 철갑이 찰그랑찰그랑 울렸다.
철갑 소리가 멀리 사라지고서야 녕경은 뒤돌아 장공주를 마주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고했다.
“장공주,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될는지요.”
“말해라. 못할 말이 뭐 있어? 고분고분 말만 잘 들으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즐거이 들을 것이다.”
장공주가 녕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벽성 선생의 계획은 만족과 우족이 각각 순국과 진북국으로 진군할 것이니 양국의 병력이 막아낼 수 없을 때에 이르면 우리가 금오위와 우림천군을 지원군으로 보내 양국을 탈환하고 제후국의 영토를 왕역에 포함시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순국과 진북국의 병력에 황실의 2만 경기병과 4만 중노병이 침략한 적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전부를 잃게 되고 만족 철기병과 우족 궁수들이 천계성 아래까지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남쪽의 천남삼국1)이 연합해 상양관을 봉쇄해야만 만족과 우족을 막고 자국 영토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녕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왕역은 외적에 의해 쑥대밭이 될 것이며…… 대윤은…… 멸망할 것입니다!”
“맞다, 다 맞는 말이다.”
장공주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녕경, 너는 벽성 선생을 진정으로 믿은 적이 없지, 안 그러냐?”
녕경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이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 나도 벽성 선생이 왜 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구나. 하지만 어쩌면 세상에는 그와 같은 반신반인의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범인의 지혜로 그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것은 주제넘게 이 세상의 지고한 예법을 어기는 일일 수도 있다.”
장공주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벽성 선생을 믿는다. 그런 자는 속세의 부와 권력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는 신의 뜻을 대변하며 신의 뜻에 거역할 수 없지. 녕경, 그간 내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너는 모른다. 네가 볼 수 있었다면 분명 네 일처럼 기뻐해 주었을 것이다. 이리 와 내 얼굴을 만져보아라.”
녕경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불현듯 한동안 장공주가 시침을 들라 하지 않아서 그녀의 피부를 만져볼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불혹의 이 여인은 새로운 정부(情夫)를 둔 것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남자를 침실에 불러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 녕경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채고 느릿느릿 손을 내밀었다. 장공주가 녕경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옥이나 비단을 만진 듯한 감촉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하지만 옥은 이렇게 따스하지 않으며 비단도 이렇게 탄력적이지 않았다. 피부에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듯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 최고의 보물을 만진 듯한 느낌이었다.
“장공주,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녕경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녕경의 손이 닿은 얼굴은 주름이 가득 지고 까칠한 장공주의 얼굴일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매번 시침을 든 후에는 항상 수건에 과채즙을 묻혀 장공주의 얼굴을 살며시 닦았더랬다. 그러나 장공주는 늙었고 마흔 살의 여인은 절대 스무 살의 피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짙은 화장과 본연의 노화는 바람에 돌이 깎여 나가듯 장공주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주름을 남겼다. 그러나 얼굴의 윤곽과 익숙한 냄새는 틀림없는 장공주 본인이었다.
녕경은 스무 살 장공주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세월이 거꾸로 흐른 듯했다.
“금세 열여섯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열여섯은 내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지. 열여섯의 백릉파…… 어느 고관대작의 안식구도 당시의 백릉파에게는 견줄 수 없었다.”
장공주는 녕경의 손을 천천히 제 뺨에서 입으로 옮겨 그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잠꼬대를 하듯 말했다.
“녕경,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더는 벽성 선생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 세월을 되돌리는 것은 신의 사자나 지닐 수 있는 술법이 아니겠느냐! 또한 구주 안에서 어느 누가 신에게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겠느냐?”
녕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공주의 곁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장공주는 녕경의 머리를 제 품에 감싸 안고 살며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바보 같은 녀석, 어찌 말이 없느냐? 너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곧 열여섯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열여섯 살의 백릉파는 구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그런 나와 네가 함께 선다면 선경(仙境)으로 날아오를 한 쌍의 신선 같을 것이야. 내 벽성 선생에게 네 눈을 치료해 달라 청하마. 눈을 뜬 네가 내 모습을 본다면 분명 기쁠 게다.”
드넓은 궁전 안,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스며들어 장공주의 옥처럼 깨끗하고 아기처럼 보들보들한 얼굴에 비쳤다. 피부 아래로 부드러운 혈색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장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늙은 여인의 포악함은 보이지 않는, 동경과 꿈을 품은 스무 살 여인의 미소였다. 장공주의 눈동자는 가을 호수의 잔물결이 퍼져 나가듯 맑고 투명했다.
계궁 정문 앞까지 걸어간 뇌벽성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검은 옷을 입은 제자를 돌아보았다.
“당장 남회로 출발해라. 전서구로 7어사가 연서한 판결문을 보내줄 터이니 그 문서를 받자마자 백리경홍을 찾아가도록 해. 그리고 네가 직접 식연을 죽여라. 시간은 나흘 후 밤이다. 일각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녕경 공자의 회신은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까?”
제자가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 천계성에 매복해 있는 천구의 세력을 얕봐서는 안 돼. 어사대가 판결문을 내보내면 그들은 즉시 알게 될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식연을 구하려 할 것이다. 흠차가 판결문을 가지고 빠른 말로 남회에 도착한다고 해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가짜 판결문을 한 통 가지고 가라. 진짜 판결문은 식연을 처결한 후에 도착할 것인데, 사흘에서 닷새 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자가 뒤돌아 떠나려 했다.
“식연이 남회성에 매복해둔 이들과 맞서게 될 수도 있으나 너도 나를 따른 지 12년이니 천구 몇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절대 조심해라.”
뇌벽성이 제자의 등에 대고 말했다.
“네 형의 복수를 해라. 봐줄 것 없다.”
* * *
1) 초위국, 하당국, 리국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