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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4)
모든 사람이 넋이 나갔다. 피비린내 나는 광경과 악마 같은 노인에 호표기 무사들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늑대 울음소리가 설원 전체를 뒤덮었다. 흰머리독수리도 고공에서 함께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이런 날씨에 흰머리독수리가 날아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신선한 먹잇감이 너무 많아서였다.
“아니야, 아니야!”
9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흰머리독수리가 스스로 먹이를 찾아 나온 게 아니었어. 저것들이 나온 이유는…….”
9왕이 흰머리독수리가 우짖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 설원은 더 이상 적막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쌓인 눈 아래에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란 무리였다……. 그것들은 피와 살에 대한 갈망을 꾹 억누른 채 울부짖으며 다가왔다.
늑대였다. 커다란 무리의 흰 늑대. 놈들은 폭설이 자기들의 발자국을 뒤덮을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눈밭에 엎드려 있었다. 그래서 척후들이 늑대 떼가 출몰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흰색 늑대는 털색이 눈과 다르지 않았다. 늑대 등에 탄 무사들은 양털 가죽으로 전신을 덮고 거대한 늑대의 체온에 기대 몸을 덥혔다. 흰머리독수리가 내내 전장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늑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썩은 고기를 먹는 새와 늑대 떼, 이 빌어먹을 것들은 공생 관계였다. 늑대 떼의 위치는 흰머리독수리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불화랄은 흠칫 몸을 떨었다. 늑대 떼 맨 앞, 목덜미에 상처를 입은 거대한 늑대를 똑똑히 보았다. 합찰아가 놈의 목에 남긴 상처였다. 그 늑대는 다른 늑대보다 걸음이 더 빠르고 눈빛도 형형했다. 복수심에 불타올랐기 때문이었다.
준마나 다름없는 3천 필의 흰색 거대한 늑대가 먼 곳에 서서 일제히 털을 흔들며 메마른 눈송이를 깨끗이 털어냈다. 늑대 등에 탄 무사들은 천천히 몸을 곧게 일으키고 날이 넓은 전투 도끼를 들었다. 모든 청양 무사가 말없이 백랑단을 쳐다보았다. 수만 명이 있는 전장이 순간 극도록 고요해졌다. 늑대 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늑대는 먼저 천천히 걷다가 종종걸음으로 뛰더니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야수들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랐다. 늑대 떼의 나직한 울음소리가 전후좌우로 호응하며 울려 퍼졌다. 사냥 신호였다. 늑대들이 전방의 사냥감 수만 마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짙은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설원에 휘몰아쳤다. 흰 늑대 수천 마리와 하얀 인영 수천 개가 들썩들썩하며 질주했다. 눈이 파도치며 출렁이는 듯도 하고 눈사태가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군마 수만 필이 두려움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주인의 채찍에도 말을 듣지 않고 정신없이 말머리를 돌려 후퇴했다. 건장하고 용맹한 동물들은 돌연 겁쟁이로 변했다. 서로에게 짓눌리고, 서로를 짓밟는 한이 있어도 저 늑대들에게서 도망치고자 했다. 청양 대군(大軍)이 차지했던 우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호표기도 그들의 군마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일자진은 늑대 떼와 수백 보 떨어져 있음에도 이미 와해되었다. 점점 짙어지는 늑대의 비릿한 냄새에 무사들은 두려워졌고 역겨워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눈앞에 피에 젖은 시체들이 수두룩한데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대오를 정렬하라!”
9왕이 칼을 들고 고함쳤다.
누염이 군마를 몰고 천천히 9왕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대오를 정렬하기에는 늦었다. 늑대 떼가 인파 속으로 돌진했다. 선봉에 선 거대한 늑대는 바라던 대로 사람의 피 맛을 보았다. 놈이 일어섰다. 거의 두 사람 키 정도 높이였다. 늑대는 그대로 덮쳐 호표기의 머리를 통째로 물어뜯었다. 와드득. 잇새에서 들리는 씹는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더 많은 늑대가 뒤따라 달려들었다. 놈들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말의 배를 가르고 곧장 펄떡거리는 심장을 끄집어냈다. 아니면 거대한 무게로 군마를 덮쳐 쓰러뜨린 뒤 물어뜯었다. 늑대 기병들은 도끼로 적군의 머리를 베었다. 그들은 이 전리품들의 머리카락을 둘씩 매듭 지어 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거대한 늑대를 몰아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청양 무사들의 마음은 공포의 마귀에게 사로잡혔다. 동료의 죽음을 목도한 청양 무사들은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하고 서로를 밀어내며 후퇴하기 급급했다. 삭북부의 설령가 군마는 흰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삭북부 무사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청양 무사의 대오에 섞여 그들을 베어 죽였다.
