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72화 (27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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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10)

식연이 사규를 꼬나보며 말했다.

“자네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마음이 흐리네. 진흙처럼 질퍽해서 알아볼 수 없어.”

사규가 피식 웃고는 쇠난간 안으로 손을 뻗어 주석 병을 잡고 꺼내더니 한 모금 벌컥 들이켰다. 사규는 술을 물처럼 마시는 술고래였다. 식연에게 좀 남겨줘야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옆에 앉아 누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북도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사규가 소매로 입을 슥 닦았다.

“청양의 병력은 아직 삭북부보다 강하다. 하지만 여숭이 막 죽었어. 여숭은 북도성의 각 귀족들을 유일하게 호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새 대군 여수우가 너무 무른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는군. 하지만 청양부에는 여표은과 유해, 철진, 철익 같은 이름난 무사들이 있네. 저번에 북도성에 나타나 활을 쏘았던 젊은 무사, 스스로를 불화랄이라 하던 그자도 약한 인물은 아닌 듯해. 내 짐작이 맞는다면 대군에게만 충성하는 귀궁 무사의 우두머리일 거야. 이들이 모이면 북도성에도 일전을 펼칠 기회가 있네.”

식연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리고 내가 북도성 안에 우리 사람도 배치해 두었지.”

“네?”

사규의 미간이 움찔했다.

“내 제자가 하나 있어. 자네도 본 적 있지. 여귀진이라고.”

사규는 순간 멍해 하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장군께서는 일찌감치 선견지명을 갖고 북도성에 강력한 무사를 심어두셨군요. 우리가 북도성에 천구 무사단의 대종주, 창운고치검의 주인을 보낸 사실을 진월에서 알면 천리 밖으로 물러나겠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

식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진월의 신도도 두려워하는 천구의 성물, 서절이근두랍공의 주인이 열일곱밖에 안 된 아이라니.”

사규가 담담히 답했다.

“아이는 다 성장합니다. 저도 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 아이였지요.”

식연은 주석 병에 담긴 술과 간식을 말끔히 비웠다. 사규는 손을 넣어 그릇 하나하나를 꺼내 다시 외투 안에 감춰 넣었다. 겉으로는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았다. 사규의 영준하고 냉엄한 얼굴이 더해지자 누구도 이 고귀한 황성 흠차가 제 군복 안에 자질구레한 것들을 감춰두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규는 쿵쿵 뛰어보기까지 하면서 걸을 때 이상한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확인도 했다.

식연은 흡족하게 기지개를 켜며 감옥 벽에 편안히 기댔다.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이 더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남회에 온 사명이기도 하지요.”

“내 사건이겠지?”

식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계7어사가 이미 장군의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저들은 사적으로 만족과 내통해 나라를 배신한 반역죄를 걸어 참형에 처하려 합니다.”

사규가 주위를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데 여기서 살아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식연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사규, 내가 산적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기억납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그 일을 늘 얼버무리듯 말씀하셔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지요.”

“갑자기 그 시절이 떠오르는군. 다 헤진 옷에 낡은 삼신을 신고 검을 찼지. 마을의 싸구려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산비탈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을 보거나 멀리 산골짜기의 다랑논을 보았어. 산골짜기에는 아주 맑은 연못도 있었네. 산촌 하나가 연못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초가집 몇 채에서는 해질 무렵이 되면 밥 짓는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지.”

식연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아주 아름다웠어. 그리울 정도로. 보고 있으면 그대로 잠이 들고 싶어졌지.”

사규는 말없이 조용히 들었다.

“사규, 산적은 법에 어떻게 처리되지?”

식연이 불쑥 고개를 돌리고 사규를 쳐다보았다.

“산적은 대도(大盜)로 보고 황실 형법에 따라 참형에 처합니다.”

식연이 허허 웃고는 고개를 들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법에 따르면 내 인생은 참형에 처해지는군. 이제 나는 매일 저 천창을 본다. 해 그림자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질 때까지 하늘의 색은 끊임없이 변하고 구름은 서서히 흘러가지. 가끔 비둘기 한 마리가 그곳에서 조잘대며 쉬기도 해…… 보고 있으면 그대로 잠이 들고 싶어져.”

사규는 잠자코 생각하더니 입꼬리를 비싯 올리며 웃었다.

“그럼 장군, 푹 주무십시오. 흠차 대인 사규는 하당 국주를 뵈러 가야 합니다.”

사규의 발소리가 통로 끄트머리에서 사라졌다. 식연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이미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리국, 구원성.

깊고 고요한 밤. 물 떨어지는 소리가 깊은 궁전 안에 메아리쳤다. 바둑판 양쪽으로 두 사람이 목각상처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바둑돌을 쥔 손을 높이 든 채 오래도록 내려놓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잠을 청하듯 눈을 감고 팔꿈치를 작은 탁자에 괴고 있었다.

붉은 초가 거의 다 탔다. 영무예는 초가 절반이나 타들어가는 동안 내내 장고(長考)했다. 사현은 일찌감치 정신을 딴 데 팔며 고단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번 판은 그가 우세했다. 실리(實利)1)와 외세(外勢)2)를 모두 챙겼고 두 수만 더 두면 붕설(崩雪)3)의 형세가 되었다. 영무예가 고심고심해서 둔 판이 깡그리 무너질 판국이었다.

“사현, 내 갑자기 한 가지 일이 생각났네.”

영무예가 바둑돌을 한쪽에 놓았다. 여전히 어디에 둘지 결심을 못 한 듯 눈은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왕야의 말투를 들으니 제가 해결해야 하는 처리하기 까다로운 일이 있나 보군요?

