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88화 (28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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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0)

호도로한은 태납륵강 서쪽 기슭에 말을 세우고 삭북 대군이 빙판을 건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강에 다리를 설치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기병들은 다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을 걷어내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면 빙판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강을 더 빨리 건너야 했다. 강 맞은편 기슭에서 양측 군대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장에 병력을 투입하는 쪽이 더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폭설에 기병의 돌격 위력은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군마의 질주 속도도 떨어졌다. 일단 접전이 벌어지면 양측은 떨어질 수가 없어 그냥 말을 탄 채 칼을 휘두르며 코앞에서 서로를 베어죽일 수밖에 없었다. 청양부 수만 명과 삭북부 수만 명이 새하얀 전장에 한데 뒤섞였다. 양쪽 군대는 옷 색깔도 구분이 쉽지 않았다. 전기(戰旗)는 이미 지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모든 무사는 살기 위해 전력으로 상대를 베어 죽였다. 전장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새하얀 설원은 사람과 말 시체로 가득했다.

상대측 통수는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혼전 속에서도 몇 차례 돌격대를 조직해 삭북부 기병 수만 명을 갈라놓았다. 호도로한의 명령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갈라진 기병 수천 명은 각개전투를 치렀다.

호도로한은 제 아버지를 떠올리자 마음속에 불안과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누염은 백랑단이 청양의 기병을 먹잇감으로 본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자신의 기병만 이곳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고 제 아버지의 늑대 3천 마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 커다란 깃발을 본 호도로한은 심장이 철렁했다. 황급히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양의 표범 깃발이었다. 깃대에는 표범 꼬리가 9개 매달려 있었다. 호도로한은 그 깃발을 본 적은 없었지만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꿈에서도 손에 넣고 싶었던 깃발이었다.

“구미대독이다! 저자는 청양의 주인이다!”

호도로한이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삭북의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 청양의 주인을 죽이고 깃발을 내게 가져와라. 내 저자의 장막과 여인, 가축을 모두 너희에게 하사하겠다!”

전무후무한 포상에 호도로한 곁의 무사들은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그들 앞에 황금국의 대문이 열린 것 같았다. 간드러지고 아리따운 여인, 금색 지붕의 장막, 꿀을 탄 양 젓과 줄지은 소와 양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무모하게 전장에 뛰어든 청양의 주인은 스스로 덫에 기어들어온 진귀한 사냥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평생에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였다. 무사들은 야수 같은 포효로 호도로한에게 응답했다.

호도로한은 제 말 앞을 막고 있던 삭북 기병을 밀쳐내고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이어 정예 무사 수백 명이 칼을 휘두르며 호도로한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들 무리는 빠른 속도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하나같이 칼을 다루는 데 조예가 깊었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용감했다. 그들은 길을 막는 청양 무사들을 신속하게 베어 죽이고 눈보라 속의 구미대독에 접근해갔다. 더 많은 삭북 무사들이 쫓아왔다. 황금으로 장식한 호도로한의 창랑기가 전장에 들어서자 이를 본 삭북 무사들은 전부 늑대가 울부짖듯이 소리치며 호응했다. 수만 명이 늑대 울음소리를 따라했고 전쟁터는 순간 늑대 소굴이 된 것 같았다.

놀란 청양 무사들은 불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늑대 같은 포효 속에서 삭북부의 사기가 유난스럽게 고조되었다. 백중지세였던 국면은 삭북 무사들의 사기가 진작되면서 달라졌다. 청양부 방어선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여수우는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삭북 무사를 물리쳤다. 휙 고개를 돌리자 눈부신 금빛이 보였다. 거대한 창랑기가 펄럭였다. 기를 든 사람이 큰 소리로 웃으며 여수우에게 다가왔다. 눈보라에 시야가 흐릿했다. 여수우는 갑자기 나타난 상대가 누구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물리칠 생각으로 검을 가로 휘둘렀다. 기를 든 자가 미친 듯이 웃으며 제 뒤로 깃발을 던지더니 말안장에서 5척 길이의 거대한 쌍수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을 채찍질해 훌쩍 뛰어오르며 여수우를 향해 그대로 칼을 내리찍었다.

칼과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여수우는 무거운 망치가 자신의 검날을 내리친 듯한 느낌이 들면서 검을 쥘 힘이 없어졌다. 검이 그의 손을 떠나 선회하며 날아가는 순간 여수우는 몸을 비끼며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힘이 실린 칼을 피했다.

황금 창랑기는 뒤에서 쫓아오던 무사가 단번에 잡아챘다. 무사는 창랑기를 흔들어 펼치며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쌍수도를 든 무사가 흉악하게 웃더니 몇 걸음 물러나 여수우를 쳐다보았다. 다 잡은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의 새하얀 이를 혀로 슥 훑었다. 그자는 눈보라 속에서도 상반신을 벌거벗고 있었다. 어깨에는 거대한 한주 지도를 새겼고 삭발한 정수리 중앙에는 황금 용 문양이 있었다. 또 굵은 금 사슬이 갑옷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

여수우는 마주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묵묵히 말안장에서 칼을 뽑았다. 낭봉도였다. 낭봉도야말로 여수우가 진짜 능숙하게 다루는 칼이었다. 여수우도 목려의 제자였다.

