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87화 (28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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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9)

“날 죽이려는 삭북인들아……. 올 테면 와라!”

여수우가 손을 뒤로 뻗어 제 등 뒤에 있던 무사의 손에서 구미대독을 빼앗아 왔다.

설망의 앞발이 땅에 떨어졌다. 설망은 뒷다리로 냅다 땅을 디디며 앞으로 달려 나가 산비탈을 넘어갔다. 무사 100명이 군도를 뽑아 들고 그 뒤를 쫓았다. 반찰렬은 소규모 기병대가 말 무릎까지 쌓인 눈을 밟고 질주해 내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깃대의 표범 꼬리 9개가 눈먼지 위에서 펄럭였다.

홀탄산 남쪽 1리, 3대 가문의 기병과 호표기 정예병 1만 6천 명이 눈밭에 진을 펼치고 있었다. 존귀한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차를 마실 경황이 없었다. 그는 말고삐를 쥔 손을 연신 쥐었다 놓았다 했으며 이따금 코담배를 흡입해 심신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검은 옷을 입은 척후가 빠른 속도로 진영에 질주해 들어와 합로정 가문 가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방의 급보입니다! 삭북부가 이미 빙하에 다리를 세웠습니다. 강 서쪽의 기병 2만이 전속력으로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전장에선 누가 우세하지?”

척후는 살짝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혼전 중이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군의 사상자가 막심합니다.”

“다시 알아봐라!”

합로정 가문의 가주가 손을 내둘렀다.

앞의 척후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또 한 명의 척후가 질주해 왔다.

“전방의 급보입니다! 목해양 장군의 부대가 새로 강을 건넌 삭북부 대군을 막지 못하고 귀궁의 엄호 아래 철수해 철진 장군의 부대와 회합하고 있습니다.”

“철진의 군대는 몇이나 남았느냐? 목해양 쪽은 몇이나 남았지?”

합로정 가문 가주가 다급히 물었다.

“전군이 갈라졌습니다. 철진 장군도 흩어진 기병을 다시 모으고 있고요. 사상자 수는 모르나 심각한 상황입니다.”

“다시 알아봐라!”

합로정 가문 가주가 또 손을 내둘렀다.

100명에 달하는 검은 옷을 입은 척후가 분주하게 전장과 본진 사이를 오갔다. 거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방의 소식을 합로정 가문 가주에게 보고했다. 벌써 척후 몇 명은 극도로 지쳐 본진으로 돌아오자마자 눈밭에 쓰러졌고 채찍으로 때려도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합로정 가문 가주는 척후가 물어오는 소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여전히 전장의 형세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오만한 귀족은 전장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 청양부는 이미 기병 2만여 명과 목려의 ‘패알륵’ 및 대군의 친위 부대인 ‘귀궁’까지 투입했다. 청양은 이미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 실패하면 세력에 큰 손실을 입을 게 자명했다. 합로정 가문의 기병은 신예 부대로 지금 전장에 투입하면 청양이 승리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6만 명의 삭북 기병을 상대로는 그가 보낸 기병도 목려, 철진과 함께 매장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버지, 출전하지 않으십니까? 삭북 놈들이 전부 강을 건너기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합로정 가문 가주의 아들이 진영 뒤편에서 달려왔다. 그의 이름은 액일돈달뢰 합로정, 듬직하고 용맹한 청년으로 합로정 가문 가주의 맏이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다.

“지금 출전하면 공로는 모두 목려와 철진의 것이 된다. 그럼 우린 뭐가 되겠느냐?”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게다가 그들과 함께 전멸할 수도 있다. 삭북부의 6만 기병을 얕봐서는 안 돼.”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전방에서 사투를 벌이는데 우리는 뒤에서 구경만 합니까?”

액일돈달뢰는 제 아버지보다 더 초조해했다.

“초원의 사내대장부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른들 일에 어디 애들이 끼어드느냐!”

합로정 가문 가주가 버럭 화를 냈다.

“장가도 들었습니다. 이제 어른이에요! 이대로 북도성에 돌아가면 청양부에서는 말 못하는 아이들을 빼고 모두가 우리 등에 대고 욕을 할 겁니다!”

액일돈달뢰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네 이놈!”

합로정 가문의 가주가 분노해 채찍을 들었다. 하마터면 철없는 아들을 후려칠 뻔했다.

