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64화 (26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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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랑기 (2)

9월 열사흘, 이른 아침.

불화랄은 북도성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커먼 장궁을 들고 바람 속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불화랄은 수십 명의 형제를 이끌었다. 그의 형제들은 최정예 귀궁이었다. 이 만족 사내들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목민 같지만 매의 눈을 지녔다. 수십 쌍의 눈이 불화랄과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비휴 장막의 3천 궁수가 있었는데 모두 어릴 적부터 활로 기러기를 쏘았던 정예병이었다. 보통 사람들 눈에 하늘의 까만 점으로 보이는 것도 이들은 검은머리독수리인지 흰머리독수리인지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이 수천 쌍의 눈도 같은 곳을 향했다.

초겨울 아침, 북도성 꼭대기에서 수천 명이 바람소리를 들으며 같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북도성 북쪽, 성벽으로부터 500보 거리. 그 자는 거대한 화염 같은 적홍색 준마를 타고 있었다. 준마는 바람을 맞으며 나직이 울부짖었다. 말 주인이 살며시 말의 목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주인이 몸에 걸친 적홍색 비단 도포는 준마의 색깔처럼 선명한 것이 황량한 초원에서 일렁이는 한 송이 화염 같았다. 동륙의 직녀(織女)들만 저런 호화로운 솜씨를 지녔다. 도포에 하나하나 금실로 수놓아진 문양은 한 폭의 완전한 한주 지도였다. 그자는 이 도포만으로 사치스러움을 드러내기 부족한 듯, 도포 밖으로 순금 사슬을 잔뜩 걸었는데 족히 수백 줄은 되어 보였다. 두께가 남자 손가락만 한 사슬이 갑옷처럼 겹겹이 쌓였다. 겉으로 드러낸 한쪽 어깻죽지도 온통 금빛이었다. 그것은 문신이었다. 근육이 울근불근한 사내의 팔을 거대한 금색 용이 둘둘 휘감고 있었다.

그의 100보 뒤로 기병들이 일자진을 가지런히 펼쳤다. 사나운 준마 수천 마리는 주인에게 통제된 채 짜증스럽게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전부 북방 초원의 설령가 종 군마였다. 이들은 전장의 냄새를 맡으면 흥분하며 공기 중의 긴장감을 감지한다. 기병들은 다양한 목민 의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이는 겉에 단순한 소가죽 갑옷을 걸쳤다. 말안장에는 날이 긴 도끼 혹은 몸통이 넓은 쇠칼이 꽂혀 있고 허리춤의 화살집에는 검은 수리 깃털이 달린 화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붉은 말의 주인은 손에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 속에서 청색 늑대 한 마리가 일렁였다.

삭북의 창랑기가 수십 년 뒤 다시 삭방원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불화랄은 그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다. 삭북부의 세자 호도로한. 제 아버지 누염처럼 늠름하고 용맹한 자였다.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해 아내를 수백 명이나 두었다. 손님 접대도 좋아하는 호도로한은 멀리서 손님이 오면 가장 독하고 맛좋은 술로 정성껏 대접했고 자신이 먼저 물마시듯 시원하게 술을 들이켰다. 호쾌하고 거리낌이 없는 그는 술에 취하면 매력적인 춤을 추었는데 춤추는 자태가 웅장하면서도 고왔다. 그가 춤을 출 때면 아리따운 아내들이 장막으로 들어와 손뼉을 치며 그를 둘러싸고 흥을 돋우었다. 하지만 누가 화나게 하면 무쇠 같은 팔뚝으로 황소의 목도 비틀어버릴 수 있었다. 제 아버지처럼 똑똑하기도 해서 삭북부 영지의 강물에서 캐낸 사금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만족 귀족은 황금을 사려면 삭북부의 호도로한이나 동륙 행상 중에 선택해야 했다. 호도로한은 황금으로 소와 양, 여인과 진귀한 훈향을 교환했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은 호도로한의 장막을 지날 때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휘황찬란한 장막에는 용연향 향기가 감돌았고 우람한 사내가 반라의 여인을 끌어안고 검은담비 가죽 방석에 앉아 독주를 퍼마셨다.

