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79화 (279/360)

279

6장. 광노지혈(狂奴之血) (1)

여수우가 채찍 자루로 ‘설망’의 목을 가볍게 쳤다. 극서의 준마인 설망이 천천히 산비탈을 오르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처럼 새하얀 갈기를 털었다.

이 작은 산의 이름은 ‘홀탄’, 만족어로 목민 소녀의 허리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 높지 않은 이 산은 동운산의 자그마한 지맥으로 북도성의 북쪽에 가로 놓여 있었다. 매년 봄이면 이곳에는 파지국이 만개했는데 여리여리한 노란색이 멀리 태납륵강 가까지 이어졌다. 산의 형태도 한층 더 완곡해져 소녀의 허리 같았다. 어릴 적 여수우는 이 일대에서 말을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말굽을 따라 노란 꽃도 오르락내리락 흩날렸다. 여수우는 준마가 전력으로 달려 산비탈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머리를 쳐들고 울부짖는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때 여수우도 가슴을 활짝 펴고 초목향이 섞인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럼 술을 마신 것처럼 살짝 취기가 돌았다.

그러나 지금 여수우의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설원뿐이었다. 하늘에는 눈발이 소용돌이치고 차디찬 바람은 가늘고 처량한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말고삐를 쥐고 있는 여수우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리춤의 검이 갑주를 툭툭 치며 단조로운 충격음을 내었다.

여수우는 겨우 1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금장궁을 지키는 이들 정예 무사 100명은 여수우가 직접 키워낸 부하였다. 여수우는 소마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성을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금장궁을 지키고 앉아 승전보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목려의 부하가 금장궁에 와 그의 자제병이 곧 결전을 치르러 성을 나갈 것이라 알리자 여수우는 묵묵히 일어나서 장막 밖으로 나왔다. 장막 밖에는 여수우의 군마 ‘설망’과 정예 무사 100명이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100명을 통솔하는 여수우의 심복 반찰렬은 심복 중에서 도술에 가장 정통했으며 제일 요직에 중용되었다. 지금 그는 칼자루를 쥔 채, 여수우의 한 걸음 뒤에 말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나도 거센 눈보라에 반찰렬은 몹시 불안했다. 여기서부터 태납륵강까지는 5리도 채 되지 않았다. 선봉대의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돌진하는 삭북부 군대를 만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눈보라가 심한 날씨에는 아무리 눈을 크게 부릅떠도 100보까지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단 서로를 맞닥뜨리면 양측 모두 대비할 새가 없었다.

여수우는 눈보라를 맞으며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여수우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반찰렬은 그곳이 곧 결전이 벌어질 장소임을 알았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대군, 상황을 보니 아직 전쟁은 시작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보라가 심해서 삭북인들이 올지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반찰렬이 몸에 걸친 양가죽 외투를 털자 쌓인 눈이 흩날렸다.

“날씨가 너무 추우니 몸부터 챙기시지요. 게다가 눈이 이렇게 내리면 곧 얼어붙을 테고 산을 내려갈 때 말굽이 미끄러질 겁니다. 성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심이 어떨는지요?”

“3천 명으로 누염을 물리칠 수 있을까?”

여수우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찰렬이 흠칫 놀랐다.

“3천 명으로요? 삭북부에서는 이번에 수만 명이 왔을 텐데요?”

“목려 장군의 본대 외에 얼마나 많은 군대가 자리 잡고 있지?”

여수우가 또 물었다.

반찰렬은 여수우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 얻은 소식에 따르면 불화랄의 귀궁 1천 명과 철진의 기병 1만 명이 자리를 잡았으며 9왕의 호표기 1만 6천 명과 목해양의 기병 1만 명은 이미 성을 나서 가는 길이라 합니다.”

“3만 7천 명에 목려 장군의 3천 명까지 총 4만 명이군. 이들이 누염을 물리칠 수 있겠느냐?”

여수우가 재차 물었다.

반찰렬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북도성에 동원할 수 있는 군대가 10만 명인데 지금 쓸 수 있는 건 4만 명뿐이구나.”

여수우가 반찰렬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최소 6만 명이 아직 북도성에 주둔하고 있군. 움직일 수 있는 4만 명 중에서도 목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반찰렬이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 누가 노예의 말을 듣겠습니까? 목려 장군이 일찌감치 노예 신분을 벗었다고는 하나 장군을 진짜 귀족으로 여기는 귀족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목려 장군 스스로도 자기는 노예라 말하는 것을요.”

“내가 장군을 북도성의 모든 무사를 통솔할 사람으로 임명했어도 소용이 없는 게지?”

반찰렬이 고개를 떨구며 여수우의 시선을 피했다.

“소용이 없다기보다는 귀족들이 목려 장군의 말을 따르게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단 거지요.”

여수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안다. 하여 금장궁에서 소식을 기다릴 수 없는 게야. 내 두 눈으로 전장을 보고 직접 전군을 이끌고 출전해야겠다. 목려 장군에게는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내가 필요하니 눈에 파묻힐지언정 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수우가 반찰렬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반찰렬이 여수우의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주상,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반찰렬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보다 친근한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반찰렬은 다섯 살 때부터 여수우의 심복으로 평생 목숨을 제 주인에게 걸었다. 그는 여수우에게 충성하는 부하이자 못할 말이 없는 벗이었다. 하지만 여수우가 대군에 오른 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많아지자 반찰렬도 그들을 따라 여수우를 ‘대군’이라는 호칭으로 바꿔 불렀고 알게 모르게 많이 소원해졌다.

