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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6)
전추가 앞으로 몸을 던졌다. 전신의 중량을 실어 두 앞발로 냅다 땅을 디뎠다. 콧구멍에서는 하얀 김이 기둥처럼 뿜어져 나왔다. 한 차례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지면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수십 보 내에 쌓인 눈이 대거 날아오르며 전추도 눈먼지에 가려졌다. 목려의 대오도 즉시 눈에 파묻혔다. 전추 곁에 있던 몇몇은 눈앞에서 눈사태가 일어난 것 같았다. 가장 밖에 있던 노예 무사 한 명은 말에서 떨어졌고 건장한 군마는 진동에 날아갔다가 비스듬히 떨어지며 다리뼈가 부러졌다. 전추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이 받은 충격은 더 클 것이었다. 전추는 눈구덩이에서 쓴 전술을 다시금 사용했다. 눈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놈은 뛰어오르며 네 다리로 주위를 빠르게 짓밟았다.
“나를 따르라!”
불화랄이 크게 외치며 귀궁 20명을 이끌고 전추에게로 돌진했다.
전추의 몸이 갑자기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힘차게 뛰어오르던 놈은 무언가에 제동이 걸린 듯, 못마땅해 우짖기 시작했다. 눈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아래 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말에서 떨어진 노예 무사들이었다. 이들 중 7명이 요행히 살아남아 전추 몸에 늘어져 있던 쇠사슬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삭북 무사들은 이 쇠사슬로 전추를 통제했었다. 노예 무사들은 힘을 합쳐 전추를 제자리에 붙잡아두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은 언제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전추는 광적으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위험한 뿔은 노예 무사들을 치받지는 못했다. 쇠사슬의 길이도 다 계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소한 인영 하나가 홀연히 전추 앞의 눈밭에서 뛰어올랐다. 그는 투창 하나를 들고 눈밭을 미친 듯이 달려 전추의 정면으로 다가왔다. 목려였다. 목려는 전추의 뾰족한 뿔로 달려들었다. 전추는 바로 고개를 숙여 적에게 맞섰다. 목려는 투창을 던지지 않고 뿔 아래로 몸을 구르더니 재빨리 전추의 배 아래로 이동했다. 전추의 복부는 털로 뒤덮여 있었다. 거대한 검은색 덩굴처럼 길이가 십 수 척에 달하는 털이 눈밭까지 늘어져 있었다. 목려의 인영은 이내 털에 가려졌다. 전추는 고개를 숙이고 제 배 아래쪽을 보았다. 갑자기 놈이 한 차례 길게 울부짖더니 온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노예 무사 7명은 쇠사슬을 놓치고 눈 속을 굴렀다. 전추가 고개를 쳐들었다. 긴 뿔이 하늘을 향했다. 불화랄은 그제야 놈의 왼쪽 눈을 관통한 투창을 발견했다. 투창의 거의 절반이 눈동자에 깊이 박혀 거의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그것은 창을 던진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목려는 전추가 고개를 숙였을 때 긴 털에 숨어서 투창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전추는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았다. 놈은 쇠사슬을 매단 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미처 엎드리지 못한 노예 무사들은 쇠사슬에 맞았다. 무게가 수백 근에 달하는 쇠사슬이었다. 불화랄은 앞으로 질주하던 노예 무사가 뒤에서 날아온 쇠사슬에 맞는 모습을 보았다. 가격 당하는 순간 노예 무사의 몸은 허리를 베이는 나무처럼 절단났고 무사는 눈밭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활을 쏴라!”
불화랄이 소리쳤다.
