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71화 (27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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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9)

지난 일을 생각하자 식연은 소리 없이 웃음이 났다. 고개를 들고 창밖의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며 지붕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어젯밤 비가 조금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지붕에 물이 샜다. 이곳에 온 뒤부터 내내 그러했지만 고치는 사람이 없었다. 식연은 가끔 ‘여기가 남회의 깊은 감옥인가?’,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감옥에 범죄자를 가둘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이 감옥은 식연을 가둬둘 수 있었다. 식연이 남회의 ‘반성옥’에 갇힌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었다.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감옥은 언제고 무너질 것 같아 보였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점은 식연의 사건과 비슷했다. 절차대로라면 식연은 주요 범죄자이기에 황실의 어사대에서 신문을 하고 신문이 끝나면 천자검(天子劍)으로 형을 집행해야 했다. 하지만 반년이 다 되어가도록 어사대 대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옥졸들도 과거 권세 높은 귀족 장군이 조금 성가셨다. 내심 빨리 신문하고 형을 집행해 목을 베고 끝내 버리길 바랐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귀를 찌르는 쇠사슬 소리가 나더니 감옥 바깥문이 열렸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시커먼 인영 하나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왔다. 그자는 순흑색에 가까운 두툼한 외투를 걸쳤다. 무거운 소가죽 장화를 신은 듯 발소리가 묵직했다. 식연은 장화 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것은 군용 제식 장화로, 들어온 사람은 군인이 틀림없었다.

그자가 이중 난간을 사이에 두고 식연의 감옥 앞에 섰다. 그자 옆으로 굽실대는 옥졸 한 명이 따라왔다.

“흠차 대인, 이자가 죄인 식연입니다. 하지만 얕보진 마십시오. 하옥되기 전에 남회성에서 내로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지금은 물에 빠진 개꼴이 났지만요.”

옥졸이 손가락으로 감옥 안을 가리켰다.

“쉿.”

흠차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술에 댔다.

“말할 필요 없다.”

“식연, 일어나. 이분은 우림천군이자 폐하의 흠차 대인이시다. 흠차 대인께서 물을 게 있다신다! 어서 정신 차려!”

옥졸이 난간을 발로 찼다.

“그만. 따로 얘기하겠다.”

흠차가 손을 내둘렀다.

옥졸은 눈치 빠르게 물러갔다. 밖에서 감옥 문이 잠기고 깊은 감옥 안에는 식연과 흠차 두 사람만 남았다. 흠차가 시선을 들어 감옥 안의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천창(天窓)을 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습한 악취가 나고 빛이 들어올 곳은 천창 하나뿐인 이런 곳에서 반년이나 견뎌내셨군요. 가끔 장군의 인내심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 주제에 감방을 고를 수는 없지 않은가?”

식연이 느릿느릿 일어나 난간 가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도 위태위태해. 천계7어사가 심문하러 오기도 전에 어느 비오는 밤 건물이 무너져 깔려 죽을까 봐 걱정이야.”

“장군은 3중 수갑을 채워 지하 10장 깊이 감옥에 가두었어야 했습니다. 음식을 던져줄 작은 구멍 하나만 남겨두고 수천 근의 바위로 감옥 문을 막는 게지요. 어전우장군을 가두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요.”

흠차의 말에 농이 묻어났다. 흠차는 쓰개를 벗고 영기(英氣) 넘치는 얼굴을 드러냈다. 살짝 느긋한 모습이 식연과 좀 닮아보이기도 했다. 흠차는 황실 우림천군의 제식 갑주를 입고 있었다. 외투의 옷깃에는 황실 군대만이 지닐 수 있는 불장미 군 휘장이 달려 있었다.

“어찌 이런 때 왔지? 우림천군에 재직하면서 주둔지를 떠나 남회에 오다니 너무 큰 모험을 했군.”

“이번에는 공적인 업무로 왔습니다. 천계7어사의 연명 서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리경홍에게 장군의 사건에 대해 묻는 서한이지요. 제가 흠차인 척하는 줄 아셨습니까?”

