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89화 (28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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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1)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아소륵은 철진과 나란히 서서 전진했다.

“눈이 너무 거셉니다. 동운산이 안 보여요. 거의 다 왔을 겁니다. 앞으로 10여 리 내지는 20~30리 정도 가면 됩니다. 옆에 이 얼어붙은 강은 분명 태납륵강일 테니 이 강을 따라가면 됩니다.”

화창한 날이면 목민들은 멀리 웅장한 신의 산, 동운산을 바라보며 천천히 북도성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폭설이 내리는 넓디넓은 초원에서는 얼어붙은 강 외에 길과 거리를 정확히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식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소륵이 돌연 손을 내밀어 철익의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제 려롱구의 말고삐도 바짝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멈춰라! 전군 정지한다!”

“왜 그러십니까?”

철익이 나직이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북도성이 사방으로 포위되었다면 지금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적군의 포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소륵은 제 곁에 모여 있는 철부도 무사들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먼저 척후를 보내고 동시에 전원 완전 군장을 하죠. 지금부터 언제든 적을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순 멍해졌던 철익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동륙의 병법을 정말 잘 배우셨습니다! 너무 서두르다가는 많은 수의 적을 만날 수도 있지요.”

철익이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척후를 보내는 건 문제가 아니나, 철부도 갑옷은 입을 수 없습니다.”

“왜죠?”

아소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자, 북도성에 철부도 갑옷이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철익이 주위 무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딱 100구 있습니다. 단 한 구도 더 없지요. 선대 대군께서 귀족들을 속이고 얼마나 많은 준마와 모피로 갑옷 재료를 교환했는지 모릅니다. 값을 매기면 이 갑옷들은 금만큼이나 비쌀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용혈마를 타고 철부도 갑옷을 입기 위해 10년을 훈련했습니다. 한 명도 잃을 수는 없어요. 철부도는 삭북부를 대비해 준비한 군대입니다. 철부도가 부활한 것을 삭북인이 알게 되면 저들도 대비를 할 겁니다. 하여 대군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철부도를 동원할 수 없습니다.”

“대군께서 나를 구하려고 그런 철부도를 기꺼이 보내시다니…….”

아소륵의 말에 철익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아소륵의 어깨를 툭툭 쳤다.

“대군의 아우시잖습니까!”

아소륵은 심장이 쿵 뛰었다. 동륙에서 너무 오래 지낸 나머지 대군이 된 형님이 무척 낯설었다. 철익이 그 말을 하자 아소륵은 돌연 어릴 적이 떠올랐다. 여수우는 늘 아소륵을 살짝 무시하는 듯하면서도, 귀여워하듯이 머리를 어루만졌더랬다. 나약한 새끼 양을 어루만지듯이 그렇게.

“파로! 파찰!1)

철익이 소리쳤다.

무사 두 명이 무리 속에서 말을 몰아 달려왔다. 철익의 두 아들이었다. 이들은 아소륵의 측근 심복으로 아소륵과 함께 동륙에서 10년을 지냈다. 철익은 아들들을 특별한 신분으로 대하지 않고 철부도에 곧장 편입시켰다. 건장하고 씩씩한 두 청년은 확실히 철부도 갑옷이 어울렸다.

“너희 갑옷은 놔두고 앞쪽에 가서 길을 살펴봐라. 강가를 떠나지 말고 무엇을 발견하든 즉시 돌아와 보고해라! 나머지는 여기서 대비한다!”

철익의 명령에 철안과 철엽은 용혈마를 달려 눈보라 속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나머지 무사들은 마바리를 몰아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용혈마와 사람은 그 가운데에 모여 화살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 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는 듯했다. 철부도 무사 전원이 거의 동시에 활에 화살을 얹고 강 쪽을 겨누었다.

“잠깐!”

아소륵이 다가가 맨 앞에 있는 무사의 팔을 눌렀다.

가까워지는 인영을 보고 철익은 깜짝 놀랐다. 철안과 철엽이었다.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반리 정도 달려갔을 시간이었다. 철익은 적이 코앞에 있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눈보라 속에서 적군이 돌진하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철안과 철엽은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철익의 양쪽에 섰다. 놀라움과 불안한 기색이 뒤섞인 낯빛이었다. 두 사람은 입술을 연신 달싹였지만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철익이 철안의 옷깃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

“적이 있느냐?”

