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76화 (276/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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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14)

“흰 늑대 와의 거리가 300보 미만일 경우 도망치기 무척 어려울 것이네.”

목려의 말이 천둥처럼 불화랄의 귓가에 다시금 메아리쳤다. 불화랄은 방심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북극의 황야에서 온 이 치랑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 늑대는 그가 이 묘지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일찌감치 눈여겨보았을지 몰랐다. 그랬으니 준마가 그리 불안해했으리라. 불화랄은 다급히 후퇴했다. 거대한 늑대가 거의 동시에 불화랄에게로 달려들었다. 불화랄은 활을 쏠 기회조차 없었다. 눈 속에 빠진 불화랄은 피할 수도 없었다. 치랑의 공격은 북륙에서 가장 출중한 준마처럼 빨랐다. 그때, 치랑이 갑자기 멈추었다. 이 야수는 어떤 위험을 감지한 듯 휙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불화랄의 흑마가 웅장하고 힘차게 울부짖고는 쌓인 눈 위를 디디며 빠르게 다가왔다. 쌓인 눈도 어릴 적부터 불화랄을 따랐던 괴력마를 막지 못했다. 흑마는 발이 빠지지 않도록 멈추지 않고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거대한 늑대에게 접근하는 순간 흑마는 두 앞발을 들어 올렸다. 사발 크기만 한 말발굽이 거대한 늑대의 정수리를 짓밟으려 했다. 초원의 말이 악독한 늑대를 상대할 때 쓸모 있는 것은 쇠발굽뿐이었다. 일반 늑대는 수컷 말의 발굽 아래 일시적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흑마가 일어서는 순간 거대한 늑대도 허리를 쭉 펴며 일어섰다. 일어선 늑대는 흑마를 능가했다. 족히 두 사람 키는 되는 신장이었다. 놈은 두 앞발을 휘둘러 흑마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보통 늑대여도 날카로운 발톱 한 방이면 말의 복부를 찢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흑마가 힘 있는 뒷발로 힘껏 땅을 차며 쌓인 눈이 크게 흩날렸다. 흑마는 놀랍게도 온 힘을 다해 거의 한 사람 키만큼 튕겨 오르더니 뒷발 두 개로 거대한 늑대의 허리를 짓밟으려 했다. 유연한 늑대 허리는 늑대 몸의 급소였다. 거대한 늑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비틀어 흑마의 공격을 피했다.

착지한 흑마는 불화랄을 향해 처연하게 울부짖었다. 불화랄은 말 등에 올라탄 뒤 손을 뻗어 말의 몸을 슥 훑었다. 손에 뜨거운 피가 흥건했다. 방금 전 거대한 늑대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흑마의 가슴에 세 줄의 극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흑마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주인을 태우고 동쪽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주인의 마음을 읽는 흑마는 온 곳으로 돌아가면 안전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땅에 피가 한 움큼씩 흩뿌려졌다. 눈밭에 활짝 핀 꽃 같았다. 불화랄은 이 말을 제 형제처럼 여겼다. 이렇게 질주하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말은 언제라도 고꾸라질 수 있었다.

불화랄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등에서 한 번에 화살 세 대를 뽑아 거대한 늑대에게로 쏘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목표물인 치랑은 거대했기에 세 발 모두 명중했다. 짐승들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치랑의 우짖는 소리에 불화랄은 귀가 떨어져나갈 듯 아팠다. 하지만 거대한 늑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불화랄의 화살에 실린 힘은 다섯 겹으로 쌓인 소가죽 갑옷을 꿰뚫었지만 늑대의 몸은 3촌밖에 파고들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화살을 입에 문 늑대는 피를 뚝뚝 흘리며 화살을 뽑아냈다.

늑대는 재차 울부짖었다. 이번에는 고통스러워서가 아닌,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었다. 놈은 말이 질주하는 속도를 뛰어넘어 빠르게 불화랄을 추격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쌓인 눈 속에서 그만한 크기의 거대한 늑대 두 마리가 돌연 뛰어올라 불화랄을 추격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놈들은 이미 그곳에 오랫동안 매복한 채 사람 하나와 말 한 마리의 싱싱한 살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양 9왕 여표은 액로 파소이가 성벽 위에서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목려의 노예 자제병 3천 명이 대열을 맞춰 성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북도의 검은색 우람한 성 아래에서 3천 명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득히 흩날리는 가랑눈에 집어삼켜지듯 점차 멀어져갔다. 9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오 최전방에서 어깨에 검치표 깃발을 짊어진 앙상한 노인을 보았다.

9왕의 등 뒤로 안쪽 성벽 아래에는 호표기 정예병 1만 6천 명이 침묵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표기는 가장자리가 모피로 장식된 강철 갑옷을 걸쳤고 말안장에는 날이 손바닥 너비만한 중도를 비스듬히 꽂았다. 군마로 엄선된 괴력마들은 곧 시작될 전쟁을 알아채고 쇠발굽으로 천천히, 그리고 힘을 실어 땅을 차면서 돌격하고픈 갈망을 다스렸다.

검은 옷을 입은 척후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성에 올랐다.

“칸, 목려 장군이 이끄는 3천 노예병이 성을 나섰습니다.”

9왕이 담담히 대답했다.

