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62화 (26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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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13)

유풍당.

식연은 문서의 먼지를 털어낸 뒤 뒤적여 보고는 화로에 던져 넣었다. 화염이 더 높이 말려 오르고 상승하는 열기는 재를 머금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식연은 화로 가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긴 듯 나비처럼 날아가는 재를 바라보았다. 식연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재는 이제 텅 비었다. 남은 것은 벽 구석에 있는 새장의 비둘기 한 마리뿐이었다. 비둘기는 연기에 안절부절못하고 푸드덕거리며 날뛰었다. 식연은 새장을 열고 비둘기를 꺼냈다. 비둘기는 날아가지 않고 식연의 어깨에 앉았다. 식연은 탁자 가에 앉아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대나무 쪽지를 펼치고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휙휙 써내려갔다.

“물은 골짜기로 돌아가고 두꺼비는 겨울잠에 든다. 신중하고 또 신중할 것.”

식연은 쪽지를 가늘게 말아 비둘기 발에 묶인 새끼손가락만 한 대통에 밀어 넣고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속한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가 정연하게 창문 너머 방 밖에 멈추어 서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식연은 문 쪽을 흘끗 쳐다보고는 창가로 걸어가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식연은 비둘기가 푸드득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재빨리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던 식연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담묵으로 표현한 산수화였다. 한쪽은 호수요 한쪽은 숲이었다. 호수면 근처에는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처마 아래에서는 어렴풋이 누군가가 창가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길 수 없겠구나!”

한숨을 내쉬며 그림을 떼어낸 식연은 살며시 종이 면을 어루만지고는 화로에 던져 넣었다. 화염 속에서 그림은 말려들고 타들어갔다. 문득 식연은 착각이 들었다. 처마 아래 사람이 살아난 것 같았다. 궁의를 입고 머리는 쪽을 졌으며 표정은 애틋했다. 금세 그림은 적홍색 잿더미로 변해 화로 안에서 천천히 바스러져 갔다. 식연은 청야호 가에 산 그 집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쯤 먼지가 가득 쌓였겠지?

식연은 뒷짐을 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길게 소리를 읊조리며 걸어 나갔다.

“묘당은 높고 화려한데 들려오는 제악 소리는 낡았구나

초는 다 타들어가고 어렴풋한 노랫소리만 들리나니.”

유풍당 밖을 지키고 있던 수백 명의 귀복영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앞장선 뇌운백렬은 강철로 만든 수갑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재로 다가갈 수 없었다. 식원이 어린갑을 입고 검자루를 쥔 채 땅바닥에 앉아 서재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뇌운백렬은 식원에게서 단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검을 들면 식원을 맞힐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뇌운백렬은 움직이지 않았고 식원도 가만히 있었다. 둘 다 바짝 긴장한 채였다.

식연이 서재에서 걸어 나왔다. 담담한 표정으로 식원과 뇌운백렬을 흘긋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게냐? 무력까지 쓸 필요가 있어?”

귀복영 무사들은 순간 망설였다. 뇌운백렬을 필두로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장군, 국주께서…….”

뇌운백렬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했을지 알고 있으니 반복할 필요 없다. 가자.”

식연이 두 손을 내밀었다.

식원도 자리에서 일어나 패검을 끌러 뇌운백렬 앞에 던지고 담담히 두 손을 내밀었다.

뇌운백렬은 절을 한 뒤 일어나 직접 식연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다른 귀복 무사가 식원에게 수갑을 채웠다. 철컥. 수갑이 채워지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식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 닿는 대로 밖으로 걸어갔다. 수백 명의 귀복들이 식연의 뒤에서 그의 걸음을 쫓았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식연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내 화단은 제때 잡초를 뽑고 물을 주어야 한다.”

“네!”

뇌운백렬이 명령하기도 전에 귀복들은 동시에 반 무릎을 꿇었다.

식연이 웃음을 짓고는 식사 후 아무런 목적 없이 산책을 나가듯 유유히 유풍당 밖의 작열하는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역사]

윤 성제 4년 가을.

북도성의 10만 명이 장사를 지냈다. 청양부는 선대 대군 여숭 곽륵이 파소이의 장례에 초원의 모든 부락을 초청했다. 그 전에 선대 대군은 이미 화장했고, 재는 황금 항아리 안에 보관되었다. 선대 대군의 장례에는 적출인 아들 넷뿐이었다. 막내아들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는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는 만족의 풍습에 어긋나는 처사였다. 누군가는 지난해 봄 고리격 대회를 여는 데 실패한 신임 대군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가 각 부락의 주군들을 소집해 자기 지위를 인정케 하려고 지금 장례를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구남과 사지 2개 부락의 주군만 이번 장례에 참석했다. 장례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이들 부락의 주군이 아니라 동륙 순국의 특사 낙자언이었다. 그는 순국의 감국 중신 양추송의 추도사와 더불어 함께 매장할 대량의 금은 그릇을 가져왔다. 신임 대군은 장례에서 청양과 순국이 정식 동맹임을 선포했다. 풍염 황제의 북벌 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만족과 동륙이 동맹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초위국 명장 백의는 좌상 로중개의 탄핵을 받았다. 초위국 공작은 그녀의 유능한 장군을 보호하려 했지만 로중개의 탄핵은 뜻밖에도 황성의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백의가 비밀리에 작당을 모의했다는 증거도 나타났다. 초위국 공작은 어쩔 수 없이 백의의 군권을 회수하고 그를 잠시 집에 머물게 했다.

