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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6)
해가 지기 전, 북으로 전진하던 기병 부대는 철선강 가에 이르렀다. 만족 무사 100여 명으로 구성된 기병대였다. 한 사람당 괴력의 용혈마 두 필을 끌었다. 한 마리에는 사람이 타고 한 마리에는 행장을 실은 채 매우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천척해협을 넘어 육지에 오른 뒤 이레만에 그들은 초원 600리 깊이 들어왔다.
앞장선 청양 장군 철익이 강가에 멈춰 헐떡이는 군마에게 강물을 먹였다. 거대한 태양이 차츰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았다.
철익은 강 맞은편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세자, 열흘만 더 가면 북도성에 도착합니다. 길어야 열이틀입니다.”
“길을 알아보겠어요. 여기는 제가 자란 등가아 초원이죠.”
아소륵이 나직이 말했다.
아소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족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소매가 넓은 옅은 남색 옷에 쇳조각을 엮은 소가죽 갑옷을 걸쳤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정수리에서부터 한 가닥으로 땋아 묶은 뒤 오금색 비단 망으로 감아 정수리에 얹었다. 영월도는 삼베에 감아 말안장 한쪽에 걸었다. 만족인치고 지나치게 고운 얼굴만 빼면 영락없는 만족 소년으로 보였다.
그들과 불화랄의 귀궁 부대가 헤어진 지 반년이 다 되었다. 불화랄은 먼저 북도로 돌아갔다. 아소륵과 철익이 이끄는 100명의 철부도 기병은 너무 눈에 띄었다. 철부도 갑옷을 적재할 수 있는 용혈마만 해도 동륙 최고의 군마보다 사람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들은 동륙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내다가 출동했던 정위부 수색병들이 지치자 그제야 일부 상인의 도움을 받아서 ‘검은 고등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중주 서쪽 해안을 따라 은밀히 북쪽으로 항행했다. ‘검은 고등어’는 상선(商船) 이름으로 사람을 밀항시켜 주는 배였다.
살아남기 힘든 만족 목민들 중에 모든 소와 양을 돈 대신 동륙 상인에게 주고 ‘검은 고등어’ 배의 선창 아래 폐쇄된 선실에 자리를 하나 얻는 경우도 있었다. 밀항선은 그렇게 유목민을 태우고 머나먼 길을 따라 완주까지 왔다. 특수한 설계 덕에 몇 번 대윤의 ‘해사감’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아소륵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흐르는 철선강을 보았다. 석양에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자연스레 오래 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곳의 강물은 정말 붉디붉었다. 반은 물이었고 반은 피였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불길이 장막들을 태웠고 화염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아소륵은 괴롭고 슬픈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고개를 돌려 철익을 보았다.
“오늘 여기에서 야영하나요?”
“네.”
철익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 맞은편 기슭을 쳐다보았다.
“철선강을 지나면 파소이 가문의 영토입니다. 세자의 고향이지요.”
철익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말을 꺼냈다.
“세자, 이 강을 건너면서부터는 세자라 부를 수 없습니다.”
아소륵은 어리둥절해 철익을 쳐다보았다.
“오는 내내 말씀드리려 했지만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이런 대화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말이지요.”
철익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식으로 제천 의식을 거행하지는 않았지만 선대 대군께서 돌아가시기 전 형님 손을 잡고 대군의 자리를 물려주셨습니다. 지금 북도성의 신임 대군은 세자의 형님이신 여수우 전하입니다. 세자는 그분의 막내아우이시니 아소륵 대나안으로 호칭이 바뀔 것입니다. 다른 형님들은 나안이라 부릅니다. 세자께서는 청양의 세자였기 때문에 대나안이고요.”
만족에서 ‘나안’은 지위가 높은 귀족을 존칭하는 표현이었고 대나안은 칸에 버금가는 귀한 호칭이었다.
아소륵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철익 장군, 알아요. 나는 대군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형님이 대군이 되어 나도 무척 기뻐요. 대나안이라, 아주 좋네요. 전에 사람들이 나를 세자라고 불렀지만 난 정말 대군이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 말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슬그머니 이상한 감정이 차올랐다.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라 10년이 지나 그가 나고 자란 초원에 다시 돌아왔더니 많은 것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익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또 있습니다. 대군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대연지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형님이 혼인하셨습니까?”
아소륵은 깜짝 놀랐다. 여수우는 1왕자이던 시절 매일 밤 젊은 여인들과 달빛 아래에서 노래를 불렀다. 장막에는 늘 다른 여인들이 드나들었고 여수우는 모든 여인에게 자상하고 살뜰했다. 많은 여인이 1왕자에게 시집가고 싶어 했지만 여수우는 그녀들을 아내로 들이지 않았다. 여수우는 여인에게 다정하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라 한 여인에게 묶여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데 놀랍게도 그런 그에게 대연지가 생겼다.
“네. 작년 가을에 혼인하셨습니다. 대군께서는 대연지를 많이 아끼십니다. 가장 귀한 보석처럼 바라보시지요.”
