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93화 (29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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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5)

목려가 고개를 돌려 투룡골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이럇!”

투골룡이 길게 울부짖으며 내달렸다. 불화랄은 설망의 말고삐를 꽉 붙잡고 고개를 돌려 점점 작아지는 목려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인간 벽을 만든다! 목려의 무사라면 한 발짝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 물러나는 자는 내 직접 목을 벨 것이다!”

목려가 옷자락으로 아도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우리는 여기서 삭북인의 발을 묶는다. 안 그러면 저들은 북도성 아래까지 추격할 것이고 기병들이 집결하기도 전에 성으로 비집고 들어갈 것이다. 이는 늑대왕이 일거에 성문을 장악할 수 있는, 그가 가장 고대하는 기회이다.”

패알륵 무사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기병들이 부교에 올랐다. 태납륵강 서쪽 기슭에는 노예 무사들만 남았다. 그러나 목려는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겨우 남은 천여 명이 삭북의 수만 명을 상대해야 했다. 살아 돌아갈 기회는 없었다.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노예들은 고개를 숙인 채 사슴 가죽으로 감싼 제 발만 보았다.

“장군, 여기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귀족들도 도망쳤는데 왜 우리가 여기 남아야 합니까?”

노예 무사 한 명이 침묵을 깨뜨렸다.

“네 어머니의 이름이 무어냐.”

목려의 질문에 노예 무사는 멍해졌다.

“네 어머니의 이름을 말해봐!”

목려가 나직이 호통쳤다.

“기기격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이로구나. 아직 살아 계시냐? 아직 노예이신가? 어느 귀족의 장막에 있느냐?”

목려의 목소리는 잔뜩 쉬었지만 다정했다.

“알적근 가문의 장막에서 유모로 계십니다. 최근에 아우를 한 명 낳으셨습니다.”

목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키워낸 자제병들을 훑어보았다.

“나는 너희들을 내 형제라 생각한다. 나의 노예 형제들이여, 왜 목려의 군대에 들어왔느냐? 단지 네게 영광을 가져다 줄 것 같아서? 아니면 그 귀족들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그들의 개가 되고 그들 대신 사냥하고 그들을 위해 전사하면서 그들의 고귀한 신분제도에 네 피를 바치기 위해서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돌아선 목려는 앞에 나와 말을 꺼낸 노예 무사를 보며 물었다.

“네 어머니는 네가 공을 세워 자유를 찾아주기를 무척 기대하고 계시겠지? 어머니는 네가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노예 무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너는 어머니에게 자유를 줄 수 없다, 나의 형제여. 하지만 최소한 어머니가 계속 살아가시게 할 수는 있다! 삭북의 늑대 기병이 북도에 쳐들어가면 네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은 능욕과 죽음뿐이다. 네 어머니의 가죽은 벗겨져 방패에 덮일 것이고 머리카락은 잘려나가 밧줄로 엮일 것이다. 시체는 늑대 먹이로 던져지겠지. 나의 형제여, 살아서 그 모습을 보고 싶으냐?”

노예 무사는 흠칫하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저마다 전장에 뛰어든 이유가 있겠지.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저 성을 보아라.”

목려가 뒤돌아 눈보라 속 보이지 않는 커다란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위해 칼을 들었든 저 성을 지켜내야 한다!”

“어머니가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예 무사는 나직이 말을 하고는 대오로 돌아갔다.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더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인간 벽을 만든다. 기병대가 모두 강을 건너면 부교를 자른다.”

목려가 명령했다.

“기병대가 모두 강을 건너면 부교를 자른다.”

패알륵 한 명이 목려의 명령을 반복했다.

천여 명이 묵묵히 흩어져 칼을 뽑았다. 이들은 삭북 대군 수만 명 앞에서 몹시도 작고 약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가슴을 꼿꼿하게 폈다. 겨우 소가죽을 덧댄 가슴으로 눈보라에, 그리고 설령가 군마의 쇠발굽과 흰 늑대의 발톱에 맞섰다.

“형제들이여, 나는 늙은 노예일 뿐, 너희에게 상으로 줄만한 것도 없다. 내 전부를 너희에게 주마. 나는 동쪽 기슭으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너희들과 나란히 서 있겠다.”

목려가 모두의 앞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아소륵은 태납륵강 동쪽 기슭에 말을 세웠다. 눈앞에 적홍색 강물이 천천히 흘러갔다. 아소륵의 등 뒤로 수만 구의 시체가 눈보라에 파묻혀 갔다. 요행히 살아남은 청양 무사들이 바람처럼 아소륵의 곁을 지나 북도성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아무도 이 말없는 청년을 알아보지 못했다. 청양 무사의 용기는 늑대 떼에 깡그리 무너졌다. 그들의 머릿속엔 ‘목숨 부지’ 네 글자뿐이었다. 아소륵은 알았다. 청양부가 패했음을.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기가 이미 무너졌다. 지금 삭북인들이 쫓아온다면 밀을 수확하듯 가볍게 청양 무사들의 목숨을 거둬갈 것이다.

아소륵은 늦게 왔지만 이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전장을 목도하고 말았다. 사실 조금 일찍 도착했어도 소용은 없었다. 이 패배를 만회할 능력이 아소륵에게는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말 한 필과 칼 한 자루를 가진 한 사람에 불과했다. 천군만마가 있는 전장에서 아소륵은 보잘것없는 아이였다.

