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67화 (26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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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5)

“그럼 30년 전 아버지와 늑대왕의 결전이 어떠했는지 목려 장군에게 들어봅시다.”

여수우의 말에 목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대 대군이 갓 즉위했을 당시 모든 장막의 군사가 대군께 완전히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은 무사 수만 명을 이끌고 먼저 철수해 버렸지요. 그때 우리가 지휘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1만 2천 명, 그중에 기병은 2천 명뿐이었습니다. 선대 대군께서는 늑대왕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북도성 안을 전쟁터로 삼은 게지요. 삭북과 교전한 우리 기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패했고 철수하면서 삭북부에게 성문을 뚫렸습니다. 늑대왕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백랑단을 이끌고 북도성 안으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극도로 굶주려 있던 늑대들은 산 사람을 보자 냅다 달려들어 물어뜯었지요. 그들이 혼란스러울 때가 바로 우리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늑대왕이 사람들을 이끌고 금장궁 깃발을 빼앗으러 올 때 우리는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북도성 안 도처에 맹수를 사냥하는 함정을 묻어두었고 금장궁 앞에는 특히 함정이 많았습니다. 늑대들이 하나둘 덫에 빠졌고 그때 우리 무사가 돌격해 삭북인에게 화살을 쏘았습니다. 주위는 온통 함정이었으니 기병은 전혀 쓸모가 없었지요. 우리 무사들은 삭북의 늑대 기병을 한 명씩 쏴 죽일 수 있었습니다. 삭북인은 전열이 흐트러졌고 늑대왕은 그제야 자신이 선대 대군을 얕잡아봤음을 깨달았지요. 누염은 여숭 곽륵이 파소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 즉위한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안 그랬다면 교활한 누염이 절대 이런 덫에 걸려들 리 없지요.”

목려가 주위를 둘러보며 차갑게 웃었다.

“이제 늑대왕이 돌아왔소. 당신들은 늑대왕이 어떤 자라 생각하시오? 삭북의 늑대왕이 영토와 가축 조금 얻겠다고 목표를 버릴 인물 같소? 누염이 코웃음을 칠 소리 마시오.”

목려는 차례로 금장궁 안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켰다.

“내 말해두겠는데 이 성안에 늑대왕의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은 단 세 개요. 대군의 머리, 대군의 호칭, 그리고 이 성!”

여복은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을 애써 억누르는 여수우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목려 장군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대군께서는 누염의 늑대 기병을 지나치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쨌든 초원 최강의 기병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청양부의 호표기이지 백랑단이 아닙니다. 북황의 치랑은 말 같지 않아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체형이 일반 늑대보다 거대해 사람이나 겨우 그것의 목에 탈 수 있을 정도라지요. 매일 사람을 태우고 질주하면 놈들도 몹시 지칠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이든 늑대든 몸을 보호할 갑옷을 걸칠 수 없습니다. 안 그러면 늑대가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 진형을 잘 배치하고 백랑들이 출격할 때 화살로 대항하면 승산이 높습니다.”

여수우는 조금 위안이 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철진! 대군은 직접 기병 대군(大軍)을 통솔해 본 적이 없다지만, 자네도 모르는가? 언제든 우리는 삭북의 백랑들과 전쟁을 치를 텐데 이런 위로의 말이 무슨 소용인가?”

목려가 눈썹을 치켜뜨고 철진에게 화를 냈다.

철진은 묵묵히 한 걸음 물러났다. 노장군 목려의 위세에 맞설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대군, 백랑단은 초원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적수 중 하나입니다. 맞습니다, 철진 장군 말도 다 맞아요. 치랑은 그리 빠른 편이 아닙니다. 오래 버티지도 못하지요. 하지만 피에 굶주린 놈들입니다! 배불리 먹기 전까지는 피를 보면 미친 듯이 흥분합니다. 놈들은 두 사람 키만 한 높이로 뛰어오를 수 있으며 그 높이에서 사람을 덮칩니다. 일반 기병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어요!”

목려가 싸늘하게 여수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청양의 호표기가 초원 최강의 기병으로 불리는 이유는 대군의 조상 때문입니다. 여청양 의마덕 파소이가 이 군대를 이끌고 초원을 평정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대군과 대군의 조상은 다릅니다!”

여수우는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나와 조상은 다릅니다. 조상들은 청동의 피를 지닌, 초원의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미치광이 전사였죠.”