사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물처럼 맑은 것이 전혀 졸린 사람의 눈 같지 않았다.

“허허허허.”

영무예가 소리 내어 웃고는 말을 이었다.

“역시 내 부하들 중에서 자네가 내 의중을 제일 잘 헤아리는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네. 지금 내 이 바둑판처럼 식연도 곧 죽으려나?”

“거의 그럴 겁니다. 법률에 따라 참수해야 할 죄 중에 군주 시해 빼고 모두 저질렀으니까요. 병권 남용에 죄인을 방임하고 타국과 내통했으며 당파를 결성해 정치를 어지럽혔지요……. 조사하는 이가 세심한 자라면 식연이 천구 무사단의 종주 중 한 사람임을 어렵지 않게 밝혀낼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회성의 깊은 감옥에서 멀쩡히 지내고 있는 이유도 황실에서 하사한 관작 때문입니다. 식연의 죄는 하당국에서 판단할 수 없고 천계7어사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7어사 중 누구도 이 큰 사건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 미루었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율법에 귀족들은 모두 봄에 형을 집행하니 어사들도 이번 겨울 안에는 판결을 내려야 할 겁니다.”

“위풍당당한 어전우장군이자 황성의 백작이 북륙의 만족 하나를 살리려고 목을 베인다? 당초 5천 뇌기가 삽매곡에서 식연과 승부를 내지 못했지. 한데 식연이 이리 쉽게 죽는다면 우리가 너무 무능해 보이겠는데?”

영무예가 허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누가 식연을 보호해 주려나?”

사현이 양 손을 으쓱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식씨 가문이 명문가이기는 하나 식연은 작은 방계 출신으로 뒷배가 많지 않습니다. 벗 중에는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자가 적지 않으나 다 상양관에서 왕야가 상대하셨던 그 명장들입니다. 현재 백의는 병권을 잃었고 화엽은 북쪽 주둔지에서 토지나 경작하는 신세이니 식연을 위해 황성에서 움직여줄 능력 있는 인물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진북후 뇌천엽이 식연의 일에 매우 열성이라 들었습니다. 금수와 함께 사절단을 보내어 어사들을 만나 식연 대신 선처를 청한다고 합니다. 이는 어사단이 계속 하당으로 출발하지 않고 일을 미루는 이유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진북국은 황실에서 우리 리국과 비슷한 시골 제후입니다. 뇌천엽이 설산의 백호라고는 하나 대신들에게 대접받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식연은 죽는 겐가?”

“7~8할은 그렇다 할 수 있지요.”

영무예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턱의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천계에 있을 때 자네가 돈을 좀 써서 대신들을 우리 편으로 매수하겠다 했었지. 자네가 매수한 인물에 천계7어사 중 누가 있는가?”

사현이 웃으며 답했다.

“천계7어사의 이름은 모두 매수하고자 했던 명단 제일 위에 있었지요. 제가 일도 아주 확실히 처리해두었습니다. 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회신도 받았지요. 그리고 다른 크고 작은 약점도 쥐고 있습니다. 직권 남용, 뇌물, 축첩(蓄妾), 황음(荒淫) 등 수면에 드러나면 어사들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질 만한 일들입니다. 왕야께서 이들을 이용해 식연을 살리려 하신다면 9할의 승산이 있습니다.”

영무예가 무릎을 탁 쳤다.

“그럼 식연을 살리지! 하지만 목숨만 살리게. 절대 감옥에서 풀어주면 안 돼.”

“명 받들겠습니다. 내일 아침 바로 처리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어사들이 제 서신을 받고 감옥에 있는 식연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삭북 늑대왕은 정말 남하하겠는가?”

영무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둑판을 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돌연 낮고 삼엄하게 바뀌었다.

“모르겠습니다. 누염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누염이 북도를 점령하고 전체 만족이 그를 대군으로 선출하게 만든다면 남하할 힘을 갖게 되지요. 우리 측 정보에 따르면 적어도 누염에게 남하할 용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자는 여숭이 아니에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살인하는 무사입니다.”

“정말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백의, 식연, 화엽이 우리와 손을 잡을까?”

영무예가 눈을 가늘이며 차가운 눈초리로 사현을 쳐다보았다.

“그럼요! 서로 철천지원수이기는 하나 우리도 그들도 동륙이 만족의 전쟁터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사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영무예가 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사실 삭북의 늑대왕과 전장에서 만나보고 싶기도 해. 모우도 얼어 죽는 북쪽에서 오랜 세월 틀어박혀 지냈다지. 무엇이 이자를 살아남게 했으며, 다시 돌아와 적의 아들에게 복수하게 하는지 알고 싶군.”

“안타깝게도 정말 그리 된다면 우리가 북륙의 만족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도처에 시체가 널린 동륙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참, 아국의 국사 뇌벽성 선생이 황성에서 황제의 총애를 얻은 것 같답니다. 현재 태청궁 초양전에 머물며 이미 황실의 국사가 된 것 같다더군요. 뇌벽성을 천거한 이는 희 황제의 누님, 능락 장공주 백릉파라 합니다.”

* * *

1) 실질적인 이득, 또는 반상에 돌을 놓아 획득한 자기 소유로 확신할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키는 바둑 용어.

2) 귀나 변의 실리를 안쪽으로 보고 그것의 바깥쪽에 형성된 세력을 상대적으로 이르는 바둑 용어.

3) 눈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이후 수순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형세를 가리키는 바둑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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