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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2)
호도로한이 천천히 명령을 내렸다.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부하에게 설명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호도로한은 말머리를 돌려 살아남은 무사들을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지만 그리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호도로한은 하늘을 쳐다보며 혀로 제 이를 하나, 하나 훑었다. 이것은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이 마땅히 내려야 할 결정이자 초원의 영웅이 내리는 결정이었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호도로한은 평생 자신의 영웅인 아버지를 볼 수도, 초원에서 두 번째로 강한 부락을 이어받을 수도 없었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독주를 퍼마시든, 아내 수백 명을 갖든, 맨 손으로 소머리를 비틀어 부러뜨리든, 제게 항명하는 모든 이를 죽여 버리든…… 무슨 짓을 해도 제 아버지에게 자신이 삭북부를 물려받을 후계자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호도로한은 알고 있었다. 누염은 영원히 자신을 잘 길들인 새끼 강아지 보듯 할 것이었다. 하여 호도로한은 물러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자기를 증명해 보일 기회였다.
호도로한의 시선이 강으로 이동했다. 그는 말안장에 놓인 쌍수도를 들었다. 부교는 이미 완공되었다. 청양 무사 수천, 수만 명이 함성과 함께 빙하를 건넜다. 한데 모여든 이들은 천하무적의 군대를 이루었다.
“장창(長槍)!”
호도로한이 명령했다.
장창수들이 막 정비한 대오 속에서 달려 나와 창끝을 나란히 쭉 늘어놓았다.
“활!”
호도로한이 또 명령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말안장에서 활을 떼어내고 화살을 얹은 뒤 비스듬히 하늘을 겨누었다.
“칼을 준비하고 내 깃발을 보아라!”
호도로한이 황금 창랑기를 뽑아 제 어깨에 짊어졌다.
“공격!”
호도로한이 깃발을 흔들며 말을 달려 나갔다.
수만 명이 호도로한을 따라 돌격했다. 태납륵강 동쪽 기슭에서와 같은 곤경은 없었다. 서쪽 강기슭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야말로 기병이 승부를 가를 전장이었다.
“아군 기병의 주력 부대가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의 본대를 퇴각시키고 전군 태납륵강을 건너 반격에 들어갔습니다. 삭북부는 이미 전 대오를 거둬들였고, 양군은 강 서쪽에서 결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군께서는 경미한 부상을 입고 목려 장군의 엄호 하에 후퇴하셨습니다. 현재는 강 서쪽 기슭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계시고요.”
척후가 홀탄산 아래의 9왕 앞에서 급히 소식을 전했다.
9왕은 이야기를 듣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식을 증명하듯 저 멀리에서 하늘이 떠내려갈 듯한 교전의 함성이 전해졌다. 9왕 곁에 말을 세우고 있던 반찰렬은 척후의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대군이 경상을 입었다니 내심 초조해졌다.
천부장 하나가 9왕 뒤로 다가왔다.
“칸, 지금 진격하지 않으면 전공은 모두 저들 차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 호표기가 언제 다른 이에게 밀린 적 있습니까?”
9왕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천천히 손을 세웠다.
“진짜 전공은 누구도 우리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 진정한 전공이 뭐라 생각하느냐?”
천부장은 순간 아연해졌다.
“호도로한은 물리쳐봐야 아무 소용없다. 30년 전 나의 형님 곽륵이도 누염을 물리쳤지만 30년이 지나고 저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전보다 더 강해져서.”
9왕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진정한 전공이란 이 전쟁을 영원히 끝내는 것이다. 우리는 삭북 사내 6만 명을 죽여야 한다. 그럼 삭북부에는 노인과 어린아이, 여인만 남겠지. 그들은 우리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럼 초원에 더 이상 삭북부는 없다……. 진안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멸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9왕이 척후를 돌아보며 물었다.
“늑대 떼 출몰의 흔적은 찾았느냐?”
