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91화 (29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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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3)

9왕이 먼 곳의 전장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은 눈보라 속 눈부신 금빛 한 점을 쫓았다. 그 금빛은 전장에서 좌충우돌했다. 금빛이 닿는 곳마다 호표기의 일자진열이 끊어졌다. 하지만 무사들은 금세 진열의 틈을 메우고 앞으로 돌격해 나갔다. 삭북 무사들이 한 무더기씩 칼날에 쓰러지고 말굽에 짓밟혔다.

“호도로한, 나도 황금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 전기(戰旗)를 장식할 만큼 멍청하진 않아.”

9왕은 웃더니 살며시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제 목을 따가라고 깃대에 걸고 기다리는 것과 뭐가 다르냐?”

9왕의 두 눈에 흉악한 빛이 번득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숫돌을 벗어나는 순간 같았다. 쇳빛 얼굴에는 애석한 표정이 싹 가시고 살 떨리는 냉담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9왕이 팔을 휘두르자 호표기 정예병 한 대오가 그와 함께 전장에 뛰어들었다.

호도로한은 얼굴의 땀을 훔쳐냈다. 선혈이 얼어붙은 살얼음도 같이 떨어져 나갔다. 호도로한의 군마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가슴과 배가 풍상(風箱)처럼 격렬하게 들썩였고 입꼬리에는 흰 거품이 일었다. 호도로한도 말 등에서 내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호표기의 일자진열이 또 다시 대형을 모아 빈틈을 메웠다. 저들은 곧 또 한 차례 돌격을 감행할 것이었다. 어쩌면 이번 공격이 남은 삭북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릴지도 몰랐다.

“세자…… 어서 피하지 않으면 정말 늦습니다!”

호도로한의 심복 하나가 그의 뒤에 말을 세우고 밭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심복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호도로한과 함께 수십 명의 청양인을 죽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호도로한은 잠시 망설였다.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떠나지 않으면 청양의 포로가 될 뿐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수백 명의 아내는 남의 노예가 되고 그들 아래 깔려 농락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호도로한은 초조함을 참기가 힘들었다. 발정난 수컷 고양이가 속을 마구 긁어대는 기분이었다.

펑. 활시위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호도로한은 냅다 말 등에 엎드렸다. 돌아보자 그의 심복이 천천히 말 등에서 고꾸라졌다. 등에는 흰 수리 깃털 화살이 한 대 꽂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쇳빛 얼굴의 청양인이 활을 들고 있고 그의 뒤로 호표기 무사 수백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표범 깃발을 높이 들고 있었다. 이 대오가 호도로한의 마지막 퇴로를 막았다.

호도로한이 입술을 다시며 말했다.

“여표은 액로 파소이. 청양의 활. 네 이름은 들어보았다.”

9왕이 활을 자루에 넣으며 말했다.

“잘됐군. 그럼 내 소개는 할 필요 없겠네. 호도로한, 이 전쟁의 공적으로 내 너의 머리를 가져야겠다.”

9왕이 두 손으로 천천히 말안장 양쪽을 잡으며 깊게 호흡했다. 선득한 푸른빛이 극도의 날카로운 울림과 함께 말안장 양쪽에서 엇갈려 쏘아져 나왔다. 청양부 9왕, 여표은 액로 파소이의 쌍수장도가 학의 날개처럼 서서히 펼쳐졌다. 9왕은 자신의 진짜 무기를 꺼내들고 음침한 눈으로 호도로한을 쳐다보았다. 제왕처럼 상대를 깔보는 오만한 눈빛이었다.

호도로한은 칼의 살기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9왕이 칼을 펼쳐든 자세에는 거대한 힘이 실려 있었다. 칼을 수십 년 쓴 고수나 지닐 수 있는 힘이었다. 칼 두 자루는 마치 9왕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이 힘에 단단히 얽매여 있었다. 호도로한은 웃음이 났다. 이 생의 마지막 날이 도래했음을 느꼈다. 더는 수백 명의 아내를 떠올리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누구의 여인이 되든 이미 나 호도로한과는 관계가 없을 테니. 하지만 죽기 전에 북도성을 빼앗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다. 호도로한은 한때 철기병을 이끌고 청양부에서 전공으로 으뜸가는 친왕과 초원에서 생사를 다투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그가 도검을 이용해 무사의 방식으로 끝을 맺을 줄은 몰랐다.