전장은 이미 삭북 늑대 떼의 사냥터로 변했다. 이 사냥터의 사냥감은 청양부 사내들이었다.
“칼을 들어라!”
9왕이 놀라 갈라진 쌍수도를 들어 제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누염과 9왕의 거리는 아직 10보나 떨어져 있었다. 충성스럽고 용감한 호표기 무사들 몇이 달려가 9왕의 앞을 막아섰다. 누염은 말안장에 엎드리며 청동 월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일격에 호표기 두 명의 허리와 군마 두 마리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누염은 손을 뻗어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피를 묻혀 제 맨몸에 바르고 계속 다가왔다. 아무도 9왕의 앞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9왕도 계속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누염이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9왕을 가리키고 다시 주위의 호표기들을 가리켰다.
“하하하하하하하.”
악마 같은 노인은 뜨거운 선혈에 흠뻑 젖은 채 고개를 쳐들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나의 사위여, 내게 이런 상대만을 남겨준 것이냐? 청동 가문의 광혈(狂血)은 어떻게 됐지? 초원 전체를 뒤흔들던 철부도는? 사라졌나? 그런 게냐? 이런 야윈 양들만 남은 것이야?”
누염이 천천히 시선을 떨구며 밭은 숨을 몰아쉬는 9왕을 쳐다보았다.
“청양은 이미 죽었다. 여표은 액로 파소이. 네놈의 머리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 잔으로 만들기에 안성맞춤이겠어.”
누염의 눈빛은 9왕의 신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9왕은 쌍수도를 내던지고 말머리를 돌려 후퇴했다.
누염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말안장 옆에서 전투 도끼를 떼어내 내던졌다. 난폭한 무기가 공기를 가르며 휙휙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9왕의 뒤에서 기를 들고 있던 군사가 죽음이 임박한 순간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쇳빛이 그의 눈동자로 날아들었다. 도끼는 군사의 눈 위 두개골 전체를 공중에 날려 버렸다. 깃발을 꼭 쥐고 말에서 떨어진 군사의 시체는 말등자에 발이 걸린 채 질겁한 군마에 의해 멀리 끌려갔다.
용기와 존엄을 상징하는 표범 깃발은 피에 젖은 채 눈밭에 끌리며 새빨간 무늬를 그려냈다. 9왕은 멈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염의 눈빛이 9왕의 등 뒤에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하늘을 빙빙 돌며 나는 마귀가 차디찬 이빨을 그의 목덜미에 들이댄 것 같았다. 9왕은 미친 듯이 말을 채찍질해 망망한 눈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조급해 마라, 청양의 활. 곧 내 잔을 가지러 갈 것이니.”
누염이 멀어져가는 9왕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누염은 군마를 멈춰 세우고 손가락 굵기의 쇠사슬을 잡아당겨 도끼를 회수했다.
흰 늑대 수천 마리가 누염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왕을 빼곡하게 에워쌌다. 늑대 기병은 무기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마구 두드렸다.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굉음이 일었다. 백랑단을 에워싼 삭북 기병 수만 명이 다시 대오를 정비했다. 이들은 묵묵히 말 위에서 죽은 부족인을 밀어내고 그 군마에 올라탔다. 호도로한의 황금 창랑기가 다시 높이 들어 올려졌다. 하지만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수만 쌍의 눈이 누염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호도로한에게 하듯 떠들썩하지 않고 신을 경배하듯 침묵으로 이 노인을 대했다.
누염은 천천히 말안장을 밟고 일어섰다. 그는 늑대 떼 위에 군림하며 태납륵강의 빙판을 밟고 퇴각하는 청양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누염은 청동 월을 들어 북도성 방향을 가리켰다.
