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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7)
“죽어라, 이 짐승 새끼!”
불화랄은 몹시도 흉악하게 포효했다.
투창이 연신 오르락내리락하며 비린내 짙은 피가 마구 튀었다. 전추는 구슬프게 울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전추의 등에 엎드린 불화랄은 모우의 등에서 정신없이 피를 빨아들이는 분노한 소등에 같았다. 소등에가 날카롭고 가느다란 입으로 이 거대한 모우를 죽였다. 불화랄은 이미 팔에 감각이 없었지만 쉬지 않고 놈을 찔러댔다. 투창을 쥔 팔은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투창의 일부분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전추의 몸이 기울었다. 방심하고 있던 불화랄은 균형을 잃었다. 그는 다시 뭘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전추와 함께 쌓인 눈 속에 굴러 떨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말 한 마리가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말 등에 탄 사람이 허리를 굽혀 그를 말안장으로 집어 올렸다.
“전추는…….”
불화랄은 그제야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그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았다. 그는 목려였다. 불화랄은 지금 투골룡의 등에 타고 있었다.
“죽었네.”
목려가 말하며 고개를 돌려 불화랄을 흘긋 보았다.
이어 목려가 사방에 대고 소리쳤다.
“흩어져라! 흩어져! 기병 대대가 곧 올 것이다!”
“막속이 가문의 기병 대대입니까? 그들이 도착했습니까?”
불화랄 물으면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눈밭에 전추의 거대한 시체가 작은 산처럼 누워 있었다. 불화랄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저 거대한 맹수를 죽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방금 전 모든 상황이 꿈만 같았고 머릿속에는 놈의 피비린내만이 둥둥 떠다녔다.
“자네 같은 귀족은 처음 보는군.”
“저는 그냥 사냥꾼입니다.”
불화랄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불화랄은 전추를 죽이면서 하도 소리를 질러대 목이 완전히 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귀족 중에서 철진 파혁 막속이와 자네를 믿네!”
목려가 말했다.
뒤편에서 쇠발굽 소리가 광풍처럼 다가왔다. 불화랄이 고개를 돌렸다. 막속이 가문의 철기병 선봉대가 고속으로 질주하며 하늘에 대고 화살을 쏟아 부었다. 맞은편의 삭북 기병들도 동시에 사정거리에 들어와 화살을 퍼부었다. 양측의 화살은 허공에서 맞부딪칠 만큼 빽빽하게 쏟아졌다. 초원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처참한 기병 돌격전이었다. 사내의 영예는 이처럼 군마를 달려 적이 퍼부어대는 화살 비 속을 당당하게 질주하는 것이었다.
한 차례 화살 세례를 퍼부은 기병들은 일제히 말안장의 칼을 뽑아 들었다. 칼 소리는 살을 에듯 날카롭고 교전 소리는 구름을 꿰뚫을 듯 드높았다. 매복전은 이제 끝이 났고 양측의 주력 기병대가 전장을 완전히 이어받았다.
태납륵강 서쪽, 설곡(雪谷) 한가운데에서 누염이 마지막 해골 한 구를 해골 탑 꼭대기에 놓았다. 누염의 좌우로 각각 연홍색 해골 탑이 자리했다. 천 개가 넘는 해골은 시커먼 눈두덩을 부릅뜨고 누염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손은 쉬지 않았다. 묵묵히 철패를 쇠사슬에서 하나하나 떼어낸 뒤 철사를 꼬아 만든 가느다란 줄로 한데 엮었다.