검은색 우전 20대가 전추의 눈에 쏘아졌다. 하지만 전추가 머리를 흔드는 통에 화살은 비껴갔고 놈의 철가면에 가까스로 명중했다. 목려가 말한 대로였다. 화살은 놈에게 전혀 상해를 입히지 못했다. 심지어 간질이는 수준도 되지 못했다. 검은색 우전 20대가 또 한 차례 전추의 목 부분으로 쏘아졌다. 하지만 화살은 전추의 갑옷과 피부를 꿰뚫지 못했고 놈의 분노만 더할 뿐이었다. 전추가 귀궁 무사들을 향해 그대로 돌진해 왔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귀궁 무사들이 피할 겨를도 없이 전추는 그들 대오로 돌진해 재차 몸을 빙빙 회전했다. 거대한 채찍 같은 쇠사슬을 사람과 말을 가루 낼 듯 후려쳤다. 불화랄은 제 군마가 쇠사슬에 맞기 직전 말 등에서 뛰어내리고 땅에 엎드린 채 몸을 굴려 쇠사슬을 피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눈먼지 속에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불화랄과 전추 사이의 거리는 10보 남짓. 불화랄은 이미 후퇴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불화랄은 일어나 전추를 향해 내달렸다. 그는 질주하며 화살을 쏘았다. 불화랄을 등지고 있던 전추는 몸을 돌리지 않고 냅다 땅에 엎드려 적들을 무참히 깔아 죽였다. 불화랄이 미친 듯이 질주해 전추의 옆에 도착했을 때, 1만 근이 넘는 몸뚱이는 숨 막히는 악취를 풍기며 바위처럼 쓰러져 있었다. 불화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들자 그제야 자신이 하늘에 맞닿은 듯한 벽을 마주했음을 깨달았다. 방금 쏜 화살은 소가죽 갑옷을 찔렀을 뿐, 전추에게는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자신이 이렇게 보잘 것 없다고 느껴지게 만든 적(敵)은 처음이었다. 불화랄은 또 눈을 한 움큼 쥐어 입에 넣었다. 추위도 불화랄의 피를 얼어붙게 하지 못했다. 불화랄은 뒤 허리에서 곡도를 뽑았다. 전추의 갑옷 틈으로 삐져나온 긴 털을 붙잡고 왼손에 든 칼로 그 틈을 찔렀다.
불화랄의 칼끝이 전추의 몸에 들어갔다. 수십 겹이 켜켜이 포개진 소가죽을 찌르는 것 같았다. 불화랄은 계속 힘을 실었다. 전추가 고통에 몸을 일으켰다. 불화랄은 한 손으로 전추의 긴 털을 잡아당기고 한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공중으로 딸려 올라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손을 놓친 불화랄은 두세 사람 높이로 내던져졌다. 떨어지는 순간 불화랄은 몸을 틀어 곡도의 칼등을 밟았다. 곡도는 전추의 몸에서 빠져나와 아래로 떨어졌고 불화랄은 전추의 등에 다시 기어올랐다. 전추의 목구멍에서 천둥 같은 으르렁거림이 연신 흘러나왔다. 독약이 놈의 혈액 순환을 가속화해 두 눈이 점점 핏빛으로 새빨갛게 변해갔다. 극심한 통증에 놈은 완전히 실성했다. 전추는 주위의 사람을 둘러보더니 뒷발에 힘을 실어 투석기를 떠난 돌 탄환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노예 무사 한 무리에게로 돌격했다.
불화랄은 손목을 돌려 전추의 긴 털을 제 손목에 몇 바퀴 둘둘 감고 등에 바짝 붙었다. 놈이 들썩거리는 통에 오장육부가 뒤집힐 것 같았지만 주위가 온통 쇠침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불화랄의 발목은 이미 쇠침에 쓸려 피에 흠뻑 젖었다. 불화랄은 발을 버둥거려 쇠침에 찔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놈의 몸을 더듬었다. 발이 갑자기 선득해졌다. 전추 배갑의 쇠사슬 고정용 고리 두 개가 밟혔던 것. 불화랄은 고리에 발을 밀어 넣고 단단히 눌러 밟은 뒤 천천히 일어섰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불화랄은 곧바로 등 뒤로 손을 뻗어 곡도를 찾았다. 그제야 방금 곡도를 떨어뜨린 것이 생각났다. 불화랄은 고개를 들고 전방을 보며 고함쳤다.
“투창! 투창을 다오!”
전추가 노예 무사들에게로 돌진하면서 격노해 머리를 흔들었다. 쇠창 같은 뾰족한 뿔에 일부 인원이 쓸려 나갔다. 다른 무사들 몇몇은 그대로 뿔에 걸려 버렸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전추의 쇠발굽과 쇠사슬이었다. 전추는 몸을 빙빙 돌렸다. 주위로 10여 보 내의 사람들은 모두 쇠사슬에 맞아 쓰러졌다. 놈은 시체들을 하나씩 짓밟으며 분노를 쏟아냈다. 일부 노예 무사들이 불화랄에게 다가가 제 투창을 던져주었다. 불화랄은 애써 몸을 내밀고 받으려 했지만 하나도 받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왔던 노예 무사들은 하나하나 쇠사슬에 맞아 쓰러지고 또 짓밟혀 핏물이 되었다.
