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2)
“상대 측 선봉은 백랑단일까요?”
불화랄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목려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극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랑단은 늑대왕의 보배이지. 그리 쉽게 치랑을 전방에 세우지 않을 것이네.”
“그럼 선봉은 기병일까요, 보병일까요?”
“기병일 게야. 호도로한은 큰 기병 부대를 이끌거든!”
목려가 술 단지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저들은 이미 강을 건넜네. 여기까지는 반리도 남지 않았어!”
불화랄은 섬뜩했다. 돌연 목려의 칼자루가 미미하게 진동하며 나직하고도 날카로운 벌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칼!”
목려가 나직이 호령했다.
“칼!”
목려의 목소리를 들은 주위의 노예 무사 몇몇이 동시에 나직이 대답했다.
“칼!”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호응했다.
목려의 명령은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매우 빠르게 밖으로 퍼져나갔다. 명령을 받은 무사들은 천천히 곡도를 뽑아 들었다. 곡도 3천 자루가 칼집에서 나오는 나직한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모든 노예 무사가 반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구덩이 안에 거의 웅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칼을 쥔 두 손을 허리춤에 거둬들였고 칼날은 비스듬히 위를 향했다.
지금, 곡도 3천 자루가 반쯤 눈 속에 파묻힌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강철 가시밭 같을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화랄은 땅바닥에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진동은 금세 수백, 수천 배 커졌다. 지진 같기도 하고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지하에서 등으로 난폭하게 지면을 헤집으며 흙을 파헤치고 나오려는 것 같기도 했다. 목려의 말이 맞았다. 대규모 기병대가 질주하면서 지면이 뒤흔들리는 것이었다. 땅에 꽂아둔 칼이 목려의 척후였던 셈이다.
노예 무사들은 전부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머금었다. 목려도 마찬가지였다. 불화랄도 따라했다. 뼈를 에는 듯한 한기에 입안이 얼어 터질 것 같았지만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며 진정이 되었다. 숨을 쉬면서 내뿜는 하얀 김도 눈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불화랄은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 관절에서 미세한 소리가 나자 맞은편에서 목려가 살며시 손을 흔들어 그를 제지했다. 목려는 땅에 꽂아둔 칼로 시선을 옮겼다. 칼자루의 떨림이 몹시도 빨라졌다. 붕붕 울리던 소리도 말 떼가 접근하는 소리에 완전히 집어삼켜졌다.
머리 위로 거대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스민 말 비린내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었다. 몇 마리나 될까? 수천 필? 수만 필? 이미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삭북부의 선봉대 인원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삭북 무사들은 매복에 대비하지 않고 전군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청양부의 매복은 3천 보병뿐이었다.
불화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지 않았다. 칼이 땅에서 튀어나올 듯 진동했다. 쇠발굽 소리가 머리 위에서 나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어쩌면 말발굽이 그들의 머리를 짓밟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불화랄은 문득 내려앉는 거대한 그림자를 느꼈다. 고개를 올리자 군마 한 마리가 보였다. 설령가 종의 군마였다. 놈의 사지가 불화랄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불화랄에게 술을 건네주었던 노예 무사가 훅 튀어 올랐다. 웅크렸던 몸을 펼치는 순간 구부러진 강철 같은 곡도가 공기 중에 번쩍 하더니 군마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군마는 돌격하던 힘에 계속 앞으로 달려갔고 노예 무사는 두 손으로 칼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말의 피가 폭우처럼 불화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삭북 군마는 복부에서부터 두 다리 사이까지 1척 깊이에 4척 길이의 거대한 상처가 났다. 군마가 눈밭에 쓰러져 뒹굴었다. 내장 한 움큼이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왔다. 또 다른 노예 무사가 일어나 말에서 떨어진 삭북 무사의 목을 단칼에 꿰뚫었다.