초원 사람들은 호도로한을 ‘황금왕’이라고 부르며 그의 재력을 부러워했고 그의 힘 또한 두려워했다.

불화랄은 한 번도 호도로한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적은 부러워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호도로한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불화랄은 열세 살이었다. 하지만 천리 밖에서도 황금과 훈향, 미녀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내의 야수 같은 흉악함이 느껴졌다. 불화랄은 언젠가 이 사내와 전쟁터에서 만날 거라고 예감했다. 그러나 그날은 불화랄의 생각보다 더 빨리 왔다.

호도로한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던 그가 입을 씩 벌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호도로한이 손을 휙 휘두르자 매처럼 날쌔고 용맹한 삭북 무사가 뒤에서 말을 몰아 나와 호도로한이 들고 있던 창랑기를 받았다. 그 무사는 깃발을 들고 앞으로 질주했다. 북도성 성벽까지 200보를 남겨둔 지점에서 깃대를 바닥에 푹 꽂았다.

그때 태양이 동쪽에서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다. 창랑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순금으로 둘러싸인 깃대에서는 눈부신 빛이 반사되었다.

“사흘째네요.”

귀궁 무사 하나가 나직이 말을 꺼냈다.

“그래, 사흘째다. 아주 시간도 정확하군.”

불화랄이 담담하게 말했다.

삭북부가 북도성 밖에 진을 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삭북부 무사 하나가 창랑기를 북도성 북문 앞에 꽂았다. 그 외에 삭북부는 다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서신을 보내지도 않고 싸움을 걸지도 않았다. ‘황금왕’은 인내심이 극도로 뛰어났다. 북도성은 벌써 사흘 내리 성문을 폐쇄했다. 대군은 함부로 성을 나가는 자는 참수한다고 명을 내렸다. 성 안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많은 이가 저 깃발이 삭북부와 청양부의 영토를 새롭게 가른다고 믿었다. 앞으로는 그 깃발을 기준으로 북쪽은 삭북의 영지라고 말이다.

불화랄은 고개를 들고 제 머리 위의 깃발을 보았다. 청양부의 표범 문양이 바람 속에서 되살아나 불안한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삭북 무사는 깃발을 한 바퀴 돌아 본진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성벽에서 차분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귀한 청양부 주인이자 초원인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군, 반달 천신이 선택한 분께서 너희에게 내리는 서신이 있다!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은 서신을 받으라!”

불화랄이 말하며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냈다. 불화랄의 화살은 새카맣게 칠이 되어 있으며 촉은 늑대 이빨에, 꼬리는 독수리 깃, 화살대는 일반 발사나무로 만들어졌다. 초원의 수많은 목민이 이런 재료로 만든 화살을 사용했다. 불화랄의 화살도 별로 특별할 것은 없지만 보통 화살보다 길이가 8촌 더 길었다.

삭북 무사가 시선을 들어 성벽을 보는 순간 휙 화살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떤 움직임도 취할 새가 없었다. 누군가가 200보 밖에서 활을 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저렇게 먼 거리에서는 미약한 바람에도 화살이 목표물을 빗나갈 수 있었다.

화살 소리가 멎고 엷은 먼지가 일었다. 삭북 무사의 뒤쪽으로 한 걸음 거리의 흙바닥에 화살 한 대가 비스듬히 꽂혔다. 새카만 화살대에는 하얀 비단이 얇게 감겨 있었다.

불화랄은 활을 거두고 손바닥의 낭아전 화살촉을 허리띠에 대충 쑤셔 넣었다.