눈보라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천여 명의 패알륵 무사 인영이 또렷이 보였다가 또 흐릿해졌다. 부교 옆을 지키던 패알륵 무사들은 마지막 기병대가 부교를 질주해 지나가자 칼을 휘둘러 껍질을 벗긴 소나무를 묶고 있던 밧줄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아소륵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가 망연자실한 사이, 흩어진 부교는 낱개의 널찍한 소나무 판 더미가 되어 물을 따라 흘러갔다. 패알륵 무사들은 고개를 돌려 그들의 대오를 보고는 동료들과 나란히 섰다. 아소륵은 그제야 저들이 후퇴할 생각이 없음을 알았다. 강 서쪽 기슭, 눈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삭북인의 복수가 곧 시작될 것이었다.

아소륵은 패알륵 부대 맨 앞에 선 노인을 발견했다. 익숙한 뒷모습의 노인은 칼 한 자루를 가로들고 고개를 쳐든 채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노인은 고목(古木)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소륵은 그 뒷모습을 기억했다. 당시 목려는 해질 무렵에 아소륵이 칼을 연마하는 모습을 보러 왔지만, 결국엔 항상 비웃듯 코웃음을 쳤더랬다. 그때마다 목려는 지금처럼 외롭지만 오만한 뒷모습을 남긴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뒤돌아 떠나갔다.

“목려 장군!”

아소륵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목려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목려는 고개를 돌려 강 동쪽 기슭을 보았다. 려롱구 등에 탄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리라. 목려는 눈을 감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한 장면이 펼쳐졌다. 석양 아래 상반신을 드러낸 소년 하나가 무거운 칼을 휘두르며 나무 말뚝을 연신 내리치고 또 계속 뒤로 튕겨져 나갔다. 소년의 뽀얀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졌고, 마구간에서 굴러 나온 어린 노예처럼 더러웠다.

목려는 굼뜨게 칼을 휘두르는 자세를 보고 칼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지만 소년의 눈빛만큼은 기억했다. 얼마나 지쳤든, 얼마나 크게 소리치든 소년의 눈동자는 언제나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했다. 칼의 살기도 소년의 영혼을 잠식할 수 없었다. 소년은 비 오듯 땀을 쏟으며 칼을 머리 위로 들고 큰 소리로 기합을 넣었다. 그러나 목려는 열정이 들끓는 몸뚱이 안에 사실 슬프고 겁 많은 아이가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멀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소년은 놀랍게도 많이 컸다. 목려는 눈보라 너머로 소년을 보았다. 똑똑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슬프고 겁 많던 아이가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백마를 모는 모습을 상상할 뿐이었다.

“세자, 돌아오셨군요?”

목려가 담담히 말하고는 웃었다.

목려는 고개를 돌리고 달려드는 인파를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자’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아소륵은 마음속에 은근한 통증이 일었다. 얇은 칼 한 자루에 가슴이 베인 것 같았다. ‘세자’라는 호칭을 거의 잊을 뻔했다. 고향에 다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소마는 형에게 시집을 갔다. 그는 과거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부족민을 지키는 영웅 ‘장생왕(長生王)’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아소륵의 아버지는 그저 아들의 어린 마음을 위로하려 농담을 던진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여숭 곽륵이 파소이 같은 사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청양의 미래를 나약한 아들에게 맡길 리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소륵을 부르는 호칭도 ‘세자’에서 ‘대나안’으로 바뀐 것처럼.

그러나 목려는 여전히 그를 세자라 불렀다. 무심코 튀어나온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목려의 마음속에서 아소륵은 아직 아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목려의 기억은 아직 아소륵이 열 살이던 그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목려는 곧 죽을 것이고, 그 기억도 사라질 것이었다.

아소륵은 돌연 군마를 채찍질해 강기슭을 따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철진은 화살에 맞은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가슴을 꽉 눌렀다. 첫 전투에서 그는 쏟아지는 화살에 맞았지만 화살 꼬리를 잘라내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통수가 쓰러지면 군에 영향이 미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몸에 남아 있던 화살촉에 상처가 점점 더 벌어졌다. 계속 말을 달려 질주한다면 화살촉은 더 깊이 박혀 심장이 다칠 수도 있었다. 철진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더 버티고 싶었다. 철진에게 남은 기병 3천 여 명이 막 동쪽 기슭으로 철수했다. 이 기병들이 다시 집결해 수비를 갖출 때까지 버텨야 했다.

준마 한 필이 극히 빠른 속도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말 등에 탄 사람이 손을 내밀어 철진의 어깨를 잡았다.

“형님!”

철진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철익의 얼굴이 보였다. 철진은 가슴의 통증도 거의 잊고 손을 내밀어 제 아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왔구나!”

“제가 늦었습니다!”

철익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강 맞은편 기슭에서는 패알륵 무사들이 껍질을 벗긴 소나무 사이사이의 가죽 밧줄을 잘라내고 있었다. 늦기는 했다. 철익이 도착했을 때 승부는 이미 가려졌으니까.

철익은 손목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철진이 힘주어 잡은 탓이었다.

“집결! 어서 집결해라! 목려는 얼마 시간을 끌지 못한다. 삭북인들이 곧 강을 건널 것이다!”

철진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이어 그는 의식을 잃었다. 질주하는 말 등에서 균형을 잃고 눈밭에 고꾸라졌다. 철진은 살짝 마음이 놓였다. 철익과 함께 훈련시킨 기병대이니 그가 충분히 지휘할 수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철익이 철진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전포를 끌러 철진의 몸을 감싼 뒤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파로, 파찰. 백부를 보호해라. 그리고 모두를 데리고 철수해 북도성 아래 진을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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