“초원에서 청양 9왕의 무예를 논하는 이가 없기에 영원히 네 철기병 뒤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호도로한이 피로 물든 이를 혀로 훑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내가 틀렸군.”

“내가 사자왕 용격진황 백로합 고살이의 다리를 베었을 때, 그도 믿지 못했다.”

9왕이 담담히 말했다.

“그러게, 내가 어리석었군. 너처럼 전장을 동경하는 사내에게 어찌 살인의 충동이 없을 수 있겠어?”

호도로한은 제 쌍수도를 들어 이 빠진 칼날을 훑어보았다. 너무도 많은 청양인의 머리를 벤 칼은 이미 못 쓰게 되었다. 하지만 호도로한에게 남은 마지막 무기였다. 그의 호위들은 죽었거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호도로한의 마지막 존엄은 이 칼자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삭북 기병 한 무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려 했다. 호도로한을 구할 생각인 듯했다.

호도로한이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소리쳤다.

“꺼져라! 나와 청양 9왕의 일이다!”

호도로한은 제 곁에 몇 남지 않은 호위들에게도 말했다.

“너희도 물러나라.”

그러고는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 9왕과 수십 보 거리에서 시선을 맞추었다.

9왕이 천천히 양손 손목을 움직였다. 칼 두 자루가 눈송이를 쓸었다.

“아주 똑똑하군. 배짱도 있고. 용사처럼 죽게 해주마.”

9왕이 냅다 말을 몰아 앞으로 돌진하며 쌍수도를 좌우로 평평하게 펼쳤다. 매가 날개를 펼치고 활공하는 것 같았다. 9왕의 필살기였다. 그는 호도로한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부하들 앞에서 단칼에 삭북 세자를 죽이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었다. 호도로한을 구하려고 달려들던 삭북 무사들은 호도로한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재빨리 호도로한과 9왕 사이에 끼어들었다. 9왕은 진노했다. 그의 쌍수도는 군을 이끄는 통수를 베기 위한 칼이지 이런 잡스러운 병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도로한의 머리를 베기 위해 9왕도 한 번은 예외를 두기로 했다. 그는 왼손의 칼을 가로 휘두르고 오른손의 칼은 세로로 내리쳤다. 완벽한 이 십자 참절(斬切) 기술의 목표물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삭북 무사였다.

방한용 양가죽 전포를 두르고 있던 상대는 전포를 휙 털어 펼치더니 잽싸게 호도로한의 쌍수도를 잡아들고 뒤돌아 9왕을 향해 내리쳤다.

9왕의 맹렬한 공세 아래 그는 뜻밖에도 맞공격을 선택했다.

9왕은 상대의 몸에서 나는 갑옷 조각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기가 교차하며 금속이 요란하게 울렸다. 9왕은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가 극도로 저릿했다. 9왕의 쌍수도가 호도로한의 다 망가진 쌍수도와 부딪쳤다. 놀랍게도 9왕은 철벽을 내리친 느낌이었다.

9왕은 말을 몰아 재빨리 몇 걸음 피했다. 그는 놀라며 제 수중의 쌍수도를 보았다. 미세한 균열이 칼날에서부터 서서히 칼등으로 번져 나갔다. 금속은 부러지기 전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이 칼 한 쌍은 젊었을 적 동륙 행상에게서 산 것으로 두 자루 모두 매우 질이 좋은 하락제 무기였다. 그와 수십 년을 함께하며 몇 안 되는 적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 목의 주인 모두 초원인이 길이 칭송하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다. 한데 저 무사는 단 일격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무기를 망가뜨렸다.

삭북 무사는 한손으로 호도로한의 칼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허공에 냅다 휘둘렀다. 칼은 산산이 부서졌고 파편은 눈밭에 박혀 들어갔다. 그는 반 토막 난 칼을 대충 한쪽에 던졌다.

