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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8)
‘패알륵’으로 조직된 철부도는 그 일전에서 거의 다 전사했다. 산진으로 쳐들어간 ‘패알륵’은 동륙 무사들에 포위된 채 사살되었다. 분노한 동륙 무사들은 노예 무사들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큰 전쟁이 끝나고 피비린내가 넘쳐흐르는 초원에 마지막 ‘패알륵’ 한 명이 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동료들의 시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만족인 수만 명이 죽다 살아난 노예 무사를 보았다. 그해 열일곱이던 흠달한왕은 화살에 부상을 입은 다리를 끌고 시체를 밟으며 혼자 수백 보를 걸어서 살아남은 노예 무사의 곁으로 갔다. 그는 초원 한가운데 서서,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최후의 ‘패알륵’의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외쳤다.
“오늘부터 그는 내 형제다!”
그때부터 청양부에는 쭉 ‘패알륵’ 제도가 있어왔다. 대군의 측근이 각 가문의 노예 중에서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이들을 선발했고 가장 엄격한 훈련을 거쳐 그들에게 칼을 쥘 권력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예였다. 자유가 없고 코에는 주인의 이름을 새긴 쇠고리를 걸었다.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만큼 전공이 쌓여야 이 쇠고리를 뗄 수 있었다.
이 노예 무사들에게 전투는 전부였다. 자유를 얻기 위해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전투력은 란마부의 ‘란마’들과 병칭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패알륵’ 한 명이 무장한 정예 무사 다섯을 막을 수 있다고.
그러나 흠달한왕 이후, ‘패알륵’ 제도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흠달한왕 이후로 청양부에는 오랫동안 전쟁이 없어 사나운 노예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 군대의 인원은 점점 줄어들었고 종국에는 귀족들이 ‘패알륵’으로 훈련시킬 청장년 노예를 대군에게 내놓지 않았다. 하여 이 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호도로한은 누염을 보았다. 누염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소식을 듣고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세자, 전군(前軍)의 손실이 막대합니다. 속히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지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태납륵강 동쪽 기슭의 진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척후가 초조하게 말했다.
호도로한은 눈밭을 천천히 거닐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전방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는 태납륵강 주변 지형에 익숙했다. 심지어 빙판 두께도 알았다. 호도로한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데설궂지 않고 매우 치밀하게 사고했다. 그는 일찌감치 양측의 첫 전투가 태납륵강 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짐작대로 일어났다. 단지 ‘패알륵’ 군대라는 변수 하나가 늘어났을 뿐인데 그의 계획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호도로한은 결심을 내리고 성큼성큼 누염 곁으로 걸어갔다.
“아버지, 태납륵강 맞은편 기슭의 진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목려의 ‘패알륵’은 인원이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퇴각하면 청양의 기병 대대가 추격해와 기습하겠지요. 즉각 지원군을 보내 목려의 ‘패알륵’을 섬멸해야 청양의 투지를 철저하게 꺾을 수 있습니다.”
누염은 호도로한의 말을 못 들은 듯 마지막 철패를 쇠밧줄에 걸고 밧줄의 양 끝을 묶어 매듭을 지었다. 누염은 수십 근에 달하는 철패를 허리에 걸더니 또, 땅에서 납작한 구리함을 주워 들었다. 구리함 안에는 암홍색 선향(線香)1)이 세 개 들어 있었다. 구리함을 여는 순간 은은한 향이 싸늘한 공기 중에 자욱이 퍼졌다. 호도로한이 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비싼 값을 주고 동륙 행상에게 구매한 향이었다. 장문승이 손수 만든 유명한 향, ‘견홍침수(堅紅沈水)’는 아무나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고 동륙인은 이 향이 망자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누염은 부시를 비벼 부싯깃에 불을 지핀 뒤, 부싯깃으로 선향 하나하나에 불을 붙였다. 매 걸음이 극도로 차분하고 진중했다. 교의를 경건하게 믿는 동륙의 승려처럼 마지막에는 선향을 두 개의 해골탑 가운데에 꽂았다. 선향 연기 세 가닥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공중에 퍼졌다. 누염은 그 연기를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했다.