삭북 무사가 활을 뽑았다. 민둥민둥한 화살대에는 화살촉이 없었다. 무사는 성벽 위를 흘긋 보고는 멸시하듯 웃으며 서신을 갖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는 공손하게 머리 위로 서신을 들어 올려 호도로한에게 건넸다.

호도로한은 그 서신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봉투 입구에 붉은색 봉랍이 찍혀 있었다. 표범 무늬의 봉랍은 청양부 주인의 표식이었다. 고로 대군의 친필 서신이 확실했다.

“대군께서 서신에 뭐라 쓰셨습니까?”

귀궁 하나가 불화랄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최후의 통첩이었다. 저들이 무슨 목적으로 왔든 사흘 내에 철수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 하셨다.”

호도로한은 서신을 읽지도 않고 그 삭북 무사의 귓가에 대고 뭐라 말을 했다. 삭북 무사는 말을 타고 창랑기 옆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얀 비단을 털어 펼치더니 성 위의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 비단을 조각조각 찢은 뒤 바람을 타고 성 꼭대기로 날아가도록 비단을 쥔 손을 놓았다.

“저들이…… 대군의 서신을 찢었습니다!”

귀궁들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청양 대군은 초원 최고의 권력자였고 일반 목민의 눈에는 신처럼 숭고하고 위엄 있는 존재였다. 대군이 분노해 포효하면 사나운 호랑이도 두려워했다. 그런 대군이 삭북부에 전한 최후의 통첩을 호도로한은 보지도 않았다.

전보다 더 가늘지만 더 날카로운 화살 소리가 연달아 두 번 울렸다. 창랑기의 깃대가 갑자기 움칫 떨리더니 천천히 쓰러졌다. 새카만 장우전 한 대가 깃대 꼭대기에 꽂혔다. 커다란 깃발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삭북 무사도 군마에서 떨어졌다. 다른 화살 한 대는 무사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그 화살은 200보 거리에서 한풍을 뚫고 날아와서도 목표물에 빗나가지 않았다.

냉담하게 지켜보던 호도로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삭북 무사 수천 명이 호도로한과 함께 떠나갔다. 주인을 잃은 군마는 차츰 식어가는 무사의 얼굴을 핥고 또 핥았다. 주인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미 죽었음을 깨닫고 한 차례 나직이 울부짖고는 호도로한의 대오를 쫓아 멀어져 갔다.

이른 아침의 적막한 초원에는 고꾸라진 창랑기와 외로운 시체 하나만 남았다.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 없다. 저들은 영토를 가르려고 온 게 아니라 전쟁을 하려고 온 것이다.”

불화랄은 화살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금장궁 밖, 기고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금장궁 안에는 청양의 귀족들과 장군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 다 도착해 수군대고 있었지만 대군의 옥좌는 텅 비어 있었다.

신임 대군은 선대 대군과 방식이 달랐다. 과거 선대 대군은 기고 소리가 울리기 전에 이미 금장궁에 앉아 굳은 얼굴로 귀족들의 알현을 기다렸고 기고 소리가 끝날 때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중벌을 내렸다. 당시 금장궁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선대 대군은 웃는 일이 매우 드물었고 눈동자의 무시무시한 백흔 때문에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대군의 거대한 그림자가 항상 귀족들을 압도하며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그를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선대 대군이 눈밭에 쓰러지고서야 많은 사람이 깨달았다. 여숭 곽륵이 파소이도 죽을 수 있으며 북도성도 영원히 그의 그림자에 뒤덮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신임 대군이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금장궁의 규칙도 달라졌다. 여수우는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모두의 의견을 들은 다음 결정을 내렸다. 동륙의 책에서 배운 ‘납언(納言)’이라는 방식이었다. 지위가 낮아 무시당하는 귀족들도 여수우의 뜻과 맞는 말을 하면 아낌없이 고이심 독주를 하사했다. 선대 대군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용사들에게나 주어지던 특별한 영예였다.

“가서 대군께 빨리 오시라 해. 은밀히 다녀와,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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