액일돈달뢰는 한 마리 고집 센 소처럼 아버지의 채찍 앞에 굳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후.”

합로정 가문 가주는 총애하는 아들을 차마 때릴 수 없었다. 높이 들어 올렸던 채찍을 힘없이 내려놓고 아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액일돈달뢰, 벌써 다 커서 초원의 사내대장부다운 용기를 배웠구나. 하지만 초원에는 아직 네가 모르는 일이 아주 많다.”

액일돈달뢰는 순간 멍해졌다.

합로정 가문 가주는 채찍을 휘둘러 전방을 가리켰다.

“너는 삭북부가 네 적이라는 것만 알고 그들의 목을 베지 못해 안달이지. 그러나 내 눈에 삭북부는 우리 청양부와 세력이 비등한 초원의 큰 부락이다. 사실 삭북부는 청양에 굴복할 이유가 없었다. 수십 년 전 여숭에게 패해 청양부를 초원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북쪽으로 돌아가야만 했지. 이제 여숭이 죽었으니 삭북부는 우리와 초원의 세력을 나누려는 것이다. 이해 못할 것도 없지.”

“그럼 다시 물리치면 되잖습니까!”

액일돈달뢰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합로정 가문 가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들아, 초원에서는 아무도 청양부만이 북도성의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청양의 선조 여청양 의마덕 파소이는 손왕을 배신하고 그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초원에서는 가장 교활한 여우와 가장 흉악한 늑대만이 사냥감을 얻을 수 있다. 북도성은 사냥감이다. 힘이 있다면 누구든 빼앗을 수 있다.”

액일돈달뢰는 멍하니 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청양인이잖아요! 삭북의 늙은 늑대가 활개치는 꼴을 어떻게 두고 봅니까?”

“너는 청양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합로정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야! 명심해라! 네가 전장에 목숨을 갖다 바치면 우리 가문에서 누가 내 뒤를 잇겠느냐?”

합로정 가문 가주가 아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청양과 삭북은 실력이 비등하다. 우리의 사투는 양측에 다 좋을 게 없어. 쌍방의 세력이 모두 약화되면 다른 부락이 그 틈에 쳐들어올 게다. 삭북인은 이번에 그들이 원래 가졌어야 할 것을 찾으러 왔을 뿐이니 대화로 풀 수 있었다. 줘야할 것을 내주면 그들은 자연히 철수했을 것이야. 하지만 목려 이 늙은 노예가 출전해야 한다 고집을 부리고 대군 또한 이를 지지했지. 이번 전쟁을 치르고 나면 누염과 다시 협상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패하면 누염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내주어야 해. 호기 부리며 용맹하게 싸울 줄밖에 모르는 목려야말로 청양부를 사지로 떠미는 자다!”

합로정 가문 가주가 손을 내저으며 아들의 말을 막았다.

“청양부의 수십 년 영광이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두가 죽을 필요는 없지!”

“주상! 탈극륵, 알적근 가문의 기병이 움직입니다!”

옆에 있던 친위 무사 하나가 우측을 가리키며 놀라 소리쳤다.

합로정 가문 가주는 흠칫 놀랐다. 냅다 말을 몰아 한 걸음 나간 그는 우측의 망망한 눈속을 보았다. 눈보라 속에서 어렴풋이 기병 대대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대략 만 명 이상이 행장을 갖추고 말에 올라탔다. 바람을 타고 군도를 뽑는 소리와 군마가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함성을 내지르자 아래로 떨어져 있던 깃발이 높이 펄럭였다. 선봉의 수천 명이 군마를 몰아 가볍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방대한 규모의 이 군대는 탈극륵 가문의 기병이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태납륵강이었다.

더 멀리서 알적근 가문의 기병 대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선의 검은색 기병이 빠른 속도로 본대를 떠나 곧장 눈보라 속을 뚫고 들어갔다. 합로정 가문 가주는 그들이 알적근 가문의 정예병 중의 정예병임을 짐작했다. 수백 명에 불과한 ‘백문호’였다. 알적근 가문 가주의 지시만을 따르는 기병대였다.

“탈극륵과 알적근 가문의 늙은 여우 두 마리도 더 버티지 못하고 공을 가로채러 가려는 것인가?”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몹시 놀랐다.