“보았다. 불화랄은 어디 있지? 목해양은? 철진은? 3 대 귀족 가문의 기병들은 어디 있느냐?”

“불화랄의 귀궁 1천 명도 남쪽 성문을 나섰습니다만 불화랄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미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성을 나서자마자 행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노선을 보았을 때, 우회하는 길로 가서 목려 장군의 군대와 회합할 것입니다.”

“초원에서 귀궁을 미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매를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9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진 장군의 기병 1만 명도 행장을 갖추고 출전 대기 중입니다. 목해양 장군의 기병 1만 명도 북문에 근접했으니 곧 성을 나설 것입니다. 몇몇 귀족 가문에서 인솔하는 기병들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합로정, 탈극륵, 알적근 가문의 가주들이 늙은 노예의 지시를 따르겠느냐? 그가 여숭 곽륵이 파소이의 검을 차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9왕이 냉소했다.

빠른 말 한 마리가 번개처럼 성벽 아래로 달려왔다. 무사 한 명이 또 빠르게 성에 올랐다. 9왕 수하의 척후병은 일어나 소리 없이 호위 무사 뒤로 몸을 숨겼다. 새로 온 무사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남루한 소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큰 발은 사슴 가죽으로 감싸고 코에는 쇠고리 하나를 꿰고 있었다. 그 고리는 노예의 표식으로 주인은 자기 이름을 쇠고리에 새겼다. 쇠고리는 반원 크기에 따로 봉하는 부분이 없었다. 노예는 어릴 때 콧방울에 쇠고리를 걸었고 어른이 되면 쇠고리는 살과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도망친 노예는 코 한쪽을 찢어야 그 쇠고리를 제거하고 주인의 이름도 영원히 떨쳐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콧방울에 남은 상처가 노예 신분을 알리는 표식으로 평생 남았다.

노예 무사는 9왕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존귀한 칸이시여, 저는 목려 장군의 부하입니다. 목려 장군께서 삭북부 주력군이 접근했다는 정보를 알아내셨습니다. 저희는 곧 태납륵강 가에서 삭북부와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 목려 장군께서는 칸 수하의 호표기 정예병이 양익에서 협공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네 뒤를 보아라. 목려 장군을 위해 이미 호표기 무사 1만 6천 명을 준비해두었다. 너희가 늑대왕과 전쟁을 시작하면 우리는 그들의 양익에서 돌격할 것이다. 초원의 어느 군대도 전력으로 돌격하는 호표기를 막을 수는 없을 테니 목려 장군께 안심하라 전해라.”

9왕이 느릿느릿 말했다.

노예 무사는 고개를 돌려 성 아래를 흘긋 보았다. 9왕이 홀연히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호표기 무사 1만 6천 명이 일제히 말안장의 중도를 뽑아 들고 하늘을 가리키며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군마 1만 6천 필이 머리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거대한 함성의 파도에 그윽히 떨어지던 눈송이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이런 군대 앞에서는 발아래의 견고한 성벽도 찢겨나간 종잇장처럼 잘게 부서질 것 같았다.

맨 앞에서 기(旗)를 잡고 있던 철아 무사가 깃발을 휙 흔들어 깃대를 세게 땅에 꽂았다. 무사들은 또 거의 동시에 포효를 멈추고 말고삐를 꽉 잡아당기며 자신의 군마를 통제했다. 함성이 가라앉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비구름 속에서 막 벗어난 듯 귀가 웅웅 울려서 한참 동안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목려 장군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노예 무사가 재차 땅바닥에 입을 맞추고는 일어나 성을 내려갔다. 그리고 말등에 훌쩍 뛰어올라 쏜살같이 달려갔다.

검은 옷을 입은 척후가 9왕의 호위 무사들 뒤에서 재빨리 나와 9왕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칸께서는 3대 귀족들보다 존귀하시니 노예들의 지휘를 따르실 필요가 없…….”

“아니, 북도성에서 내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목려다.”

9왕이 손을 내두르며 척후의 말을 끊었다.

“대군께서도 승전보를 기다린다. 우리가 전력으로 목려의 진격에 협조하기를 바라고 계시지.”

9왕이 잠시 침묵하더니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죽을 사람이거늘, 상냥한 얼굴을 보여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

척후는 아연해졌다. 9왕은 그를 무시한 채 성 아래 깃발을 든 철아 무사에게 손을 흔들어 출발을 명했다. 9왕의 발아래에서 검치표 깃발 수백 장이 구름처럼 흐르고 쇠발굽이 콰르릉 굉음을 울렸다. 9왕은 저 멀리 작은 군대의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노래 한 곡을 흥얼거렸다.

9왕에게서 가장 가까이 선 척후병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만가(挽歌)1)를 또렷하게 들었다. 약간 개사된 만가였다.

“보라, 새벽마다 들리는도다

밤꾀꼬리가 부르는 고이심의 노래

목려라 불리던 노예의 죽음을 애도하네

그에게는 추억은 없고 서글픔만 있나니

이 세상, 환하게 웃는 사람 없고

이 세상, 전쟁으로 안녕한 순간이 없네

이 세상, 발그레한 얼굴을 누가 보여줄 것이며

이 세상, 장미를 감상할 시간은 또 어디 있으랴?”

* * *

1)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나 가사. 장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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