첫 공격과 함께 강철 가시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무리의 삭북 기병이 거의 동시에 달려왔다. 그들의 진형은 가히 완벽했다. 선봉 대열은 직선처럼 가지런했고 군마 수백 필의 전후 거리는 말 몸통의 절반을 넘지 않았다. 눈구덩이 속에 숨어 있던 노예 무사들이 차례로 튀어 오르고 칼빛이 공기 중에 번쩍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삭북 무사들은 칼을 뽑을 새도 없이 말에서 떨어졌다. 뒤에서 바짝 붙어 달려오던 이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빛이 번쩍하더니 최전방의 무사들이 대거 말에서 떨어졌다.
노예 무사들은 민첩하게 뒤편의 군마들을 피했다. 이 군마들에 짓밟히면 누구든 뼈가 부러질 것이었다. 노예 무사들은 삭북 무사 한 무리를 보내준 뒤 다시 몸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곡도를 내질렀다. 또 군마 수백 필의 배가 갈라졌다. 강철 가시는 슥슥 나직한 소리를 내며 눈밭에서 가지런히 튀어나왔다가 도로 들어가 말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불화랄은 이렇게 일사불란하면서 효과적인 공격은 처음 보았다. 삭북의 정예 기병은 이런 전술에 무참히 도륙되었다. 줄줄 흐르는 피에 눈밭에는 금세 붉게 물든 좁고 긴 길이 만들어졌다.
“매복이다! 멈춰라!”
누군가가 삭북 말투로 크게 소리쳤다.
뒤편의 기병들이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아직 전속력으로 돌격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멈추지도 못하고 서로의 말에 짓밟혔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군마가 위험한 눈구덩이 근처에서 멈추자마자 노예 무사들은 재차 머리를 내밀고 곡도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말발굽을 하나 둘 베었다. 군마는 구슬프게 울며 쓰러졌고 눈밭에 굴러 떨어진 삭북 무사들도 단칼에 목이 베였다. 노예 무사들의 칼솜씨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전투력을 잃은 적의 몸에 남은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기계처럼 정밀했다.
“밝고 지나가라! 밟고 지나가!”
또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삭북 기병이 군마를 채찍질했다. 군마들이 훌쩍 뛰어오르며 눈구덩이를 밟으려 했다. 이번에는 삭북 무사들도 주의해 움직였다. 삭북인은 훌륭한 기수(騎手)였고 삭북부의 말은 초원에서도 최고 좋은 말이었다. 짓밟는 공격은 곧바로 효과를 보았다. 불화랄은 노예 무사 하나가 곡도를 내지르는 순간 삭북 무사가 몸을 숙여 휘두른 칼에 곡도가 떨어져 나가고 곧이어 삭북의 군마가 노예의 머리를 밟아 뭉개는 광경을 목도했다.
삭북 군마는 짧은 승리를 얻고는 바로 눈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졌다. 불화랄에게 그 순간은 이미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그는 화살을 쏘아 삭북 무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더 많은 군마가 눈구덩이에 빠졌고 운이 안 좋은 녀석들은 그대로 발이 접질렸다. 노예 무사들은 몸을 반쯤 눈 속에 파묻고 말굽을 피한 다음, 곧바로 달려들어 말 다리를 베었다.
사람의 고함 소리와 말의 울부짖음이 한데 뒤섞였다. 새빨간 피도 뒤섞였다. 야수 한 무리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혹한의 땅에서 다른 야수 한 무리를 사냥하는 것 같았다. 불화랄은 활을 쏘고, 또 쏘았다. 선혈이 얼굴에 얼어붙었다. 불화랄은 자신이 활을 쏘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전장은 경험해본 적 없었다. 여기에서는 멈추는 순간 곧 죽음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계속 무기를 휘둘러야 했다.
삭북의 기병 부대 수만 명은 꼼짝없이 가로막혔다. 한 치도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괴력마들은 노예 무사들 앞에서 무력했고 삭북부 무사 진형은 흐트러졌다. 일부는 말을 몰아 눈구덩이를 짓밟았고 일부는 말에서 내려 도보전을 펼쳤다.