북도성을 떠나기 전 3 대 귀족 가문의 가주들은 밀약을 맺었다. ‘패알륵’과 다른 군대가 전장을 통제하기 전에는 자신들의 귀한 기병대를 경솔하게 전장에 투입하지 말자고 말이다. 반드시 세 가문이 함께 움직일 것이며 삭북군을 완벽히 섬멸하고 최대의 전공을 차지할 자신이 있을 때 진격하기로 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자신의 두 벗을 잘 알았다. 그들은 액일돈달뢰처럼 혈기왕성한 청년이 아니므로 절대 무턱대고 뛰어드는 실수를 할 리 없었다.

설원 전체가 진동했다. 탈극륵과 알적근 가문의 기병 2만 여 명이 선봉대를 따라 진격을 개시했다. 무사들은 군마를 채찍질해 속도를 높였다. 가장 빠른 속도로 정면 돌격 하려는 모양이었다.

“미쳤구나! 미쳤어!”

합로정 가문 가주가 고함을 쳤다.

“척후! 척후를 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봐라!”

붉은색 군마 한 마리가 우측에서 빠르게 접근해 왔다. 합로정 가문의 기병이 나아가 막으려는데 말에 탄 무사가 면전에 대고 채찍을 휘둘렀다.

“대군 휘하의 반찰렬이다! 나를 막는 자, 모두 죽는다!”

말 등에서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반찰렬?”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깜짝 놀라 제 옷깃을 매만졌다. 대군의 심복인 반찰렬은 금장궁에서도 지위가 특별했다. 극도로 긴요한 일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직접 걸음할 리 없었다. 합로정 가문 가주는 긴장한 채 생각했다.

대군이 명령을 내려 탈극륵과 알적근 가문의 기병이 출정을 미루지 못한 것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군의 명령이라 해도 늙은 여우 둘이 저리 다급하게 쫓아갈 리 없었다.

반찰렬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합로정 가문 가주 앞에 섰다. 그는 가주를 똑바로 응시한 채 말했다.

“반달 천신의 사자이자 초원의 대군인 청양의 주인께서 내게 항명할 수 없는 명령을 전하라 하셨소! 대군께서 이미 기병 100명을 이끌고 친히 전장에 지원을 나가셨소. 아주 위급한 상황이니 청양의 모든 무사는 마땅히 군마를 달려 대군을 구하러 가야 할 것이오! 항명하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하겠소!”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놀라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대군이 직접 전장에 나가셨다? 잘못 안 것 아닌가? 증명할 수 있는 친서가 있는가?”

반찰렬이 고개를 돌려 목덜미 쪽, 아직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손자국을 드러냈다.

“대군께서 내 얼굴에 손자국을 남기셨소. 내가 대군을 막았기 때문이오. 이것이 대군의 친서요!”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액일돈달뢰가 말을 몰아 제 아비 곁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다급함에 얼굴이 시뻘겠다.

“아버지, 어서 진군하라 명령을 내리십시오! 대군이 위험합니다!”

“젠장! 젠장! 젠장!”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격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빌어먹을! 진군하라! 진군하라! 진군하라!”

합로정 가문 가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군 말에 올라 진격한다!”

액일돈달뢰는 제 아버지가 이리 격노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해 순간 넋이 나갔다.

“왜 멍하니 그러고 있어!”

합로정 가문 가주의 채찍이 끝내 제 아들의 머리를 쳤다.

“진군하라지 않느냐! 귓구멍이 막힌 게야!”

기병대 전체가 깨어난 야수처럼 말에 올라 장도를 뽑아 들었다. 준마가 울부짖고 커다란 깃발이 펄럭였다. 합로정 가문 가주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뜨고 눈보라에 가려진 서쪽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뭘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또한 탈극륵과 알적근 가문 가주들이 왜 자신과 상의도 없이 전속력으로 대군을 구하러 출병했는지도 알았다.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의 생사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청양의 주인이 전장에서 죽으면 삭북부는 여수우의 머리를 들고 전력으로 북도성을 공격해올 것이다. 그럼 사기가 무너지고 북도성은 함락될 터였다. 그리 되면 귀족들에게도 삭북부와 협상할 기회가 사라졌다. 누염은 제일 비천한 노예를 대하듯 귀족들을 대할 것이었다.

“여수우……. 제법이군! 제 아비 같은 독기가 있어!”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속으로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아주 잘났구나!”

합로정 가문 가주는 자신이 이 젊은 대군을 얕보았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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