철안이 고개를 저었다. 말주변이 없는 철안은 눈을 크게 뜨고 제 아버지를 쳐다보며 뭐라 말해야 할지 고심했다.

“적을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형님, 말할 것 없어요. 옆에 강을 보면 아실 거예요.”

철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꽁꽁 얼어붙은 태납륵강으로 향했다. 빙판이 건조한 까닭에 눈이 쌓이지 않고 거센 바람에 강 동쪽 기슭으로 날아갔다. 그래서 빙판에는 눈이 얼마 없었다. 거의 투명한 얼음장은 두께가 1척이 넘었다. 어제까지도 이 아래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는 모습을 보았더랬다. 지금, 강은 여전히 고요했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쪽입니다!”

상류를 보던 무사가 제일 먼저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아소륵은 상류로 다가가 보았다. 새하얀 빙판에 색이 한 겹 묻어 있었다. 짙디짙은 붉은색은 백지 수묵화에 실수로 주사를 물들인 것처럼 매우 선명하고 도드라졌다. 그 붉은색은 서서히 아소륵 일행 쪽으로 밀려 내려왔고 금세 태납륵강 절반이 적홍빛으로 물들었다. 아소륵은 말 등에서 뛰어내려 빙판을 밟고 강 중앙으로 걸어갔다. 철안과 철엽이 뒤를 따랐다. 붉은색은 비단 한 필이 빙판 아래에서 서서히 펼쳐지듯 흐르는 물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갔다. 금세 그들의 발아래까지 번져온 붉은색은 1척 두께의 빙판 아래에서 쉬지 않고 하류로 흘러갔다.

“피예요.”

철엽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상류의 치열한 전투로 빙판이 갈라져서 죽은 사람이 강물에 빠진 겁니다……. 이건 그들의 피고요…….”

사실 철엽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 전쟁에 나가본 이들이기에 ‘강이 피로 물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다 알았다. 그러나 정말 강 전체가 새빨간 피로 붉게 물드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피가 강물 전체를 붉게 물들일 수 있을까? 아무도 몰랐다. 무사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아소륵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제 발아래를 보았다. 얼음 아래로 새빨간 핏물이 조용히 흘러갔다. 핏물 속에는 청년 무사의 시신 한 구가 떠 있었다. 그 청년의 얼굴은 연한 파란빛을 띠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는 빙판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의 모든 피가 빠져나온 듯 청년 무사는 시뻘건 강물 속에서 유난히도 하얘 보였다. 시신이 아소륵의 발치까지 떠내려 왔을 때, 창백한 눈동자가 순간 번쩍인 듯했다. 자신들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철엽은 선득한 한기가 바늘처럼 등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소륵은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빙판에 댔다.

그 빙판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였다.

청년은 천천히 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아소륵의 귓가에 불현듯 백의가 불렀던 장송곡이 울려퍼졌다. 비통함과 한기가 동시에 아소륵의 몸에 스며들었다. 아소륵은 가슴을 움켜쥐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 아소륵을 맞이하는 것은 가족의 웃는 얼굴이 아닌, 수천수만 명의 피였다.

“저들을 강으로 밀어라!”

철익의 형 철진이 태납륵강 상류에서 칼을 들고 포효했다.

빙판 일부가 이미 커다랗게 주저앉았다. 삭북 무사 수천 명이 강기슭에서 제압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칼을 휘두르며 사투를 벌였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등 뒤는 차디찬 태납륵강이고 앞은 우위를 점한 청양 무사였다. 한곳에 억류된 이들은 유리한 진영을 펼치고 방어할 수가 없었다. 청양 철기병은 군도를 휘두르며 미친 듯이 적군을 베어 죽였다. 사람과 군마의 시체가 강기슭에 쌓였다. 강기슭에서 빙판 아래로 흘러간 선혈은 다시 얼음 동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물에 빠진 삭북 무사들은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수면 위로 적홍색 물결이 일렁였다.