‘황금왕’ 호도로한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제 아버지를 도울 의사가 전혀 없었다. 모든 철패를 깨끗이 닦고 3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늑대 기병들의 이름을 묵독하는 일은 누염이 반드시 직접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호도로한은 약간 초조해졌다. 기병 대대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다. 속도를 고려해 계산해 보면 선봉대는 이미 태납륵강을 건너 청양부와 접전을 치르고 있어야 했다. 호도로한은 도망친 척후가 겨우 정보나 캐러 온 것이 아니라 그의 군대를 포위망에 끌어들이기 위해 온 것임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도로한은 자기 군대가 이 포위망에 들어가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보낸 척후도 태납륵강 동쪽 기슭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큰 기병 대대가 출몰하지 않았다. 청양부에서 배치한 매복 인원도 수천 명 남짓으로 만 명을 넘지 않았다. 소규모 매복병쯤은 호도로한의 3만 기병으로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호도로한은 은근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지시가 없었기에 그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누염이 없을 때는 삭북부의 10만 용사가 모두 호도로한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진정한 늑대왕은 그가 아니었다. 누염이 돌아온 지금, 이 노인은 간단한 눈짓만으로 모든 용사들을 굴복시키며 그의 아래 무릎 꿇게 했다. 30년이 지났음에도 주인으로서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호도로한도 제 아버지를 깊이 경외했다.
호도로한의 경외심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살육의 권능을 장악한 영웅에게 갖는 경외심이었다.
호도로한은 서른다섯이 되어서도 제 아버지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했다. 고독한 용기인지, 깊이 잠든 마귀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청색 준마가 호도로한에게로 질주해 왔다. 삭북 무사가 말안장에서 굴러 내려와 누염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한바탕 전력 질주 후 준마는 연신 울부짖으며 진정하지 못했고 전신에서는 땀이 나 허연 김을 뿜어댔다.
“전쟁이 시작되었느냐?”
호도로한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가 척후의 멱살을 붙잡고 물었다.
“전군(前軍)이 고전 중입니다! 강을 건넌 기병 2만 명이 청양부의 매복에 당했습니다. 피해가 막심합니다!”
척후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적군을 지휘하는 자가 누구냐? 호표기냐?”
호도로한이 나직이 소리쳤다. 앞선 질문은 절실하게 답을 알고 싶은 물음이었지만, 두 번째 질문은 답이 필요 없었다. 북도성에서 호도로한의 기병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는 호표기뿐이었다. 청양부는 초원을 주름잡는 이 철기병을 등에 업고 있었다. 지금 호도로한은 상대방 통수가 청양의 신궁, 여표은 액로 파소이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속이 불에 타들어가는 듯한 불쾌감이 치밀었다. 10년을 훈련시킨 기병인데 여전히 호표기에 패배했다.
“통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 호표기는 아니고 보병이었습니다. 눈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우리 기병이 지나갈 때 뛰어올라 군마를 베어 죽였습니다. 선봉의 군마가 삽시간에 수백 필이 죽었습니다.”
“보병?”
호도로한은 척후의 멱살을 잡은 손을 더욱 꽉 오므렸다.
“몇이나 되느냐? 왜 짓밟고 지나가지 않은 것인데?”
호도로한은 믿기지가 않았다. 그 역시도 말 등에서 자란 만족 사내인지라 군마가 돌격할 때의 무시무시한 속도와 힘을 잘 알았다. 돌격하기 시작한 군마는 야수였다. 사람의 몸뚱이로 막을 수 없었다. 감히 말의 돌격을 막으려는 자는 쇠발굽 수만 개가 밀물처럼 세차게 밀려와 진흙으로 뭉개버릴 것이었다. 만족 기병이 진정으로 적수를 맞닥뜨렸던 건 70년 전 풍염 황제가 상차위(廂車衛)를 이끌고 왔을 때였다. 당시 동륙인들은 철갑으로 둘러싼 전차를 긴 진영으로 이어 사나운 말로 돌진하는 만족 전술을 끝장내 버렸다.
그러나 척후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 척후는 호도로한의 최정예 부하 중 하나로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대략 3~4천 명 됩니다. 저들이 몸을 숨긴 장소가 전부 움푹 팬 지대라 군마가 가로막혔습니다. 억지로 밟고 지나가려고도 해보았지만 많은 군마가 발을 접질리고 말았습니다. 상해를 입은 말이 벌써 2천 필이 넘습니다. 후방의 돌격대도 말 시체에 가로막혔고요.”
“3~4천 명?”
호도로한은 마음속에서 으스스한 한기가 솟구쳤다.
“왜 말에서 내려 도보전을 하지 않았지?”
“말에서 내린 이들은 모이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포위되어 죽었습니다. 반격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전추는? 전추를 풀어 놈들을 밟았어야지!”
