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81화 (28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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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3)

같은 시각, 홀탄산 남쪽 1리. 아득한 설원에 기병 부대 여섯이 거대한 방진을 결성했다.

방진 앞으로 기를 든 무사가 말을 세우고 있었다. 바람에 커다란 깃발이 화르륵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그들 뒤로 만 명이 넘는 행장을 갖춘 기병이 자리했다. 이들 정예 무사는 군마를 단단히 붙잡고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밟고 서 있었다. 사람과 말이 내뿜는 하얀 김이 짙은 안개처럼 방진 위로 피어올랐다. 만 명이 넘는 청장년 사내와 만 필이 넘는 건장한 군마의 체온이 한데 모이자 눈보라로 인한 혹한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이곳에 서 있은 지 매우 오래되었지만 아직 진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무사들은 묵묵히 서 있었다. 정동(精銅)으로 만든 투구와 검은색 연철 갑옷 조각 위에 눈이 쌓였다. 말은 나직이 코투레를 했다.

청양의 정예 기병 여섯 부대는 9왕 여표은 액로 파소이와 막속이 가문의 철진, 대풍장의 목해양 및 합로정, 탈극륵, 알적근 3 대 귀족 가문에 각각 속해 있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뚱뚱한 몸으로 불처럼 새빨간 준마에 올라탄 채 실눈을 뜨고 서쪽을 보며 천천히 뜨거운 차를 마셨다. 그는 동륙에서 온 음료를 좋아했다. 이 차의 산지는 완주의 어느 산속인데 듣자 하니 그곳은 일 년 내내 운무에 뒤덮여 있어 생산하는 찻잎을 뜨거운 물에 넣으면 안개처럼 증기를 내뿜는다고 했다. 머나먼 동륙에서 이곳으로 운송해오면 찻잎 가격은 백은(白銀)에 맞먹었다. 그러나 합로정 가문의 가주에게 값은 문제가 아니었다. 망망한 설원에서 담비 외투를 걸치고 이런 차를 마시면서 동륙의 귀족이 된 듯, 약간의 존귀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좌우를 둘러보았다. 아득한 기병의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기병들은 돌격이 시작되면 일체를 파괴할 수 있는 무적의 쇳물로 모여들 것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을 자아내는 그 힘은 지금 이곳에 단단히 억눌려 있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자기 명령에 완벽히 복종하는 군대에 흡족했다. 단 한 사람도 전방의 기를 든 무사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명령이었다.

전방에서 전쟁터의 포효와 절규를 휘감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피비린내에 맑은 차향이 더럽혀졌다. 그는 비싼 도자기 잔을 남은 차와 함께 그대로 눈밭에 던져 버렸다. 그의 말 뒤에서 차를 끓이던 노예가 냉큼 다가가 잔을 줍더니 가슴에 꼭 품었다.

“됐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가 손을 휘휘 내두르고는 고개를 돌려 제 뒤의 백부장에게 물었다.

“전방 전쟁터 상황은 어떠하냐?”

“승부는 나지 않았습니다만 삭북부 대군이 아직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목려는 지원군 없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탈극륵과 알적근의 기병도 아직 움직임이 없나?”

“네. 방금 탈극륵 가문의 가주가 사자를 보내 진격할 것인지 물어보기에 아직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우리 무사가 자기들을 위해 승리의 길을 열어주길 바라는 게로군? 9왕과 목해양, 철진의 기병은?”

“역시 움직임이 없습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냉소를 던졌다.

“누군가는 움직일 게다. 참지 못하고 움직이는 이가 나올 게야. 젊은이들이 나보다 인내심이 강할까? 내 기꺼이 겨루어봐 주지. 새 차를 한 주전자 내와라. 물은 더 뜨겁게 끓이도록. 날씨 한번 오라지게 궂네. 노예 자식은 왜 이런 날씨를 골랐담?”

호표기 1만 6천 명은 한 사람을 빼곡히 에워싸고 있었다. ‘청양의 활’, 여표은 액로 파소이는 검자루를 쥐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무쇠빛 얼굴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존귀한 합로정 가문 가주께서 뭐라 했다고?”

“누군가는 움직일 게다. 참지 못하고 움직이는 이가 나올 게야. 젊은이들이 나보다 인내심이 강할까? 내 기꺼이 겨루어봐 주지. 새 차를 한 주전자 내와라. 물은 더 뜨겁게 끓이도록. 날씨 한번 오라지게 궂네. 노예 자식은 왜 이런 날씨를 골랐담?”

9왕의 말 뒤에 무릎을 꿇은 청년이 합로정 가문의 가주의 말투를 아주 생생하게, 똑같이 모사했다. 기억력이 매우 좋은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의 소가죽 갑옷 어깨 부분에는 합로정 가문의 쟁(猙)1) 문양이 낙인으로 찍혀 있었다.

9왕이 또 웃음을 지었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는 차 취향이 아주 훌륭하군. 전장에 대한 판단도 감탄스러워. 그래, 그의 말이 맞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나설 게야. 젊은이들은 언제나 인내심이 부족하지.”

