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74화 (27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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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12)

“저리 많은 칼을 쓸 수나 있겠습니까?”

불화랄이 목려 수중의 칼을 보며 물었다.

“치랑의 뼈는 무척 단단하다네. 이렇게 칼을 구비해두면 칼날이 부러졌을 때 바로 바꿀 수 있지.”

목려가 불화랄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이 대답했다.

“노인의 입에서 나올 말 같지는 않네요.”

불화랄이 담담히 말을 뱉었다. 목려는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화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불화랄 옆에 두꺼운 양탄자가 한 장 깔려 있었다. 불화랄은 양탄자에 앉아 몸을 비스듬히 뉘이며 긴장을 풀었다. 성벽 위 불화랄에게는 내내 이 한 장의 양탄자가 전부였다. 지난 두 달간 불화랄은 몇날 며칠 밤을 이곳에서 잤는지 몰랐다. 아래에 양탄자 한 장을 깔고 다른 모포 한 장을 덮어 겨우 바람만 막았다.

가끔 깊은 밤까지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목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근처에 앉아 가느다란 눈발 속에서 천천히 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잘 나누지 않았다.

목려의 등 뒤로 건장한 청년 100명이 서 있었다. 똑같이 남루한 가죽 갑옷에, 똑같이 날이 넓은 곡도를 들었고 등에는 두꺼운 나무로 만든 투창을 한 자루씩 꽂고 있었다. 먼 길을 걸을 수 있는 발바닥이 넓은 발은 부드러운 사슴 가죽으로 싸맸다. 성 아래에는 이런 청년들이 2천 900명 더 있었다. 모두 목려의 자제병(子弟兵)1)이었다.

목려는 노예 중에서 이들을 선발해 직접 칼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을 채찍질하며 전장의 법칙을 가르쳤다. 또 그들을 자기 형제처럼 여겼다. 목려는 귀족들을 믿지 않고 오로지 노예만 믿었다. 노예 새끼에서 청양부 최고 명성의 무사가 되기까지 목려는 줄곧 내면 깊숙이 스스로를 노예로 여겼을 것이다. 목려는 노예 특유의 거만함을 고수하며 선대 대군 여숭 곽륵이 파소이 외에 모든 귀족을 냉담하게 대했다.

북도성에는 불화랄의 사람도 1천 명이 있었다. 그들 모두 목민이 입는 검은색 모전 외투를 걸치고 망아지 때부터 직접 기른 준마 한 필에 직접 만든 활과 낭아전 한 자루를 지니고 다녔다. 대부분 그들은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대군의 명령을 받으면 북도성에 나타났다. 청양부의 귀궁 1천 명은 파소이 가문의 주인에게 전속된 군대로 이들에게 경계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활쏘기에 능한 명사수 1천 명은 기병대 하나를 물리치기에는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초원에서 이들 모두는 낭아전 단 한 대로 100보 밖의 존귀한 사람도 죽일 수 있었다. 파소이 가문의 주인은 항상 자랑스러운 말투로 자신의 명사수 1천 명을 ‘청양의 사냥 매’라고 찬미했는데 그 안에 은근한 위협도 담겨 있었다.

불화랄은 목려가 왜 자신과 말을 잘 섞지 않는지 알았다. 그들 1천 명은 사실상 모두 귀족이었다. 대군에게 귀족 신분을 하사받은 특수한 사냥꾼으로 북도성에 나타날 때면 특별한 권력을 누렸다.

불화랄은 도포 안을 더듬어 늙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하나 꺼냈다. 세월이 오래 된 물건인 티가 났다. 겉의 대나무 껍질은 손때가 묻어 반지르르한 광택을 띠었고 갈황색 빛깔은 호박(琥珀) 같았다. 불화랄은 시험 삼아 소리를 내 보고는 북도성 사람들이 잘 들어보지 못한 곡을 불었다. 나직하고 구슬픈 피리 소리는 초원 하늘의 새털구름이 나직이 드리운 느낌이었다.

묵묵히 목려의 노래와 불화랄의 피리 소리를 듣고 있던 자제병들은 언뜻 전혀 다른 두 곡이 같은 박자를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피리 소리와 목가 소리는 미묘하게 하나로 어우러졌다. 점차 피리 소리는 초원처럼 낮아지고 목가 소리는 초원을 달리는 준마처럼 고조되어 갔다.

칼을 갈던 목려의 손이 멈추면서 노랫소리도 멈추었다. 목려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제 무릎에 놓인 칼을 보며 말이 없었다.

불화랄은 엷은 미소를 띤 채 계속 피리를 불었다.

한참이 지나고 목려의 자제병들은 목려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흥얼거림을 들었다. 방금 전 부르던 오래된 목가였다. 그의 노랫소리는 불화랄의 피리 소리와 서서히 하나로 어우러졌다. 노랫소리, 피리 소리와 함께 목려는 슥슥 군도를 갈았다. 칼 가는 소리는 바람소리와 빗소리, 말 울음소리 속에서 점차 격앙되어가는 북소리 같았다.

윤성제 5년 11월, 북도성 밖 구름이 낮게 드리운 초원 위로 노랫소리와 피리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갔다. 청년 수천 명이 말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왔군요.”

불화랄이 피리 연주를 멈추고 일어섰다.

양탄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을 때는 게으른 유목민 같던 불화랄은 일단 일어나자 활시위가 팽팽히 잡아당겨진 활등 같았다. 그는 허리를 약간 굽히고 늑대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둘러보았다.

“뭐가 왔다는 거지?”

목려가 물었다.

“저쪽을 보십시오.”

불화랄이 서북쪽 하늘을 향해 턱짓을 했다.