불화랄은 하나씩 쓰러지고 짓밟히는 노예 무사들을 보았다. 청년들의 뼈가 부서지고 선혈이 넘쳐흘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비천하지만 용감한 노예로 죽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청양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불화랄은 제 몸이 짓밟힌 것처럼, 쇠사슬에 후려쳐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목려의 말이 떠올랐다. 전우가 죽어가고 있음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비천하지만 용감한 노예 전우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그의 ‘전우’였다.
불화랄은 죽은 제 군마 합찰아가 떠올랐다. 합찰아의 시체는 1리 밖 태납륵강 가의 눈 아래에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합찰아는 이 광경을 볼 수 없었다. 자기 주인이 활을 쓰지 않고 칼로 적을 하나하나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을, 사방으로 튀는 선혈 속에서 원한과 망자의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묵직한 납빛 구름으로 변하는 모습을 합찰아는 볼 수 없었다.
거대한 분노가 독사처럼 불화랄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전에 없던 감각이 불화랄을 에워쌌다. 불화랄은 저도 모르게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질러 흉포한 짐승을 그 안에서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불화랄은 전추의 목 근처에 자리 잡고 등에서 활을 떼어냈다. 오른손으로 화살 3대를 뽑아 동시에 활시위에 걸고 갑옷 틈을 겨냥해 화살을 쏘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활을 쏘아본 적은 없었다. 최대의 힘이 실린 화살 3대가 전추의 피부 1척 깊이 파고들었다. 다시 고통을 느낀 전추가 광적으로 포효하며 또 한 차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놈은 힘을 쓰면서 몸을 마구 흔들어 불화랄을 등에서 떼어내려 했다. 불화랄은 재차 화살을 뽑았다. 또 3대를 같은 곳에 쏘았다. 불화랄은 발사 속도가 제일 빠른 귀궁이었다. 불화랄에게는 대략 우전 40대가 남아 있었다. 지금 불화랄의 마음은 놈을 체처럼 구멍내버리겠다는 강렬한 집념으로 가득했다!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이 전추의 몸에 박혔다. 빽빽한 상처에 질주하는 속도가 더해지자 흉포한 짐승의 상처가 벌어지며 시뻘건 근육이 드러났다. 재차 등 뒤로 손을 뻗은 불화랄은 화살이 바닥났다는 걸 깨달았다. 초조함과 분노에 포효할 뻔했다. 앞에 늘어선 노예 무사들은 쓰러져 가는데 그는 전추를 죽이지 못했다. 불화랄은 쇠고리를 단단히 밟은 채로 전추의 등에 무릎을 꿇고 그 화살들을 뽑아서 다시 쏘려 했다.
“불화랄 장군!”
누군가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불화랄이 고개를 들었다. 전추가 뿔로 한 노예 무사의 가슴을 찔러 그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불화랄은 까무잡잡한 얼굴과 선혈에 물든 새하얀 이를 보았다. 그 노예 무사를 기억했다. 매복전 전에 술 단지를 던져주었던 청년이었다. 청년은 마지막 힘을 다해 손에 든 물건 두 개를 불화랄에게 던졌다. 황동 재질의 통 하나와 투박한 투창이었다.
전추가 머리를 흔들어 그 청년의 시체를 멀리 내던졌다. 가랑눈이 내리는 공기 중에 선혈이 찬란한 빛깔로 흩뿌려졌다. 동륙인이 좋아하는, 흰색 비단에 단청 염료를 뿌려 그린 그림처럼아름답고 허허로우면서도 구슬픈 광경이었다.
불화랄은 청년의 시체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황동 통을 비틀어 열고 전추의 상처에 세게 꽂아 넣었다. 독 가루가 흩어지며 불화랄까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입에 머금고 있던 눈 녹은 물을 뱉어낸 불화랄은 투창을 꽉 쥐고 전력을 다해 전추의 등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