준마 한 마리가 매우 높이 뛰어올랐다. 앞발 두 개가 불화랄의 얼굴로 곧게 떨어졌다. 불화랄은 피하지 않았다. 조준도 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들어 활을 당겼다. 쏘아진 화살이 말의 복부를 파고들어 몸통을 꿰뚫었다. 낭아전의 화살촉은 삭북 무사의 허벅지를 뚫고 나왔다. 삭북 무사가 무기를 뽑기도 전에 왜소한 인영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단칼에 그의 목을 베었다.
오른손에는 곡도를, 왼손에는 낭봉도를 든 목려가 불화랄 앞에 똑바로 섰다. 목려는 불화랄을 보았다. 목려의 얼굴에는 시뻘건 피가 줄줄 흘렀고 눈에는 흉악한 빛이 번득였다.
“진격한다!”
목려가 말했다.
“진격한다고요?”
불화랄이 목려를 쳐다보았다. 기병 수만 명을 상대로 3천 명이 매복이 성공한 것만도 이미 행운이었다. 이들에게는 애당초 진격의 기회가 없었다.
“공격하지 않으면 여기서 죽네. 우리는 시간을 더 오래 끌어야 해.”
불화랄은 목려의 말뜻을 이해했다. 공격의 결과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들은 반드시 사기로 적을 압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완전히 초토화될 것이었다. 불화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패알륵!”
목려가 눈구덩이에서 휙 튀어나갔다. 낭봉도를 싸맸던 송아지 가죽을 풀고 칼을 휘둘러 하늘을 가리키며 포효했다.
“공격! 공격! 공격! 삭북의 늑대 떼에게 청양 표범의 이빨을 시험해 볼 때다!”
“지금이다!”
불화랄도 함성을 내지르며 눈구덩이에서 뛰어나갔다. 펑. 활시위가 울리며 새카만 화살 그림자가 곧게 쏘아져 나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삭북 무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우전과 함께 무사는 말안장에서 고꾸라졌다. 주인을 잃은 군마가 불화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더 많은 노예 무사가 그들과 함께 눈구덩이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선혈에 흠뻑 젖은 채 곡도를 높이 들어 올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진격! 진격! 진격!”
밀물처럼 쏟아지는 소리에 삭북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이미 간담이 서늘해진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눈 속에서 튀어나오는 광경을 보았다. 하나같이 지옥에서 기어 나온 마귀 같았다.
불화랄은 등에서 가장 오른쪽 아래에 있는 화살 한 대를 뽑아 하늘로 쏘아 올렸다. 화살은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 아득히 흩날리는 눈 속으로 사라졌다. 흉악한 혼이 풀려난 것 같았다. 그것은 불화랄의 ‘명해조 화살’이었다. 가장 위급한 순간에 모든 귀궁 무사를 불러 모으는 화살이었다. 곧 검은 옷을 입은 궁수 1천 명이 목숨을 앗아가는 화살로 이 전쟁터를 뒤덮을 것이었다.
“활은 쏘지 말게! 전우가 다칠 수 있어!”
목려가 불화랄의 곁을 스쳐가며 손에 든 곡도 한 자루를 불화랄의 손에 쥐어주었다.
“전우요?”
불화랄은 순간 멍해졌다. 이 노예 무사들을 얕잡아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화랄은 귀궁의 우두머리였다. 그에게 전우는 흑마를 타고 검은 쓰개를 쓴 귀궁 무사들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전우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뒤에서 철기(鐵器)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화랄은 본능적으로 휙 고개를 숙이며 몸을 회전해 곡도를 내질렀다.
불화랄은 삭북 무사의 명치에서 사정없이 칼을 뽑았다. 뜨거운 피가 불화랄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불화랄은 손으로 죽은 무사의 얼굴을 잡고 힘껏 시체를 밀쳐냈다. 불화랄의 옆에서 수천 명의 노예 무사가 눈구덩이에서 나와 칼을 휘두르며 피 튀기는 전쟁터로 달려들었다. 수많은 사람의 함성이 온 세상을 포효하는 지옥으로 만들었다.
불화랄은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이미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파도처럼 적들이 덮쳐왔다.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한 걸음 내디딘 불화랄은 칼을 휘둘러 삭북 무사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두 손을 칼을 쥐고 전력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