“대군, 청동의 피는 타고나는 문제로 대군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대군 휘하에는 충성스럽고 용맹한 무사들이 있습니다. 칼자루를 쥔 사내는 흉악한 늑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군의 아버지께서도 청동의 피가 없었지만 누염을 무찌르고 수십 년간 그 악마가 북방의 설원으로 물러나 있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전술을 믿고 백랑을 상대하십시오.”

목려가 한 걸음 다가갔다.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시간을 끄십시오. 치랑의 기운이 최고일 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최대한 활을 사용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지 않는 한 육탄전은 안 됩니다. 이 목려를 믿으신다면 제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백랑단의 본진으로 돌격하여 대군을 위해 공을 세우겠습니다!”

“장군을 믿으라?”

탑리한 가문의 가주가 노기를 띠며 조소했다.

“장군 나이 벌써 예순이오. 무슨 근거로 누염의 늑대 기병에 맞선다는 거요?”

목려가 고개를 홱 돌리며 사납게 받아쳤다.

“누염은 이미 일흔이오! 백랑단과 전쟁을 치러본 적 없는 귀족들은 무사의 나이를 논할 자격이 없소!”

알적근 가문의 가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무모하게 공격했다가 청양이 처참하게 당할 수도 있소! 장군이 누염을 무찌른다? 우리가 어째서 곧 죽을 늙은이가 청양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목려 장군, 10년은 더 살 수 있겠소? 자기 10년 목숨이나 걸 것이지, 어찌 청양부 수십만 명의 목숨까지 걸고 도박을 하자는 게요!”

알적근 가문 가주가 여수우의 옥좌에 다가가 말했다.

“대군, 저 미치광이의 헛소리는 듣지 마십시오.”

“누가 미치광이란 거요?”

목려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말 타고 칼 휘두를 줄밖에 모르는 미치광이를 말하는 거요!”

알적근 가문 가주도 화가 나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려는 더 말하지 않고 칼을 꽉 움켜쥔 채 한 걸음 내디뎠다.

“칼로만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미치광이가 아니고 뭐요?”

알적근 가문 가주도 한 걸음 물러나며 칼자루를 쥐었다.

몇몇 가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칼자루를 잡았다. 금장궁 안, 목려와 귀족들은 칼자루를 쥐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았다.

여응양 나안이 두 무리 사이로 걸어와 그들을 갈라놓았다. 냉정한 여응양의 표정이 금장궁 내 짙은 적의를 누그러뜨렸다. 목려와 가주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여응양이 여수우에게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전쟁을 하고 말고는 병력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삭북부가 왜 겨울에 북도성을 포위했는지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동륙인의 병서(兵書)를 읽은 적 있는데 성을 포위하기에 가장 적절한 계절은 가을입니다. 날씨가 좋으니 군막을 두껍게 칠 필요도 없고 성 밖에서 잘 익은 가을 보리를 수확해 군량으로 삼을 수도 있지요. 게다가 장기간 포위를 한다고 해도 봄에 시작해야 마땅합니다. 한겨울은 성 밖 환경이 열악할뿐더러 식량도 부족하며 후방에서 물자를 보급하기도 어렵습니다. 성안에 머무는 우리는 오히려 집이 있고 견고한 장막도 있어 바람과 눈을 피할 수 있지요. 삭북부는 왜 이런 시기를 선택했을까요?”

“여응양 나안의 말은 일반 군대의 경우에는 맞습니다. 하지만 나안의 외조부인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은 초원의 보기 드문 병법가입니다. 계절에 대한 이해가 다른 사람과 다르지요. 그가 겨울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부락이 우리를 지원하러 오기에 풍설과 추위라는 최대 난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풀이 말라 죽었으니 장거리 지원을 나가려면 대량의 마초도 가지고 가야 하고요.”

목려가 여응양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까닭에 누염은 우리가 이곳에 발이 묶인 지금을 일대일로 붙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선택한 겁니다.”

여수우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소. 이 시기가 우리에게는 제일 불리한 때이지.”

여하가 나섰다.

“성안에 양 떼와 비축해 둔 마초가 있습니다. 저들의 식량이 우리보다 많을 수는 없으니 성을 굳게 지키며 안 나가면 됩니다.”

“거대한 늑대들은 사냥을 하게 풀어줄 수도 있지만 삭북부의 늑대 기병들은 자주 그리 하지는 않습니다.”

목려가 나직이 말을 보탰다.

여하는 넋이 나갔다.

“그럼 늑대 떼의 먹이는…….”

“놈들은 사람을 먹고 전쟁을 갈망합니다. 이런 치랑은 시체도 먹지요!”