“대연지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아소륵은 형수에게 경외심이 생겼다. 존귀한 형수가 철익에게 수천 리를 가 자신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니 매우 중요한 말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대군 자리에 허튼 꿈을 품지 말라는 훈계일수도 있었다.
“자기 이름을 말해주라 하셨습니다.”
“대연지의 이름요?”
아소륵은 어리둥절했다.
“대연지의 이름은 소마입니다.”
순간 아소륵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련이 일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랬다. 10년이 지나 나고 자란 초원에 돌아왔는데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밤이 깊어 고요했다. 드넓은 초원에 바람이 약하게 불었다. 철부도 무사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사냥한 짐승을 몇 마리 걸어 굽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달빛 아래에서 청양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소륵은 혼자 강가에 앉아 멀리 모닥불을 바라보며 찰랑찰랑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한때 소마와 소마의 언니 오앙마와 함께 이 강둑에서 놀곤 했다. 문득 소마와 관련된 아주아주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일들도 있었다. 그때 소마는 어려서 말을 할 줄 몰랐고 뒤뚱뒤뚱 걸으며 잘 넘어졌다. 절세미녀인 오앙마와 비교하면 소마는 볼품이 없었다. 오앙마가 알록달록한 공작이라면 소마는 공작의 깃털 아래에 있는 회색 오리 같았다. 세 사람은 친구였고 함께 강둑을 달렸다. 소마는 오앙마의 하늘하늘 나부끼는 붉은 치마 뒤를 쫓아 달려가며 제 언니의 손에 들린 풀로 엮은 메뚜기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소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고 그러면 풀로 메뚜기를 엮던 철감이 웃으며 가서 소마를 안아 들었다. 철감이 한 마리 더 만들어 주겠다며 달래면 그제야 소마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아소륵은 허리띠를 잘라주고, 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주고, 아궁이 위에 아소륵의 신발을 올려놓고 말려주었던 소마를, 잠들지 못하는 밤 곁에 앉아 말없이 그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던 소마를 떠올렸다…….
“대나안, 대연지께서 대군께 시집가지 않았다면 아내로 맞으셨을 겁니까?”
갑자기 아소륵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일어선 아소륵은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온 철익을 발견했다. 철익은 아소륵의 어깨를 토닥이며 함께 앉자 눈짓을 보냈다. 아소륵은 살짝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들켜 무척 난감해진 그런 기분이었다.
아소륵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소마는 내 좋은 친구거든요.”
“사실 저도 대나안께서 대연지를 아내로 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회성에 두 달간 숨어 지내면서 우족 소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족 여인에 비하면 대연지는 많이 부족하지요.”
철익이 마른 풀 하나를 집어 입에 물고 천천히 씹었다.
아소륵은 깜짝 놀랐다. 철익처럼 무뚝뚝하고 눈치 없는 사람도 그와 우연의 일을 알 정도면 이 비밀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 것이었다.
“하지만 우연만 몰라요.”
아소륵은 말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모르고 싶은 건지도 모르죠.”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농담 하나 해드릴까요? 무당 하나가 제를 올리다가 반달 천신을 보았습니다. 반달 천신은 무당에게 이리 말했습니다. 나와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법력이 대단하니 네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마. 소원을 말해보아라. 그러자 무당은 이리 말했습니다. 구주를 통일하고 싶습니다! 반달 천신은 허튼 소리 하지 말라면서 구주를 통일하는 것은 신의 사자인 철심왕의 공적이며 무당이 나설 일이 아니니 다른 걸 말해보라 했지요. 무당은 고심 끝에 작은 소원을 말하겠다면서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요즘 늘 장막 너머에서 자신에게 불평만 해댄다고 말입니다. 반달 천신은 한참을 말이 없었습니다.”
철익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반달 천신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친애하는 무당아, 그냥 구주를 통일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네가 철심왕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네 아들이 철심왕이 되기를 바라느냐?”
철익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그러나 아소륵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소륵의 표정에 철익도 살짝 슬퍼졌다. 더는 웃을 수가 없었던 철익은 두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난 괜찮아요. 유치한 생각이 들었어요. 소마가 큰형님께 시집을 갔으니 이제 나는 신경 쓰지 않겠구나 싶어서요……. 사실 큰형님과의 혼인이 좋은 일이란 거 알아요. 큰형님은 둘째 형님과 달라서 여러 여자랑 그러지 않으니까요. 셋째 형님처럼 여자한테 늘 차갑지도 않고요. 큰형님은 여자에게 살뜰하시죠…….”
아소륵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소마도 시집을 갔으니 더는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철익은 한참을 생각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힘껏 아소륵의 어깨를 툭툭 쳤다.
“대나안, 사람들은 저더러 세심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일들을 잘 알지 못하고요. 하지만 대나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대나안을 좋아합니다. 10년이 지났어도, 많은 상황이 달라졌어도 대나안을 향한 대연지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믿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