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78화 (27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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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16)

사나운 말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화랄은 전방을 보았다. 묵청색 앙상한 말 한 마리가 강으로 뛰어올랐다. 합찰아를 빼닮은 용맹한 기세였다. 그 말은 목려의 투골룡이었다. 이 위험한 군마도 편자를 박은 터라 빙판에 오르자마자 미끄러졌다. 하지만 녀석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칼날처럼 가늘고 길지만 힘 있는 다리를 내리누르며 네 발로 빙판을 단단히 디뎠다. 빙판으로 돌진한 투골룡은 어마어마한 관성의 힘을 받아 강기슭의 불화랄에게로 빠르게 미끄러지며 바짝 다가왔다.

목려는 미끄러지는 중에 낭봉도의 송아지 가죽을 떨어냈다. 투골룡과 합찰아가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불화랄은 낭봉도의 눈부신 쇳빛을 보았다. 투골룡이 통제를 잃고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목려는 한 손으로 낭봉도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치랑들은 경계하며 이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놈들은 즉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맨 앞의 치랑이 곧게 일어서며 두 발을 목려의 머리로 내리쳤다.

하늘로 곧게 들어 올려진 낭봉도가 순간 눈부신 쇳빛 호선을 그렸다. 거의 완벽한 원이었다. 치랑이 일어서는 순간, 낭봉도는 위에서 아래로 놈의 가슴과 배를 갈랐다. 달려들던 늑대의 피에 목려는 전신이 붉게 물들었다. 치랑의 묵직한 몸이 빙판에 쓰러졌다. 투골룡은 아직도 회전을 멈추지 못했다. 다른 치랑 한 마리는 죽은 동료의 복수에 급급해 몸을 굽혔다가 목려에게로 달려들려 했다.

목려는 말 등에서 훌쩍 뛰어올랐다가 착지하는 순간 낭봉도를 빙판에 꽂으며 몸을 고정했다. 왜소한 노인은 천천히 몸을 곧게 일으켰다. 그는 칼을 꽉 쥐고서 마지막 남은 치랑을 응시했다. 투골룡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치랑의 한쪽에서 빙글빙글 돌며 미끄러져 갔다. 하지만 치랑은 그 틈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치랑도 목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녹색 눈에 억누를 수 없는 흉악함과 더불어 두려움이 어렴풋이 비쳤다.

목려는 빙판에 박힌 못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랑은 마침내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선 치랑의 상황이 이자는 상대하기 어려운 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놈은 외롭고 또 포악하게 울부짖고는 한 걸음씩 천천히 물러났다. 목려와의 거리가 30보쯤 벌어지자 녀석은 몸을 돌려 서쪽 기슭으로 철수했다.

놈은 강기슭의 눈밭에 오르자 고개를 돌려 목려를 흘긋 보았다. 놈의 목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방금 전 합찰아에게 물어 뜯겨 중상을 입은 놈이었다.

목려는 치랑과 한동안 시선을 맞추었다가 뒤돌아 한 걸음씩 동쪽 기슭으로 걸어갔다. 투골룡도 천천히 목려의 뒤를 따라갔다. 치랑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고하듯 이따금씩 서쪽 기슭을 돌아보았다. 치랑은 뒤돌아 서쪽으로 멀어져가더니 금세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불화랄은 합찰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합찰아는 땅에 쓰러졌고 몸 아래로 선혈이 흥건하게 웅덩이졌다. 말은 흉곽을 빠르게 들썩이며 마지막 호흡을 했다. 목려가 보니 말 복부의 상처 중 한 부분이 완전히 벌어져 창자가 흘러나왔고 그 위로 핏빛 살얼음이 가득 엉겨 있었다. 이토록 심한 중상을 입은 말이 어떻게 이리 빠른 속도로 저렇게 먼 거리를 달려올 수 있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불화랄은 합찰아의 긴 갈기를 어루만졌다. 제 복부가 갈라진 듯 고통스러웠다. 불화랄은 벗을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흑마가 반짝반짝 빛을 발할 정도로 까맣던 망아지 시절, 그의 품에 웅크린 채로 손바닥의 양젖을 핥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합찰아는 또 한 번 불화랄의 품에 안겨 혀를 내밀고 그의 얼굴을 살며시 핥았다.

“죽이게. 녀석은 지금 무척 고통스러울 걸세.”

목려가 가슴 앞의 단도를 빼 불화랄 앞쪽의 눈밭에 던졌다.

불화랄은 단도를 손바닥에 꽉 움켜쥐었다. 목려가 돌아섰다. 불화랄은 칼을 뽑았고 합찰아는 구슬픈 목소리로 나직이 울부짖었다. 불화랄은 칼로 합찰아의 미간을 정확히 찔러 두개골을 꿰뚫고 뇌의 맥을 끊었다. 이렇게 죽으면 고통은 아주 잠깐이었다. 불화랄은 제 검은 외투를 벗어 합찰아의 몸을 덮어주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자 아직 합찰아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훌륭한 말이었네.”

목려가 불화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자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달린 게야.”

“압니다.”

불화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녀석을 위해 복수하고 싶은가? 곧 기회가 올 걸세. 봐, 기회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목려가 싸늘하게 맞은편 강기슭을 바라보았다. 눈 먼지가 온 하늘에 휘날렸다. 기병 대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눈 먼지 속에서 그들은 분명 창랑의 깃발을 휘감고 있을 것이었다.