호도로한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행했다.
“명령을 내리시지 않을 거라면, 제가 삭북부를 위해 공훈을 세울 수 있도록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게 해주십시오!”
호도로한은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주위에 손짓했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삭북부 기병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로 하나같이 100명의 기병을 이끄는 백부장이었다. 호도로한은 그의 진짜 기병 대대를 2리 밖에 주둔시켰는데 불화랄은 그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호도로한이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화려한 전포를 가슴에 잘 묶고 소맷부리는 매듭을 지었다.
호도로한이 동쪽을 보며 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전군 출발!”
“참으로 사람을 교란시키는군!”
호도로한이 제 아버지의 곁을 지나가던 순간 노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호도로한의 대대가 눈먼지를 밟고 멀어져갔다. 말발굽 소리가 사라지고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이 시선을 들었다. 누염의 눈은 은은한 갈홍색을 띠었다. 피가 스며든 것처럼 끔찍하면서도 차분하고 덤덤했다. 누염은 철패 묶음을 허리춤에 두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근 1천 개에 달하는 철패가 부딪치며 불안감을 조장하는 소리가 났다.
누염이 멈춰 서더니 웅크려 앉았다. 거무스레하고 앙상하며 커다란 손이 쌓인 눈을 헤쳤다. 눈 아래에는 커다란 청동 월 한 자루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월은 청흑색이었다. 몸통에는 신비한 짐승 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무늬는 녹이 슬어 얼룩덜룩했다. 칼날만 새로 갈아낸 듯 음산하고 차가운 빛을 띠었다. 5척 길이의 철목 손잡이는 궁륭형으로 구부러졌고 두께는 누염이 잡기에 딱 알맞았다.
누염은 월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염은 뒤돌아 해골탑을 보며 허리춤의 철패를 툭툭 쳤다.
“용사들이여, 전장의 소리가 들리는가?”
대답은 없었다. 그저 차디찬 철패만이 챙챙 울릴 뿐이었다. 누염은 살며시 입을 벌렸다. 구불구불 엉킨 수염이 표정을 가렸지만 비싯 웃은 듯했다. 누염은 고개를 돌리고 월 자루의 끝을 끌며 아득한 눈보라 속으로 걸어갔다. 월이 끌리며 눈밭에 기다란 흔적을 남겼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에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이 젖혀졌다.
누염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점차 그는 맹수처럼, 건장한 말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누염은 온 세상을 품에 안을 듯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눈보라를 들이마시며 커다란 월을 들고 야수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숲속에서 누염과 거의 같은 포효가 들려왔다. 더 우렁차고 더 처절한 소리로 그에게 호응하고 있었다. 흰색 형상들이 숲속을 내달렸다. 그들은 수십 보 거리를 두고 누염의 좌우에서 따라왔다. 처음에는 몇 마리였는데 나중에는 수십, 수백 마리가 되었다. 포효성이 한데 모이자 주위 고목(枯木)에 쌓인 눈이 사락사락 떨어졌다.
적막한 천지에 폭설이 세차게 퍼부었다.
검은색 군마 한 필이 홀탄산 정상에 올랐다. 척후가 말에서 내려 여수우의 말 뒤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대군께 아룁니다. 전방이 고전 중입니다! 목려 장군의 노예 무사 3천과 귀궁 1천, 막속이 가문 철진 장군의 기병 1만이 벌써 회합했습니다. 아군과 적군의 병력이 엇비슷합니다. 목해양 장군의 기병 1만 2천 명이 급히 지원을 갔지만 적군의 지원병은 3만에 달합니다. 대규모 인원이 강을 건너면서 동시에 빙판에 다리도 설치하고 있습니다!”
여수우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삭북부 주력 부대의 동정은 어떠하냐?”
“백랑단의 출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흰머리독수리가 내내 부근에서 선회하고 있습니다. 백랑단 외에 삭북부 주력 군대도 전부 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총 6만 기병을 지휘하는 자는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입니다. 우리 척후가 멀리서 그의 깃발을 보았습니다.”