한데 내내 백의를 기피하며 구원성 부근까지 퇴각했던 리국공 영무예는 뜻밖에도 이 기회를 틈타 진공하지 않았다. 리국공은 부하 장박에게 유격병을 데리고 리국 관문 창란도를 순행하라 명했다. 그리고 본인은 적려 본부대와 구원성을 굳게 지키며 예상과 달리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난세의 사자는 동륙의 군 정세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 각국 제후들은 곧 불어 닥칠 폭풍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일제히 전쟁 준비를 제고했다.

이렇게 인심이 흉흉한 이때, 작은 만족 철기병이 위장하고 남회에 진입해 형장에서 청양부 인질 여귀진을 구했다. 이 사건은 윤말 사서에서 ‘남회 겁수 사건’으로 불리며, 황실과 제후들을 사이에서 시끄럽게 회자되었다. 이는 풍염황제의 북벌 이후, 북륙과 동륙의 첫 정식 대결이었으며 전쟁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이 사건으로 무전도지휘사 식연도 체포되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70년 전 산진 아래 전멸했던 중기병의 황제 ‘철부도’가 다시 전쟁 무대에 올랐다는 것이다. 철부도의 당당한 풍모는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전율하게 만들었던 과거와 똑같았다. 그러나 이에 필적할 수 있는 풍염 황제는 이미 한 줌 재로 변해 버렸다.

***

황성, 계궁.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장공주는 화가나 같은 말만 반복하며 궁전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녕경은 조심스럽게 장공주의 뒤를 따랐고 뇌벽성은 말없이 한쪽에 앉아 있었다.

“백리경홍은 무능하기 짝이 없군!”

장공주가 뒤돌아 녕경의 손에 들린 적동생 손화로를 보았다. 장공주는 격노하며 손으로 화로를 홱 쳐내고 녕경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당 10만 병사로 만족 세자 하나를 못 죽이다니! 게다가 고작 열여덟 살짜리 군관이 세자를 구출해가? 심지어 만족 기병까지 남회성에 섞여들어 왔다니! 그러고도 감히 식연이 배후에서 조종을 했다 서신을 보내? 식연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게 다 백리경홍, 이 무능한 작자의 덕을 본 게 아니겠는가? 하물며 우리가 식연이 역적 천구임을 일러주지 않았더냐?”

녕경은 숨을 죽인 채 말을 아꼈다.

“장공주, 노여움을 푸시지요.”

뇌벽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백리 국주는 포부는 있으나 확실히 나약합니다. 이번 사건은 제 예상을 벗어났지만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누군가를 나서게 만들었으니까요.”

“누구요?”

장공주가 홱 고개를 돌려 뇌벽성을 쳐다보았다.

“양추송이지요. 만족 기병이 남회에 잠입해 인질을 납치해간 일은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양추송이 이 일을 전혀 몰랐을까요? 이런 일이 있고도 양추송은 사자에게 명령해 청양부와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는 더 이상 황실의 명령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지요. 양추송은 청양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적을 제 집으로 끌어들이고 동륙 전체를 적으로 돌렸습니다.”

뇌벽성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양추송이 바라는 위치는 태청궁 폐하의 자리입니다.”

“꿈도 야무지군!”

장공주가 분노하여 호통 쳤다.

“우리 백씨의 권력이 고작 역적 몇이 앗아갈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아니지요. 하지만 이 일은 공교롭게도 제가 며칠 전 장공주 앞에서 추측했던 바를 증명합니다. 양추송은 일찌감치 신하의 마음을 저버렸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제후가, 가령 진북의 뇌천엽 같은 자들이 양추송처럼 불충한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자들에게 백씨 황족은 이미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계성이 이대로 사라지면 그들은 자기 영토의 황제가 될 수 있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장공주께서는 마땅히 비장한 각오를 다지셔야 합니다. 강력한 수단으로 제후들을 평정하고 동륙의 대권을 다시 장악하셔야 합니다!”

장공주는 대전 지붕의 조정(藻井)1)을 바라보며 음산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좋습니다! 나 백릉파는 이런 역신들을 상대하기 위해 태어났지요! 벽성 선생의 큰 계획은 언제 시작됩니까?”

“마지막으로 평안한 겨울을 보낼 겁니다. 늦어도 내년 겨울에는 삭북의 백랑이 순국을 공격할 것입니다!”

뇌벽성은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마셨다.

“올 겨울 눈을 실컷 보고 나면 이제 피바다를 보게 될 겁니다.”

뇌벽성은 잠시 침묵했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이번에 청양 세자의 탈주로 백리경홍도 식연을 제거할 마음이 확고해졌을 테니 아주 다행입니다……. 다만 사소한 걱정이 하나 듭니다…….”

뇌벽성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우리에서 달아난 것이 흰 토끼인지 아니면 사자인지를 아직 확신할 수가 없군요.”

* * *

1) 각종 문양과 조각, 그림 등으로 장식된 고대 건축물의 천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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