삭북부 기병의 주력 부대는 이미 태납륵강 서쪽 기슭에 억류되었다. 청양부의 기병 대대가 전장에 밀어닥친 후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었다. 삭북 기병은 패알륵에 진형이 흐트러진 뒤 철진에 의해 또 소규모로 갈라져 설령가 군마의 강점을 발휘할 수 없었다. 현재 머릿수에서 앞선 청양 기병이 우위를 점했다. 그들은 진형을 갖추고 삭북 기병을 태납륵강 가로 밀어붙였다. 동쪽 기슭의 삭북부 대오가 무너지자 무사들은 하는 수 없이 서쪽 기슭으로 철수해 다시 대오를 결성, 전투를 치를 준비를 했다. 청양부가 추격해 왔다. 목려의 예상대로였다. 쫓기는 삭북 기병들은 빙하에 임시로 세운 나무다리를 신속하게 통과할 수 없어 빙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빙판은 금세 무너졌고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삭북 무사 수천 명은 청양 무사의 칼에 도살될 짐승의 운명이었다.

호도로한은 태납륵강 서쪽 기슭에서 동쪽 기슭을 바라보았다. 제 군사들이 풀 베이듯 줄지어 쓰러지자 눈꼬리가 파르르 격하게 떨렸다. 그의 뒤에서 삭북 기병 수만 명이 다시 대열을 정비했다.

동쪽 기슭의 군사들이 청양 대군의 힘을 얼마나 빼놓을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청양인은 동쪽 기슭에 있는 마지막 삭북인을 죽이면 서쪽 기슭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궁수의 엄호 아래 기병 대대가 강을 건너 돌격할 것이다. 호도로한은 남은 기병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유리한 진형을 펼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호도로한은 젊은 청양 대군과 얼마 못 싸웠다. 우세를 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규모 기병대가 쳐들어와 직접 청양 대군을 죽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썰물 빠지듯 후퇴하는 군사들을 따라 호도로한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호도로한의 옆에 황금 창랑기가 꽂혀 있었다. 살아남은 무사들은 창랑기를 기준으로 모여들었다. 호도로한은 간발의 차로 구미대독을 손에 넣지 못했다.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청양 대군의 머리는 제 말의 목에 걸렸을 터였다. 호도로한이 이를 악물었다. 격한 분노가 치밀었다. 꼭 사냥감을 놓친 늑대 같았다.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수중에 백랑단 3천 명이 있었다면, 벌써 승리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상상일 뿐이었다. 호도로한도 그 3천 명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누가 지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에 마귀의 명령만 들었다.

그 마귀는 호도로한의 아버지, 누염이었다.

호도로한은 동쪽 강기슭의 마지막 삭북 무사가 기병창에 가슴이 꿰뚫린 채 들어 올려진 것을 보았다. 적군은 시체를 전리품처럼 자랑하고는 빙판 구멍에 던졌다. 강기슭의 청양 무사가 하늘을 향해 칼을 들고서 최후의 공격 직전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 목소리는 하늘의 자욱한 눈구름도 뒤흔들어 헤칠 듯했다.

“잡놈의 새끼들! 벌써 내 목을 베기라도 한 줄 아는군!”

호도로한이 이를 악물었다.

미리 준비된 껍질을 벗긴 소나무들이 빙하에 던져졌다. 패알륵 무사가 그 위에 넓은 판을 깔았다. 그러자 말과 함께 지나갈 수 있는 부교가 금세 만들어졌다. 강에는 부교 여섯 개가 동시에 착공되었다. 호도로한은 병사를 보내 부교를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 활을 들고 강가에 선 청양 무사들이 삭북부가 접근하기만 하면 화살을 퍼부을 것이었다. 호도로한은 청양 놈들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주 치밀하게 계산했다. 심지어 강의 폭까지 고려했다. 화살을 퍼부어 강에 넓은 판을 설치하는 패알륵을 엄호할 거리까지 계산에 넣었다.

“대열을 정비해라!”

* * *

1) 파로와 파찰은 여귀진의 심복 철안과 철엽의 만족 아명이다. - 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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