“반찰렬, 너는 내 심복 중에서 가장 영리하지. 사상자가 막심한 1만 4천 명과 목해양의 기병 1만 2천 명이 삭북부 기병 6만 명을 상대로 승산이 얼마나 되겠느냐?”
여수우가 반찰렬을 돌아보며 물었다.
“승산이 없습니다. 반드시 나머지 기병을 독촉해 출전시켜야 합니다. 3 대 가문의 가주가 북도성에 큰 재난이 닥친 상황에도 자기 세력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목을 베셔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서도 대군에 오른 초기에 누염을 상대하셨지. 3 대 가문이 식솔과 무사를 데리고 북도성을 떠났으나 그들을 독촉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1만 2천 명으로 누염과 북도성 안에서 사투를 벌이셨다. 그해 아버지께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은 지금의 나도 할 수 없다.”
여수우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무엇입니까?”
반찰렬은 순간 놀라 멍해졌다.
여수우가 말안장에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지금 나는 이 100명을 이끌고 산비탈을 내려갈 것이다. 곧 우리는 전장에 진입해 말을 탄 삭북인 수만 명을 상대할 것이다. 너는 가서 모든 귀족에게 전해라. 청양 대군이 이미 전장으로 돌진했다고! 모든 귀족은 ‘반역’의 죄명을 쓰고 싶지 않다면 나를 따라 돌격하라 해라!”
“주상!”
반찰렬은 다급한 마음에 예를 차릴 겨를도 없이 다가가 두 팔을 벌리고 여수우의 말 앞을 막아섰다.
“충동적으로 굴지 마십시오!”
여수우가 반찰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수우의 눈빛은 침착하고 단호했다. 갑자기 여수우가 손을 들어 우렁찬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반찰렬의 얼굴을 후려쳤다.
넋이 나간 반찰렬은 말고삐를 잡아당겨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홧홧거리는 뺨을 움켜잡고 멍하니 여수우를 쳐다보았다.
여수우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반찰렬, 네 눈에는 너의 주상이 그리 나약해 보이느냐? 손자국이 난 얼굴 그대로 가서 귀족들에게 보여주고 전해라. 내 앞을 막지 말라고!”
“주상…….”
반찰렬은 멍하니 여수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아래에는 삭북인이 수만 명입니다!”
여수우가 휙 중검을 휘둘렀다. 그는 눈보라를 마주한 채 대지를 굽어보며 설망의 말고삐를 바짝 잡아당겼다.
“반찰렬, 내 금장궁에서 말했었지. 이번에 삭북 흰 늑대의 뼈를 북도성 성벽 아래 묻히게 할 것이라고. 그저 말뿐인 결심으로 들렸느냐? 나는 아버지께서 지목하신 신임 대군이다. 내 결심을 청양부에 보여줄 이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여수우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아버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저를 선택한 아버지 최후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요!”
여수우는 설망의 말고삐를 휙 흔들어 말의 목을 쳤다. 극서의 준마, 설망이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어올렸다. 여수우는 몸을 곧게 세우고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여수우의 등 뒤에서 무사 하나가 청양부의 표범 깃발을 펼쳤다. 깃발의 표범은 바람 속에서 다시 살아난 듯, 청색 눈동자에 흉악한 빛이 번득였다. 깃대 꼭대기에는 얼룩덜룩한 표범 꼬리 9개가 매여 있었다.
“구미대독(九尾大纛)……. 주상, 목숨을 걸지는 마십시오!”
반찰렬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깃발은 구미대독이었다. 초원의 대군만 사용할 수 있는 깃발로 아주 오래 전 초원의 영웅 손왕이 그의 깃대에 백마 9필의 꼬리를 묶으면서 ‘구미대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깃발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대군이 행차하는 터라 100리 내외의 목민은 모두 초원의 주인을 알현하러 왔다.
여수우가 구미대독을 내보이는 것은 그를 죽이려는 삭북인 수만 명에게 청양의 대군이 이 전장에 있다고 알리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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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료 가루를 가늘고 긴 선 모양으로 만들어 풀로 굳힌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