9왕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명을 전해라!”

무사 하나가 그의 뒤에서 잽싸게 나타났다.

“네!”

“무사들에게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며 휴식을 취하라 해. 이런 폭설에 손발이 동상에 걸리면 안 되지. 호표기는 청양의 자랑이다. 단 한 사람도 불필요한 부상을 입어서는 안 돼.”

“네!”

명령을 받은 무사가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타고 떠나갔다.

9왕은 제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청년을 흘끗 보았다.

“되었다. 괜한 의심 사지 않게 어서 네 존귀한 숙부 곁으로 가라. 나이가 들면 의심이 많아지게 마련이니.”

“명 받들겠습니다!”

청년은 몸을 일으켜 군마에 올라타고 합로정 가문의 기병대 방향으로 떠나갔다.

“날이 이리 추우니 나도 차 한잔 마시고 싶군.”

9왕이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손은 소리 없이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9왕의 곁, 무사 1만 6천 명이 흩어져 사지를 움직이고 손을 비비며 눈밭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팽팽하던 공기가 느슨해졌지만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사들은 9왕이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쪽에서 교전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철진 파혁 막속이의 아들 잡아화 막속이는 옆에서 제 아버지의 얼굴을 응시했다.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철진의 굳은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도 없었다. 왜소하지만 다부진 이 사내는 늘 단단한 무쇠처럼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잡아화는 제 아버지의 얼굴에 전혀 온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벌써 눈송이가 그의 짙은 눈썹 위에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척후가 쏜살같이 말을 달려왔다.

“목려 장군께서 직접 전방에 나가 싸우며 삭북부 기병 대대의 전진을 막고 있다 합니다! 아군은 보병 3천에 귀궁 1천 명이고 적군은 대략 기병 3만 명이라 합니다. 벌써 1만 명이 강을 건넜으며 후방에서도 계속 강을 건너고 있다 합니다!”

“적의 진형은 뭐지?”

철진이 나직이 물었다.

“적의 진형은 흐트러졌습니다. 전군(前軍) 1만 명이 현재 목려 장군의 본대와 혼전을 치르고 있으며 후군(後軍)은 빙판이 깨질까 봐 매우 느리게 강을 건너는 터라 전군과 후군은 이미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3천 명이면 불화랄의 귀궁이 지원을 해도 오래 못 버틴다.”

철진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장도를 뽑아 들었다.

“전군 경장(輕裝)을 하고 기습한다! 적군의 뒤로 돌아가서 목려 장군과 양쪽에서 협공할 것이다. 제일 빠른 속도로 삭북부 전군 1만 명을 해치워야 한다. 서둘러야 해! 적의 대군이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면 우리가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적군이 강을 건너고 있으니 강기슭에서 요격하면 적군에게 더 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잡아화의 말에 철진이 고개를 저었다.

“우선 목려 장군과 회합한다. 용기와 일시적인 요행만으로는 목려 장군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잡아화가 잠시 망설이다 제 아버지의 귓가에 다가갔다.

“아버지, 우리가 적의 전군을 빠르게 해치우지 못하고 후방에서 협공을 당하면 전원이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막속이 가문의 정예병이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목해양, 9왕, 귀족 가문의 가주들도 움직이지 않는데, 왜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까?”

“누군가는 먼저 움직여야 한다.”

철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어떤 귀족들은 지금 같은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그들 사정이다.”

“어느 귀족이 제 병력을 써가며 늙은 노예를 구하려 하겠습니까?”

잡아화가 고개를 떨군 채 꺼낸 말에 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아들아, 목려 장군은 과거 노예였다. 하지만 노예 하나가 보병 3천 명으로 만 명의 적군을 막아낼 수 있다면 귀족이라 불리며 완전 무장한 기병 1만을 이끄는 우리가 무슨 핑계로 뒤에서 관망하고 있을 수 있겠느냐?”

“아버지…….”

잡아화가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부친의 말투에서 이기적인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잡아화, 어느 날 너 혼자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하게 되면 내 방식이 이해될 것이다. 전쟁터에서 너는 늘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 그것은 네가 궁지에 빠져서도 칼을 휘두르고 결전을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용기인 것이다.”

철진이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목려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안다.”

설원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기병 대대 중, 돌연 한 대대가 전원 말에 올라탔다. 나머지 기병들은 모두 놀랐다. 철진의 기병 대대는 신속하게 대오를 정렬하고 말안장의 식량과 잡다한 물건들을 눈밭에 내던졌다. 그리고 1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군도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말 한 필, 칼 한 자루, 활 한 자루, 화살집 하나만을 가지고 짙은 눈보라 속으로 돌격했다.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는 어지러이 흩어진 발자국과 말굽 자국, 잡동사니만 남았다.

* * *

1) 산해경에 나오는 중국 고대 신수. 붉은 표범의 외형에 꼬리가 5개, 뿔이 하나이며 돌을 치는 듯한 소리를 낸다 하여 쟁이라 이름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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