“너는 내게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벗이다.”

여수우가 담담히 말을 건넸다.

반찰렬은 말라 터진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꺼냈다.

“주상께서는 현재 북도성의 대군이자 초원의 주인이니 본디 모두 주상의 명을 따라야 하지요. 그러나 주상께서는 갓 즉위하신 터라 아직 어떤 면에서는 선대 대군만 못하십니다. 귀족들은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주상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삭북부의 대군이 국경까지 쳐들어온 지금, 어느 귀족이 제 가문의 병력을 지키고 싶지 않겠습니까? 주상께서 이 산비탈에 서서 지켜보며 하나하나 명령을 내린다 해도 늑장을 부리며 갖은 핑계를 댈 것입니다.”

여수우가 잠시 침묵했다.

“아주 오래 전, 내 할아버지 납과이굉가께서는 열여섯에 동륙의 풍염 황제를 무찔렀다. 당시 풍염 황제의 수하에는 소근심, 희양, 이릉심, 엽정훈 4대 명장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적이었다더군. 여기에 동륙 제후의 수십만 대군이 합세해 병거(兵車) 행렬이 하늘가까지 이어졌다 들었다. 그리고 내 할아버지는 청양의 모든 귀족 가문의 병사를 모아 군령을 내렸고 모두가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지. 결국 약자였던 우리는 강자를 이겨내고 풍염 황제가 성 아래에서 동맹을 맺도록 만들었지.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반찰렬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상, 흠달한왕께서는 대군의 위엄만으로 귀족들의 군사를 모은 것이 아닙니다. 흠달한왕께서는 청동의 피를 지닌 초원의 둘도 없는 무사였지요. 게다가 살육을 지나치게 일삼으셨습니다. 전쟁터에서 한 명이 후퇴하면 바로 죽였고 100명이 후퇴하면 100명을 죽였습니다. 어느 귀족 가문이든 마음대로 병사를 이끌고 후퇴했다가는 멸족을 당했지요. 이는 주상께서 따라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나도 안다. 나는 할아버지 같은 영웅이 아니지. 할아버지의 위엄도 없고 파소이 가문에 전해오는 청동의 피도 없다. 내가 할아버지의 방식대로 한다면 귀족들은 내게 칼을 겨눌 것이다.”

여수우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나만의 방법이 있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반찰렬은 일순 멍해졌다.

여수우가 웃으며 서쪽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곧 알게 될 것이다.”

불화랄은 애써 눈을 크게 뜨고 서쪽을 보았다. 하지만 눈보라가 너무 강해서 하얀 설원밖에 보이지 않았다. 매의 눈으로도 이 눈을 꿰뚫어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쌩쌩 부는 바람소리가 온 천지에 가득해 청력으로도 적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눈구덩이 안으로 다시 몸을 움츠린 불화랄은 부러 천천히 호흡했다. 크게 숨을 쉴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내뿜는 김은 눈보라에 가려질 수 있지만 3천 명이 호흡하며 김을 내뿜으면 적이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주위의 눈구덩이에 목려와 그의 자제병 3천 명이 숨었다. 이들은 모두 보병이었다. 모든 군마는 귀궁 무사들이 동남쪽 2리 밖으로 끌고 갔다. 불화랄은 이곳에 남아 목려의 자제병들과 첫 전투를 치르겠다고 요구했다. 그래야 적절한 시기를 파악해 뒤편의 귀궁들에게 공격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려는 매복 장소로 태납륵강에서 1리 못 간 지점을 선택했다. 이곳 초원은 지세가 고르지 않아서 수백 개의 눈구덩이가 쌓인 눈 아래 감추어져 있었다. 대비가 되지 않은 군마는 자칫 발이 빠져 접질릴 수도 있었다. 몸을 숨기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인내심 강한 노예 무사들은 양가죽의 털이 붙은 면을 머리에 걸쳤고 하여 멀리서 보면 눈밭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기가 정강이뼈 전체를 잠식하고 이제 무릎까지 물어뜯으려는 느낌이었다. 남루한 사슴가죽 신발 안에는 건초를 가득 채운 노예 무사들과 달리 불화랄은 통이 긴 소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장화는 딱딱하게 얼어서 툭 치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불화랄은 이를 악물고 가만히 있었다. 합찰아가 서쪽으로 채 1리도 떨어지지 않은 태납륵강 가의 새하얀 눈 아래 묻혀 있었다. 자신의 용감했던 말에게 나약한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옆에서 불화랄을 툭툭 치더니 도기 단지 하나를 건넸다. 단지 입구에는 너절한 삼밧줄이 묶여 있었다. 불화랄은 건네받아 킁킁 냄새를 맡았다.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화랄은 술 단지를 건네준 노예 무사를 보며 웃었다. 젊은 노예 무사도 불화랄을 보며 씩 웃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한데 이는 새하얬다.

불화랄은 거칠게 빚어낸 독한 토속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이글대는 열기가 혀뿌리부터 사지 끝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얼어붙었던 피가 다시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그의 손에서 술 단지를 낚아챘다. 목려였다. 이 왜소한 노인은 사나운 승냥이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엎드려 있었다. 그는 술 단지를 입가에 가져가면서 칼의 칼자루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칼은 목려가 휴대하는 여러 자루의 칼 중 하나였다. 목려는 칼 거의 전부를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에 꽂아 넣었다. 칼몸의 절반과 칼자루만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