“삭북의 사내들아! 저 앞이 바로 북도성이다. 오늘은 우리가 초원을 제패하는 날이다! 너희의 앞길을 막는 자, 전부 죽여라!”
신탁(神託)이 내려오자 삭북의 사내들은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불화랄의 귀궁 1천 명은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여전히 진을 치고 수비하며 밀물처럼 후퇴해오는 청양 기병들을 보았다. 불화랄은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 지금 도망쳐오는 병사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청양은 이미 패했고 만회할 여지는 없었다. 불화랄이 고개를 돌렸다. 목려가 투골룡을 끌고 와 그의 곁에 말없이 서 있었다. 누염이 전장에 나타나면서부터 목려는 내내 침묵했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지 계속 무표정했다. 피투성이가 되면서 얻어낸 승세(勝勢)가 삽시간에 무너졌음에도 그는 낙담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삭북에 정말 흰 늑대 3천 마리가 있었군요.”
불화랄이 나직이 말했다.
“그렇네. 저들이 백랑단이지.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의 백랑단.”
“혼자서 전쟁터 전체의 사기를 역전시켰습니다……. 이런 일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겠지요.”
불화랄은 손을 뻗어 제 등 뒤를 더듬었다. 그의 화살집은 진즉 텅 비었지만 미처 채울 시간이 없었다. 삭북부는 이미 결전의 돌격을 시작했다. 불화랄은 활을 거두고 바닥에서 군도 한 자루를 주워 들었다. 앙상하지만 힘 있는 손이 다가오더니 그가 주워든 군도를 빼앗아 한쪽에 던졌다.
목려는 투골룡의 말고삐를 불화랄에게 맡기며 입을 열었다.
“자네 부하들과 함께 대군을 엄호하여 퇴각하게. 어서! 내 말을 타고 가. 녀석은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네 말만큼 빠르네!”
불화랄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여수우가 설망의 등에 엎어져 있었다. 전포로 몸을 뒤덮은 그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고 다만 기운이 빠져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와 호도로한의 전투는 목려의 패알륵이 돌격해 호도로한을 떼어놓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여수우는 말안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 난 가벼운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흘렀고 그는 곧 기절했다. 여수우는 기절하는 순간까지도 낭봉도를 쥐고서 호도로한이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제 깃발을 지켜냈다.
“목려 장군은요?”
불화랄이 고개를 들어 목려의 눈을 보았다. 그러나 누르스름한 두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자네를 위해 시간을 벌겠네. 반드시 대군과 호표기가 무사히 전장을 떠나야 해. 안 그러면 우리는 삭북부에 대항할 기회를 잃게 되네. 이 전쟁에서 전부를 잃을 수는 없어.”
목려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 자신의 자제병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누굴 기다리십니까?”
불화랄이 그의 뒷모습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네. 늑대를 기다리고 있어. 예서 그자와의 원한을 끝맺어야겠네.”
멈춰 선 목려가 몸을 돌려 촘촘한 눈발 너머로 불화랄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로 퇴각하는 기병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목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난 이미 많이 늙었네. 늙어 죽기 전에 일생의 원한을 끝낼 수 있는 행운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오겠나? 무척 기쁘다네.”
“대군, 저를 따라오십시오!”
불화랄이 설망의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제 검은 외투를 벗어 여수우의 어깨에 걸쳐주고 한 손으로 구미대독을 쥐었다. 귀궁 수백 명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 한가운데에서 구미대독이 다시 곧게 세워졌다. 그것은 청양의 존엄을 상징했다. 패배했더라도 쓰러져서는 안 되었다. 무사들은 그 깃발의 인도에 따라 집결지로 되돌아갔다.
불화랄은 손으로 여수우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여수우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깨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상의 통증과 과도한 출혈에 의지가 꺾여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초원의 주인인데 이렇게까지 하기 쉽지 않았겠지?’
불화랄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수우는 노예도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불화랄은 또 한 번 그 노예 무사가 전추의 날카로운 뿔에 꿰뚫려 하늘로 날아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쏟아지던 선혈은 동륙 화가의 붓 끝에서 먹이 흩뿌려지며 그려낸 무지개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애달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