“아뇨. 전장에 뛰어든 이들은 모두 호도로한 수하의 기병입니다. 불화랄이 서쪽 기슭에서 치랑을 보았는데 세 마리 뿐이었다 합니다. 저희도 척후 50여 명을 보냈고 다들 짐승의 족적을 추적하는 데 능한 병사들이지만 늑대 떼가 출몰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9왕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누염은 무슨 생각일까? 백랑단 3천 명만으로는 현재의 패국(敗局)을 만회할 수 없겠지?”
9왕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다!”
9왕이 검을 뽑아들자 1만 6천 기병이 눈밭에서 일어나 말안장을 정돈하고 말에 올라탔다. 깊이 잠들어 있던 마지막 기병이, 그것도 가장 강한 기병 야수가 깨어났다. 이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9왕이 천천히 검을 휘둘러 앞을 가리켰다.
“진격한다. 너희는 청양의 호표기다. 저들에게 너희의 발톱과 이빨을 보여주어라. 평생 군을 이끌어온 나, 액로 파소이는 최대의 전공만을 원한다. 이번에는 삭북 사내 6만 명의 머리다! 가장 많이 머리를 가져온 이에게는 대군께 청해 ‘철아 무사’의 호칭을 하사하겠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수많은 군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청양부의 표범 깃발과 삭북부의 창랑기가 전장에서 뒤얽혔다. 청양 기병은 1차 돌격 후 한데 뒤섞여 적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삭북 무사는 청양 무사보다 더욱 사나웠다. 그들은 열세의 병력으로 힘겹게 박빙을 유지했다. 이 전쟁터에서는 누구도 전진할 수 없었다. 앞은 적의 칼이 아니면 동료의 등이었다. 후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뒤에서는 더 많은 동료가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격했다. 군도 아래에서 무사들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쓰러져갔고 계속해서 다음 무사들이 달려들어 전장을 이어받았다.
불화랄은 진 후방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후퇴하는 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귀궁 무사 1천 명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든 돌아보면 검은색 우전에 머리가 관통될 것이었다.
너무 오래 지속된 전투에 불화랄은 약간 염려가 되었다. 진영이 무너지고도 삭북부 무사들이 다시 싸우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한 청양부가 언젠가는 승리를 거머쥘 것이었다. 삭북부는 그나마 남은 남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소모할 뿐이었다. 불화랄이 알기로 북쪽 지역은 매우 춥고 남쪽 초원처럼 인구가 많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내들은 하나같이 곰이나 호랑이처럼 건장했다. 삭북부는 30년간 세를 회복하며 확보한 병력을 이렇게 소모하는 것이 과연 기꺼울까? 게다가 이는 청양부에도 힘겨운 승리였다. 어쩌면 북도성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사내는 1만 명 정도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불화랄은 양측의 남은 병력을 셈해보았다. 삭북부는 싸울 수 있는 사내가 3만 명쯤 남았다. 청양부는 5만이었다. 쌓인 눈 속의 시체는 5만이 넘었다. 5만 명이면 초원에서는 꽤 규모가 있는 부락이었다.
불화랄은 순간 깜짝 놀랐다. 은은한 호각 소리를 들은 까닭이었다. 그 소리는 삭북부 진 후방에서 들려왔다.
‘삭북부에 복병이 남아 있었나!’
불화랄은 번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시선을 들어 보았다.
시선이 닿는 설원 끄트머리에 커다란 깃발 하나가 흩날리는 눈발을 휘감으며 펄럭펄럭 휘날렸다. 만 명 이상의 대대가 호각 소리와 함께 말을 타고 접근해 왔다. 전장의 교전 소리가 돌연 약해졌다. 무사들은 자연스레 서쪽을 시선을 돌려 그 깃발을 보았다. 그것은 청양의 표범 깃발이었다.
“호표기.”
불화랄이 나직이 말했다.
청양의 활은 최후의 순간 그의 화살을 쏘았다. 불화랄은 9왕의 전술을 이미 짐작했다. 9왕은 기병을 이끌고 목려가 말한 대로 빙하가 가장 좁은 곳을 건넜다. 그곳은 아직 빙판이 깨지지 않아 신속하게 적진 후방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시기였다.