“전추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호도로한은 척후를 거의 들어 올릴 정도로 그의 멱살을 꽉 붙잡았다. 척후를 한입에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분노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더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삭북부 군대로 거침없이 북도성을 평정하려 했는데 첫 전투에서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맞닥뜨렸다. 모든 물음이 우습게 느껴졌다. 마음속 분노를 터뜨린다면 초원의 눈을 전부 녹여버릴 수도 있을 테지만 지금의 호도로한은 속수무책이었다.
“‘패알륵’이다. 군을 지휘하는 자는 목려다.”
누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했다.
“역시 목려였군요! 이 늙은 개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호도로한은 천천히 혀로 이를 훑었다. 얼굴에 한 가닥 흉악한 살기가 어렸다.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패알륵’이라는 이름을 듣자 호도로한의 마음속 깊숙이 두려움으로 인한 전율이 스쳤다.
‘패알륵.’ 이 군대가 아직도 존재했다!
‘패알륵’은 만족 고어로 ‘노예’라는 뜻이며 나중에는 ‘노예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초원에서 보통 귀족과 평민만 무사가 되어 패도(佩刀)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노예는 전쟁터에 끌려나가도 ‘무사’라 불릴 수 없었으며 주인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70년 전 동륙의 풍염 황제가 침입했을 때 만족 병력은 풍염 철려의 3할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당시 대군이었던 납과이굉가는 어머니의 지시 아래 손왕 때 기원했다고 하는 ‘패알륵’ 제도를 부활시키고 노예를 대거 징집해 무사를 만들었다. 모든 노예 무사는 전공(戰功)을 세우면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되찾을 권리를 가졌다. 그들 중에 공이 지대한 자는 귀족 직함을 받기도 했고 나아가 토지와 가축, 노비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 제도에 모든 귀족이 동요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의 고귀한 혈통과 성씨가 더 이상 권력의 세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비천하고 더러운 노예 새끼도 전공을 세우면 그들과 똑같이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흠달한왕에게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흠달한왕은 초원의 구세주였고 반달 천신이 보낸 사자였다. 소년 흠달한왕의 강경한 통치 아래 ‘패알륵’으로 구성된 철부도 기병이 신속하게 조직되었다.
패알륵이 동륙 산진에 맞설 때 초원의 모든 이가 경악했다. 적인 동륙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뒤의 만족 무사들도 놀랐다. 동륙의 산진 중갑 장창이 방어진을 치자 초원에 갑자기 쇠가시 숲이 나타난 것 같았다. 산진은 만족 기병 전체의 악몽이었다. 그러나 노예 기병은 철부도 갑옷의 힘을 빌려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강제로 산진의 중심부를 헤집었다. 강철 대 강철의 충돌이었다. 눈이 가려진 용혈마는 무거운 철갑과 노예들의 몸뚱이를 태우고 한 차례, 또 한 차례 산진으로 돌격했다. 1천 근이 넘는 중량이 돌격의 힘을 실은 채 산진 쇠가시에 부딪쳤다. 가슴이 꿰뚫리는 순간 그들은 전력을 다해 방패 틈으로 산진 창병을 찔렀다. 동륙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돌격에 압도되었다. 산진 창병이 방패 벽을 정비할 새도 없이 다음 돌격이 재차 밀려왔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시체를 매단 창으로 막았다. 피비린내 가득한 광경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연이은 돌격에 산진 창병의 사기는 무너졌고 마침내 철부도 기병 하나가 방패를 뚫고 틈을 벌렸다. 그 노예 무사는 가슴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방패수 한 명을 붙잡은 채 수갑의 짧은 날로 그자의 목을 그었다. 벌어진 틈은 산진 창병을 지옥으로 끌어들였다. 마지막 철부도 기병이 그 틈으로 쳐들어와 무력한 산진 중심부에서 살육을 벌였다. 방어가 무너진 동륙인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전쟁터에 뛰어들어 만족 군대와 육탄전을 벌였다. 이어 만족 경기병이 우르르 달려들며 백전백승의 풍염 황제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