목려가 뭇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적인 확신 없이는 절대 성을 나가 적에 맞서서는 안 됩니다. 시체 한 구도 백랑단에게는 군량이 됩니다.”

목려가 천천히 주먹을 꾹 말아 쥐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일단 성을 나가면 누염 그 늙은 늑대의 목숨을 가져와야 합니다!”

“대군, 보시면 알겠지만 목려는 미쳤습니다. 백랑단을 알고, 백랑단과 싸워본 적이 있다고 해도 목려는 적의 군사력이 우리보다 강한 것을 뻔히 알면서 전쟁을 하려 합니다.”

탑리한 가문의 가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목려, 무엇 때문에 이러시오? 누염과의 원한 때문이오? 아니면 전공(戰功)을 위해서요?”

목려는 꾹 다문 입술에 힘을 주며 말없이 재차 칼자루를 잡았다.

“미친놈!”

가주들도 더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칼집에서 1척 만큼 칼을 뽑으며 목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목려는 물러나지 않았다. 여응양과 9왕이 그 사이에 끼어들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목려와 가주들 사이의 거리는 칼을 뽑으면 상대방의 얼굴을 벨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그만하시오! 무엄하오!”

여수우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분노가 어렴풋이 서려 있었다.

“전쟁을 하든 삭북부에 고개를 숙이든 둘 중 하나겠지! 이틀 후, 이 시각에 이곳에 모이시오. 그때 내 결정을 말해주겠소!”

말을 마친 여수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장궁을 떠났다.

목려가 금장궁을 나섰다. 뒤에서 바짝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목려는 돌아보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목려! 자네 정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걸고 삭북의 늙은 늑대를 죽이러 갈 생각인가?”

대합살이 나직이 물었다.

“대합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목려는 멈춰 섰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30년 전 삭북의 늑대가 북도성에서 사람을 잡아먹을 때, 대군도 보지 못했고 나안들도 보지 못했지. 막속이 가문의 형제도 보지 못했어. 심지어 여표은 칸도 못 보았네. 하지만 자네와 나, 우리 두 늙은이는 직접 보았어…….”

대합살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목려를 가리켰다가 다시 자기를 가리켰다.

“시간을 끌고 활을 쓰는 방법만으로 삭북의 늑대 떼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목려, 가슴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말해보게. 대군에게 한 약속, 얼마나 자신이 있는가?”

“자신 없습니다.”

목려가 천천히 돌아섰다.

“자네!”

대합살이 눈을 부릅떴다. 나이든 눈은 분노로 가득했다.

“청양 군사와 부족민 전체의 목숨을 거는 짓이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오늘 금장궁에 있던 사람들 절반은 대군에게 성을 버리고 남으로 도망치라 설득하려 했습니다. 양고기를 먹고 양젖을 마시며 온몸이 비계 덩어리라 칼도 못 드는 저 귀족들은 대군에게 성을 버리고 남으로 도주하라 설득하러 왔단 말입니다.”

목려가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한 소덕랍급. 대합살도 가슴에 손을 얹고 내게 말해보십시오. 성을 버리고 남으로 도주하면 몇이나 살겠습니까?”

대합살은 아연해졌다. 마음속 마지막 한계선이 무너져 내리며 자신의 무력감이 느껴졌다.

대합살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비틀비틀 물러나며 나직이 말했다.

“목려, 솔직해져 보게. 여숭이 죽고 이 청양부에서 나를 사한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네. 오랜 벗에게 못할 말이 무에 있겠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야?”

목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지금 북도성에는 70만 명이 있습니다. 성벽 덕분에 삭북부가 공격은 못 하고 포위만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성을 버리면 빠른 말을 탄 사람만 달아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럼 노인과 아이들, 여인들, 병약한 사람들은 어쩝니까? 저들은 말을 탈 수 없으니 결국 백랑단의 먹이가 될 겁니다. 빠른 말을 타는 사람들에게 도망칠 시간을 조금 벌어주겠지요.”

목려가 자기를 가리켰다가 또 대합살을 가리키더니 마지막으로 금장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한, 그때 정말 도망칠 수 있는 건 나와 대합살, 그리고 저기 살만 피둥피둥 찐 귀족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청양에 우리들만 남으면 멸족과 뭐가 다릅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진안부의 백로합 고살이처럼 전 부족민을 이끌고 전사하겠습니다!”

“차라리 전사하겠다니……. 목려, 미쳤나?”

“겁쟁이만이 조상께서 남겨주신 땅을 사람 잡아먹는 야수에게 갖다 바칠 겁니다!”

목려는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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