흠차가 웃으며 난간 너머로 기름종이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식연은 꾸러미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갓 구운 바삭한 간식거리가 들어 있었다. 오리기름소, 앵두 소병, 죽순 만두, 소고기 찐만두 등이었다. 아직 모락모락 김도 났다. 흠차는 또 전신을 뒤덮은 외투 안에서 주석 병을 하나 꺼내 마개를 땄다. 진한 술 냄새가 넘쳐흘렀다. 흠차는 또 외투 안에서 작은 백동 함을 꺼냈다. 안에는 바삭하게 튀긴 땅콩이 들어 있었다……. 몸 어디에 숨겨둔 것인지 하나씩 꺼내는데 얼마 후 일고여덟 가지의 정교한 먹거리가 식연의 감옥 안으로 건네졌다.

흠차가 몸을 툭툭 털며 말했다.

“이게 답니다.”

식연은 튀긴 땅콩을 한 알 씹으며 웃었다.

“우림천군의 외투는 정말 쓸모가 많군.”

“하나 큰 것으로 입었지요. 장군, 가리지 말고 다 드십시오. 아침에 남회에 도착하자마자 시장에서 산 겁니다. 다 먹고 나면 한동안은 옥(獄)밥만 드셔야 합니다.”

“가릴 리가. 사규는 내 입맛을 잘 알지 않나.”

식연이 주석 병에 입을 대고 조금 마셨다.

“우림천군에서 아주 잘나가나 보군? 흠차의 중임까지 맡다니.”

사규가 고개를 저었다.

“잘 나간다고 할 순 없습니다. 장군 한 번 뵈러 오려고 돈 주고 산 관직입니다.”

주석 병을 든 식연의 손이 멈칫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장군의 지시대로 내보냈던 자들이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예측한대로 익림 곁에 그가 가장 신뢰하는 동륙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화벽해라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에 나그네 한 무리가 진북의 팔송성에서 야북마를 꽤 많이 샀답니다. 한주 북부에 간다고 했다더군요. 그 무리의 우두머리는 노인인데 항상 검은색 장포를 입으며 그를 ‘스승님’이라 부르는 청년들에 둘러싸여 있답니다.”

식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게 뜬 눈에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산벽공. 희 황제의 국사였지. 청양부에 사절로 간 후로 그를 본 사람이 없어. 진월이 이번에 총출동한 모양이군. 뇌벽성, 산벽공, 화벽해는 모두 교장급 인물일 거야.”

“살짝 절박한 느낌이 듭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큰 압박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3대 교장이 한 번에 나설 리 없으니까요. 이번 움직임과 비교하면 상양관은 그저 훈련에 불과합니다. 한주에서 삭북부가 승리를 거두고 청주에서 익씨가 승리를 거두면 진월이 북륙 절반을 장악하는 셈입니다. 그리 되면 진월은 분명 만족과 우족을 들쑤셔 동륙으로 진군할 겁니다.”

“익천첨 전하가 이미 청주 땅에 올랐다. 비록 혼자이나 여전히 익씨 사달극 가문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지. 거기에 황녀인 우연까지 데리고 있으니 화벽해의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거야.”

“단기간 내에 청주는 우리 약점이 못 된다 믿습니다. 저희 쪽 정보로 판단했을 때, 익림은 능숙한 책략가가 아니라서 모든 성방의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익림의 상대는 천무자, 그의 작은할아버지죠.”

식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

“가장 큰 문제는 한주다. 누염은 무시무시한 우두머리지. 그자가 북도성을 뚫으면 한주에는 더 이상 그를 막아낼 관문이 없어. 누염은 언제든지 남하해 해류가 잠잠한 틈을 타 천척해협을 넘어 순국 필지성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현재 순국은 삭북의 늑대왕을 막을 수 없습니까?”