불화랄은 묵묵히 일어나 아군의 본진을 등지고 섰다. 즉시 귀궁 무사 둘이 다가와 화살을 장전했다. 하나, 또 하나 새카만 낭아전이 화살집의 빈 곳을 채웠다.

무사들은 화살을 장전했고 불화랄은 화살을 더듬으며 각각의 위치를 속으로 외워두었다. 이어질 전투가 더욱 처참할 것임을 불화랄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 돌아와 다시 화살을 장전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의 말이 죽었다. 그의 말이 쓰러지는 순간부터 불화랄은 청양부와 삭북부 간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직 한쪽만이 이 초원에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심호흡을 했다. 벗을 잃어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억누르며 불화랄은 이것이 진짜 전쟁터라 속으로 되뇌었다. 화살 한 대로 200보 밖의 사람을 쏘아 죽이는 것이 아닌, 쏘아 죽인 이의 피가 어떤 색깔인지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이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마지막 무사의 선혈이 모조리 흘러내릴 때까지 필사적으로 싸우는 전쟁.

“지금쯤 우리 기병이 강을 건넜겠지요?”

불화랄이 맞은편 강기슭에 휘날리는 눈 먼지를 보며 물었다.

목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네.”

불화랄이 고개를 돌려 목려의 눈을 보며 물었다.

“목려 장군, 제게 언제까지 숨기실 생각입니까? 아직도 저를 더 증명해 보여야 합니까?”

목려가 눈썹머리를 치키며 물었다.

“뭐가 알고 싶은가?”

“우리에게는 강을 건너 삭북부의 후방을 습격할 기병이 없습니다. 우선 목려 장군 수하에는 달리 기병이 없지요. 기병들은 모두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어 동원이 무척 어렵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정말 배후에서 기습한다고 해도 목려 장군의 성격상 전방에서 결전을 치르면 치렀지 강 동쪽 기슭에서 양공(佯攻)을 펼칠 군사를 남겨두지는 않을 겁니다. 맞습니까?”

불화랄이 큰 소리로 물었다.

목려는 잠자코 있다가 차갑게 불화살을 응시했다.

“저는 귀족이고 목려 장군께서는 귀족을 믿지 않으니 진짜 전술을 말해주지 않는 거겠지요.”

불화랄은 목려의 음산하고 누르께한 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려 장군은 본인의 군대가 첫 교전에서 우위를 점해야만 귀족들이 전공을 나누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그럼 현재 목려 장군은 동쪽 기슭에 있으니 이곳이 바로 우리의 첫 전투가 일어날 장소이자 반드시 이겨야 할 전쟁이겠군요!”

“우리가 1리 물러나 있으면 호도로한은 우리 군대가 보이지 않으니 빙판을 밟고 강을 건널 걸세. 그들 절반이 태납륵강을 건넜을 때 우리는 공격할 것이네. 우린 반드시 저들이 강을 못 건너도록 제압해야 하네. 저들이 서쪽 기슭으로 후퇴하도록 3천 노예병으로 몰아내야 해. 빙판은 너무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어려우니 대규모 군대가 일제히 철수하면 무너질 걸세. 그때 우리는 서쪽 기슭에 고립된 군대를 해치울 것이네.”

목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게 진짜 전술이네. 첫 판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노예 보병 3천 명뿐이야. 귀족들에게 기대는 없네. 나는 전쟁터에서 미덥지 못한 지원군에게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이야.”

불화랄은 말없이 목려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목려는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불화랄의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 손을 못 잡으시겠습니까? 저는 나이든 노예가 제 손을 잡았다고 해서 더럽다고, 비천한 노예가 내 손을 잡았다고 소리치지는 않을 겁니다.”

불화랄이 또박또박 말했다.

“왜냐, 저는 사냥꾼일 뿐이니까요.”

“사냥꾼?”

목려가 곁눈으로 불화랄을 쳐다보았다.

“제게는 형제가 1천 명 있습니다. 장군은 형제가 3천 명 있지요. 제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불화랄이 말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시선을 맞추었다. 불화랄의 손이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목려의 눈은 적을 마주한 사람처럼 일말의 감정도 없이 써늘했다. 불화랄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거두려 할 때 목려의 눈동자 깊숙이에서 무언가가 살짝 일렁였다. 목려가 손을 내밀어 불화랄의 손을 맞잡더니 어마어마하게 힘을 주며 아주 짧게 악수했다. 목려는 바로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불화랄은 살짝 아팠던 손을 털며 말을 꺼냈다.

“3천 자제병에 귀궁 1천 명이 더해졌으니 이제 장군께는 4천 명이 있습니다.”

“1만 4천 명이네.”

목려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 아득히 먼 곳에 북도성이 자리했다.

“내 귀족을 믿지는 않네만 그래도 삭북부의 양익을 공격해 달라 부탁했네. 그 사람들 중에서 철진 파혁 막속이의 1만 기병은 약간 믿고 있다네. 철진이 결단을 내리기까지 너무 주저해서 그렇지 일단 전쟁을 시작하면 적절한 때에 전장에 들어올 걸세.”

“1만 4천 명이라. 삭북부는 몇이나 됩니까?”

목려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정보는 없네. 하지만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번 전쟁은 누염 일생의 마지막 복수전일 것이야. 그러니 모든 인원을 이끌고 왔겠지……. 사내 10만 명과 군마 10만 필! 그리고 흰 늑대 3천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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