양쪽에서 호위 무사들이 제 주인 곁으로 다가와 마주보고 대열을 지었다. 구미대독과 황금 창랑기가 바람 속에서 휘몰아쳤다. 호도로한이 웃으며 말했다.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 네 깃발을 가져야겠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네 장막과 여인은 이미 우리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약속했지.”

여수우가 싸늘하게 호도로한을 쳐다보며 천천히 낭봉도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여수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호도로한도 상대의 눈을 보며 힘껏 쌍수도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상대방이 침묵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젊은 청양 대군은 무능한 자라고 들었는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도로한은 위세를 부려 그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지금 여수우의 눈빛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여수우가 갑자기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그는 낭봉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전력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내 깃발을?”

쌍수도를 들어 낭봉도를 막은 호도로한은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 장막을?”

여수우가 칼을 들어 다시 내리쳤다.

“내 여인을?”

여수우가 포효하며 세 번째로 칼을 내리쳤다.

“좋다!”

여수우가 두 손으로 칼을 쥐고 내리치며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 해라! 단,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연달아 네 번 수비한 호도로한은 마침내 덥석 낭봉도의 칼등을 붙잡아 멈추었다. 그의 좌우에서 양측 호위 무사들이 달려와 일대일로 맞붙었다. 호도로한은 흥분을 느꼈다. 스윽 혀로 이를 훑자 피 맛이 느껴졌다. 호도로한이 여수우에게로 상체를 기울여 압력을 가하며 크게 웃었다.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아주 좋아!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 난 너 같은 사내를 좋아한다! 내 생각이 바뀌었다! 너 같은 사내를 죽이고 네 장막과 여인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이 호도로한의 영예다!”

호도로한은 이를 악다문 채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그 시각, 홀탄산 이남 설원에는 호표기 1만 6천 명이 여전히 대열을 갖춘 채 대기 중이었다. 9왕 여표은 액로 파소이가 커다란 깃발 아래 서서 조용히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9왕의 옆에 말을 세우고 선 반찰렬은 초조함에 얼굴이 온통 벌겠다. 그는 9왕이 제일 먼저 대군을 구하러 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에 모든 기병이 출동한 후에도 9왕은 여전히 대기하라 명령했다.

여수우가 적진으로 돌격했다는 소식에도 9왕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담담히 웃기까지 했다.

“반찰렬, 걱정 마라. 비막간 파소이는 내 조카일 뿐만 아니라 내 주인이다. 대군께서 왕자였을 적에 나는 그에게 충성하기로 결심했지. 북도성이 위급한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9왕은 뒷짐을 지고 눈보라 속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러나 군을 이끄는 통수는 전장을 아주 정확히 판단한다. 내가 보기에 호표기가 출전할 시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하여 대군께서 명령을 내렸어도 나의 호표기는 군마 한 필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9왕께서 바라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내가 ‘청양의 활’이라 불리는 건 너도 알겠지. 활의 본성이 무엇이냐?”

9왕이 미소를 머금고 반찰렬을 쳐다보았다.

반찰렬은 순간 아연해졌다.

“활의 본성은 한방에 적을 죽이는 것이다! 평생 군을 이끌며 내가 전장에 나타날 때는 바로 전쟁이 끝나갈 때다!”

9왕이 힘껏 반찰렬의 군마를 토닥였다.

“그러니 내가 호표기에게 출전을 명령하면 그들의 칼이 온 전장을 씻어낼 것이다. 삭북 사내 6만 명이 죽고 삭북부가 30년간 쌓아온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야.”

9왕이 손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내 공격에 이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9왕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곧 올 것이다!”

“북도성이 머지않았다! 모두 따라붙어라! 대오에서 이탈하지 마라!”

철익이 뒤돌아보며 바람소리보다 더 크게 말하려 애썼다.

그의 뒤로 용혈마 100필과 마바리 100필, 철부도 기병 100명이 있었다. 기병들은 자기 용혈마를 타고 마바리의 말고삐를 잡아당긴 채 눈보라를 맞으며 동료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마바리의 등에는 철부도 갑옷과 투구가 매여 있었다. 이 마바리들도 야생마 혈통이라 우수한 군마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전속력으로 질주해도 결코 경기병보다 느리지 않았다.

철익은 마음이 급했다. 철선강을 건넌 후 남쪽으로 도망온 목민들에게 삭북부의 10만 대군이 북도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초원의 목민들은 입에서 입으로 소식을 전했기에 이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철익은 의심하지 않았다. 삭북부와 청양부 간에는 언젠가 전쟁이 발발할 것이었다. 지난 10년간 매년 봄이면 관례에 따라 귀족들은 군사를 훈련한 공로를 드러내고자 대군에게 연무(演武)를 선보였다. 그리고 매번 모든 사람의 연무를 보고 나면 철진과 철익 형제는 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면 철익은 주로 술을 마셨고 철진은 미간을 구긴 채 홧담배를 피워댔다. 한참이 지나면 철진이 고개를 들고 나직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런 병사로는 삭북을 상대로 이기기 어려워.”

뒤편에서 청흑색 군마 한 마리가 속도를 내 철익에게 다가왔다. 철익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아소륵이었다. 아소륵은 정면으로 바람을 맞지 않으려고 몸을 말안장에 낮게 숙이고 있었다. 얼굴 반이 눈송이에 뒤덮였고 입술은 퍼런빛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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