“만족 6개 부락의 군대가 남하하는데 순국 하나로는 어림도 없지. 추호 화엽에게는 3만 풍호뿐이다. 그리고 만족 사내는 모두 기병이야.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화엽의 10배지.”

사규가 침묵했다. 여기 오기 전 그가 추론했던 바와 지금 식연의 추론이 일치했다. 그러나 식연이 양측의 현격한 실력 차를 비교해 설명하는 것을 직접 들으니 역시나 간담이 서늘해졌다. 천구 무사단은 상양관 전쟁 후 아직 충분한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전략도 짜지 못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숨은 적은 이미 새로운 공격을 시작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공격에 숨 쉴 틈이 없었다.

“영무예의 동향은 어떻지?”

식연이 술을 마시며 담담히 물었다.

“영무예는 남만 부락에서 빠르게 병력을 보강했습니다. 현재 적려와 뇌기의 병력은 상양관 전투 이전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훈련이 부족합니다. 백의는 이미 초위국 병권을 잃은 상태입니다. 지금 영무예가 청의강 방어선에서 초위국에 강공을 펼친다면 초위국 수도인 청강은 위기에 빠질 겁니다. 이 때문에 초위국은 청의강 방어선에 2개 군단을 증원하고 강을 따라 25채의 위성(衛城)을 지었습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신호를 삼아 서로 연락하고 협력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영무예의 뇌기를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기병 전술로 유명한 영무예는 성을 공격해 함락하는 전술은 안 쓰니까요. 청의강 서안에 상륙할 기회가 생기면 5천 뇌기병은 위성 방어선을 넘어 곧장 초위국 내로 진격할 겁니다. 뇌기를 추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영무예의 초위국 공격은 풍염 황제 이전 북륙의 만족이 천계성을 공격한 것처럼 막을 수 없습니다.”

“맞아. 백의 없이 초위국 산진은 일격에 무너질 거다. 백의가 직접 훈련시킨 병사들이라 다른 사람은 통솔 못 하지.”

“하지만 영무예는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적려 2개 군단, 총 2만 명은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치고도 창란도를 지키며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영무예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한주의 전세(戰勢)를 보려는 게지. 영무예도 누염의 위협을 감지했을 거다. 누염이 북도성의 대군이 되면 고작 순국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영무예도 안다. 만족이 동륙의 전쟁 국면에 끼어든다면 영무예는 불리해져. 동륙 4주 16국을 통일해 전부 리국으로 만드는 것이 포부인 자다. 만족이 자기 땅에 손대는 것을 허락할 리 없어.”

“그럼 장군께선 만족이 정말 남하한다면 영무예가 도리어 황실을 도와 만족에 대항할 거로 판단하십니까?”

사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황실을 돕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무예는 누염이 동륙에서 만날 가장 무시무시한 적 중 하나다. 동륙 최남단의 수사자와 한주 최북단의 흉악한 늑대는 절대 상대방이 자기 영토에서 살아 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식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무예의 생각이 짐작이 된다.”

“장군, 계획이 있으십니까?”

사규의 물음에 식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

“계속 정보를 모아라. 현재까지 모인 우리 세력으로 진월과 정면으로 맞붙게 되면 이길 수 없다. 진월의 기세가 등등하나 전략을 실현하기에는 아직 장애물이 많아. 익씨와 삭북부가 강대해질 수 있는지 여부가 진월 승부의 관건이다. 그리고 즉시 고월의에게 서신을 보내 무슨 일이 있어도 진북후 뇌천엽을 설득해 군사력을 강화하라고 전해라. 우인이 해안을 급습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해.”

“첫 소환을 받긴 했지만…… 고월의는 천구 무사단이 아닌데 우리 지시를 따를까요?”

사규가 망설이며 말을 보탰다.

“고월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따를 것이다. 고월의는 진북 장군이다. 진북의 국토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무사로서 그의 직무이지. 고월의의 생각도 내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

사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물었다.

“다들 장군이 여우처럼 교활하다 하지요. 그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제 마음도 간파하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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