설원 전체가 호표기의 출현에 침묵했다. 호표기 1만 6천 명은 전장 곳곳에 널린 시체를 무시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조정해 장장 2리에 달하는 일자진을 펼쳤다. 기병대 맨 앞줄은 선처럼 평평했다. 말과 말 간격은 좌우로 1보 거리, 앞뒤로는 말 몸통 반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호각 소리가 멈췄다. 수만 명의 시선이 일자진 앞에 선 말에 모였다. 말 등의 무사는 일체를 지배하는 황제처럼 오만하게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잠시 멈추었다가 전방으로 휙 내저었다. 군도 1만 6천 자루가 동시에 칼집에서 뽑아져 나왔다. 모든 군마의 몸 옆으로 한 줄기 무쇠 빛깔이 어렸다. 호표기 무사들은 동시에 말고삐를 풀었다. 철통같던 속박이 풀리자 군마 1만 6천 필의 힘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격렬한 천둥처럼, 세찬 조수처럼, 그들 머리위로 미친 듯이 떨어지는 눈보라처럼.
호도로한은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피가 느껴졌다. 저 깃발을 보는 순간 호도로한은 이 전쟁의 결과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쌍수도를 쥐고 있었다. 이 칼을 쥐고 있는 한 그는 아직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호표기의 일자진은 반듯한 칼날처럼 맹렬하게 전장을 갈랐다. 그들은 강철로 만든 빗 같기도 했다. 빗살이 휩쓰는 곳마다 삭북 무사들이 잇달아 쓰러졌다. 청양 무사들은 칼을 쥔 채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호표기의 뒷모습을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반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투력으로 무장한 군마, 우수한 갑옷,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이 군대를 무적으로 만들었다. 호표기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호표기들은 전쟁터를 쓸고 지나가면서도 대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들은 멀리서 군마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돌리고 새로이 대열을 정비했다. 새로운 대오가 호표기 대열의 맨 앞을 차지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살을 시작했다.
전장의 청양 무사들은 호표기를 보고 넋이 나갔다. 교만한 호표기를 무시했던 이들도 지금은 모두가 호표기를 선망하고 그들에게 감탄했다. 청양부 정예 중의 정예다웠다. 그들은 반달 천신의 칼이었다.
닿는 곳마다 풀 한 포기 살아남지 못했다.
목려는 상처투성이인 낭봉도를 내던지고 말안장에서 마지막 칼 한 자루를 뽑았다. 늑대 이빨 같은 칼이었다. 칼몸에는 가닥가닥의 무늬가 흐르는 구름처럼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동륙에서 생산된 아도(牙刀)로 칼날에는 오금색 어두운 빛이 번득였다. 목려가 아래에서 위로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피 안개가 공중에 자욱이 흩뿌려졌다. 목려의 말 앞을 가로막은 삭북 무사는 왼쪽 허리부터 오른쪽 어깨까지 비스듬하게 상처가 벌어졌다. 무사의 갑옷과 근육은 목려의 일격에 완전히 베여 나갔다. 종이를 자르듯 아주 손쉬웠다.
목려는 발을 털어 말등자를 벗고 삭북 무사의 시체를 발로 차버렸다. 목려는 뒤돌아 아도를 높이 들고 제 뒤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진하라! 전진! 전진! 호표기가 도착했다! 이제 최후의 결전이다! 삭북 늙은 늑대의 머리를 가져오는 자는 우리 청양의 보도(寶刀)이자 수백년 뒤에도 칭송될 영웅이다! 청양의 사내는…… 모두가 영웅이어야 한다!”
철진은 삭북 무사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내고 시체를 밀쳐냈다. 뒤돌아 선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목려가 군도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목려는 목을 곧게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목덜미의 퍼런 힘줄이 불뚝거렸다.
철진은 하늘로 칼을 들어 올렸다. 가슴속의 작열하는 피가 화산처럼 폭발할 듯했다. 소리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철진이 목려를 따라 사납게 소리쳤다.
“전진! 전진! 전진!”
설원 전체가 그들에게 호응했다. 청양 사내 수만 명이 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전진! 전진! 전진!”
사내들의 피에 불이 붙었다. 자신의 이름을 사서에 기록할 수 있는, 평생에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였다. 목려의 말이 맞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청양의 사내는 마땅히 영웅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