희뿌연 하늘에 새카만 점이 몇 개 늘더니 구름 아래에서 빙빙 돌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는 거칠고 스산했다. 절대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광활한 초원에는 인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리로 보아 흰머리독수리 같네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불화랄이 속으로 묵묵히 셈해보고 말을 이었다.

“20리 이내예요.”

“흰머리독수리가 누구지?”

호랑이 눈 같은 목려의 황갈색 눈동자가 불화랄을 응시하며 물었다.

“호도로한? 아니면 누염?”

“사냥꾼들은 흰머리독수리를 신의 새로 여깁니다. 그것들이 야생 사슴과 황양 떼의 방향을 가르쳐주거든요. 저들은 항상 산 것들의 머리 위를 선회합니다. 맹수가 사냥감을 잡아 죽이고 자기들에게 썩은 고기를 남겨주기를 기다리지요. 저희는 사냥 시 흰머리독수리에 의지해 사냥감을 찾습니다. 늑대 떼가 사냥감에 접근하면 저것들은 격하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굶주린 소리를 내지요.”

“누염이 왔는가? 20리 이내에? 그자도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겐가?”

목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갈고 있던 낭봉도를 천천히 작은 소가죽 안에 집어넣었다.

“누염, 그자도 기다리느라 고생했군.”

“척후를 보내 직접 살펴봐야 합니다.”

불화랄이 목려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목려 장군, 저를 보내주십시오.”

“대군은 자신의 매가 첫 교전에서 척후로 죽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목려가 냉랭하게 던진 말에 불화랄은 담담히 웃고는 초원 사내 특유의 위엄과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사냥꾼입니다. 말 등을 제 집처럼 여기지요. 직접 삭북의 늑대 떼를 보러가게 해주십시오. 맞닥뜨린다고 해도 수월하게 도망쳐올 수 있습니다.”

목려가 살짝 눈을 감았다. 한참만에야 다시 눈을 뜬 목려가 입을 뗐다.

“도망쳐온 척후는 필요 없네. 나는 적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할 수 있는 척후가 필요해. 할 수 있겠나?”

불화랄이 눈썹을 치켰다.

“목려 장군의 포위망이 어디입니까?”

목려가 양가죽 한 장을 펼쳤다. 그 위에는 북도성 주위의 지세가 그려져 있었다. 목려는 성 서쪽의 구불구불한 하류를 가리켰다.

“성 밖 서쪽 7리는 태납륵강이네. 이 강은 동운산이 수원지로 북도성 부근을 거칠 때 북에서 남으로 흐르지. 그리 넓지는 않지만 물이 마른 지금은 대략 50보 너비라네. 가장 깊은 곳은 성인 남자가 어깨까지 파묻힐 깊이고. 지금 수면이 얼어서 얼음 위로 걸어갈 수 있네. 말을 모는 것도 문제없지. 우리가 적을 맞이할 위치가 바로 태납륵강 동쪽이라네. 자네는 적을 태납륵강 서쪽으로 유인한 다음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오면 되네. 강을 건널 때면 얼음 표면이 무척 미끄러우니 적들은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어. 그때 우리가 기병으로 압박하며 활을 쏠 걸세.”

“태납륵강이 겨우 50보 너비라면 얼음 위에 많은 사람이 설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100~200 명이지요. 이럴 때 활을 쏘면 많이 죽여 봐야 100~200 명이고 큰 부대는 강 서쪽으로 철수할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이때 적은 강 서쪽으로 후퇴해 우리에게 활을 쏘겠지. 우리도 강을 건널 수 없으니 추격할 수 없네. 하지만.”

목려는 태납륵강의 하류를 가리켰다.

“이곳에 아주 좁은 지점이 있네. 그곳은 얼음이 아주 두텁게 얼어서 기병이 빠른 속도로 통과할 수 있지. 적이 강가에서 우리와 맞 사격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1만 기병이 놈들의 뒤로 돌아가 공격할 걸세. 그럼 적들은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되지. 나는 호도로한의 기병은 신경 쓰지 않네. 누염의 백랑단을 대비해야 할 뿐이야.”

불화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궁 무사 하나가 성 아래에서 불화랄의 군마를 끌고 왔다. 검은색 준마는 쇠발굽으로 땅을 파면서 커다란 깃발 같은 긴 갈기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불화랄이 몇 걸음 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목려 장군께서는 이 전술을 미리 생각해두셨군요? 두 달간 서북쪽만 본 이유가 태납륵강 가에서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지요? 누염이 저 길로 가리라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태납륵강 가 서쪽 골짜기에 지난 번 전쟁에서 죽은 늑대 기병들이 묻혀 있네. 누염은 그곳에 가 그들을 추모할 것이야. 그리고 누염은 지난번에도 저 길로 북도성에 진군했지. 당시 나는 기병을 이끌고 태납륵강 가에서 누염과 전쟁을 하고 패한 척하며 그를 성안으로 유인했네. 누염 그자의 성격상 반드시 저번에 북도성을 공격했던 길로 올 걸세. 그래야 지난 30년의 치욕을 씻어낼 수 있을 테니까.”

목려가 서북쪽 하늘의 선회하는 흰머리독수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은 흉포하고 잔인한 마귀이나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영웅이기도 하네.”

“청양부 목려 장군의 존경을 받는 자는 이 세상에 많지 않겠지요?”

불화랄은 성 아래로 걸어갔다.

“명심하게. 아무리 기마술에 자신이 있다 해도 절대 늑대 기병과 교전해서는 안 돼! 흰 늑대 와의 거리가 300보 미만일 경우 도망치기 무척 어려울 것이네.”

목려가 불화랄의 등에 대고 차갑게 소리쳤다.

* * *

1) 고향, 현지 출신 자제들로 구성된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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