삭북 무사가 천천히 전신을 가리고 있던 양가죽 전포를 벗어 뒤편의 눈보라 속에 높이 내던졌다. 그는 노인이었다. 무두질하지 않은 생 양가죽을 두르고 반쪽 어깨와 팔 한쪽을 드러냈으며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썩은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진 팔로 거대한 청동 월을 들었다. 무성하게 난 헝클어진 수염이 거의 얼굴 전체를 가렸고 유일하게 새빨간 눈만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쇠밧줄에 꿰어진 철패 수천 개가 부딪치며 불안을 조장하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철패마다 새겨진 이름은 달랐지만 그들이 지닌 원한은 하나였다.

“아버지!”

호도로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제로 억눌렀던 공포가 돌연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옷 아래로 전신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호도로한은 자신이 살았음을 깨달았다. 그의 말 앞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삭북의 늑대왕,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 초원에서 제일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이었다. 노쇠했으나 우람한 체구가 호도로한을 위해 차가운 바람을, 눈보라를, 청양 9왕의 칼날을 막아주었다. 호도로한은 문득 유아기적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의 위세 등등한 그림자 아래에서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호도로한, 아주 잘해주었다. 역시 내 핏줄이야.”

누염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염은 새빨간 눈으로 9왕을 직시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9왕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얼굴의 혈관도 미친 듯이 불퉁거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9왕은 이미 제 두려움을 완전히 적에게 드러내고 말았다. 목민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떠올랐다. 이 노인은 인간이 아니라 마귀라 했다. 인간은 이렇게 선혈에 담갔다 뺀 듯한 눈동자를 가질 수 없었다.

9왕은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후퇴했다. 호표기 무사들도 감히 돌진하지 못했다. 이 노인은 홀로 수백 명의 정예 기병들을 천천히 후퇴하게 몰아붙였다.

“여표은 액로 파소이. 내 머리도 간절히 갖고 싶겠지? 또 다른 공적으로 삼고 싶을 게야?”

누염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백랑단을 데려 왔나?”

9왕이 나직이 물었다. 그의 척후는 늑대 떼가 출몰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백랑단은 오지 않았는데 그의 왕이 나타나다니. 이는 끔찍한 실수였다. 누염이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꼭 늑대 등에만 있으란 법 있나? 순진한 것.”

누염이 천천히 청동 월을 들어 올리더니 늑대처럼 나직이 울부짖었다. 호도로한이 전장에 뛰어들 때처럼 삭북 무사들은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누염에게 호응했다. 다 무너져가던 삭북 기병들은 어디에서 용기가 생겨났는지 작은 대오를 이루어 미친 듯이 누염 쪽으로 다가왔다. 한순간 삭북 무사 수십 명이 누염 뒤에 집결했다. 9왕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삭북 무사들은 늑대의 혼에 빙의된 듯 나직하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냈고 눈동자도 차츰 누염처럼 새빨간 빛을 띠었다.

“화살을 쏴라!”

9왕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빠르게 후퇴했다.

호표기는 황급히 활에 화살을 얹었다. 하지만 누염은 9왕의 명령과 동시에 군마를 움직여 번개처럼 호표기 진영을 뚫고 들어와 홀로 수백 명을 상대했다. 늑대왕으로서 이렇게 위험한 전술을 택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제일 앞에 있던 호표기가 활을 드는 순간이었다. 화살을 쏘기도 전에 누염은 그의 앞에 도착했다. 무사는 당황해 활로 누염의 목을 베려 했다. 누염은 살짝 고개를 틀어 활을 피하고 청동 월을 공중에 휙 내던지더니 손을 뻗어 그 호표기 무사를 말안장에서 잡아당겼다. 누염보다 훨씬 더 우람하고 건장한 호표기 무사는 누염의 손에서 아기처럼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누염은 무사를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리더니 양손으로 무사의 발목을 잡고 좌우로 찢었다. 누염의 팔은 매우 길었다. 썩은 나무 같은 팔에서 불가사의한 힘이 터져 나왔다. 호표기 무사는 무참히 두 쪽으로 찢어졌다. 비린내 짙은 피가 공중에서 폭발하듯 누염의 몸에 뿌려졌다. 누염은 고개를 쳐들고 쏟아지는 혈우(血雨)를 그대로 맞으며 맹수가 신선한 먹이를 즐길 때와 같은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쪽 난 시체를 던진 뒤 손을 높이 들어 떨어지는 월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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