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60화 (260/360)

260

4장. 일생의 맹약 (11)

탁발산월은 비휴도를 들고 관람대 난간 가장자리로 걸어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형장을 내려다보았다.

“불화랄인가? 철부도와 귀궁이라니. 하루 사이에 북륙의 정예병이 모두 모였군!”

불화랄은 오만하고도 음산한 미소를 던지고는 흑마의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후퇴했다. 하당의 노수들이 바로 화살을 쏘았지만, 불화랄은 이미 십자노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후였다. 불화랄의 사정거리는 더 멀었다. 그는 후퇴하면서 몸을 돌려 화살을 쏘았고 노수 백부장 두 명의 목을 명중시켰다. 귀궁들이 사방에서 불화랄을 향해 모여들었다. 원을 이룬 이들은 질주하며 활을 들고 으르렁거리더니 쏟아진 수은처럼 다시 빠르게 흩어졌고 불화랄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불화랄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 활시위를 만지작거리며 맞은편의 하당 노수 부대를 마주했다.

“돌격! 돌격! 저놈을 죽여라!”

노 부대 백부장이 검을 들고 명령했다. 백부장은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이곳은 양국이 교전하는 전장이었다. 하당 군률에 따라 후퇴하는 자는 죽음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불화랄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지으며 흑마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흑마가 300명의 노 부대를 향해 돌격했다.

“일제 사격! 일제 사격!”

백부장이 소리쳤다.

300명이 일제히 화살을 쏘면 상대방의 목숨은 빼앗고도 남았다. 그러나 백부장의 명령은 넋이 나간 군사들을 일깨우지 못했다. 띄엄띄엄 날아간 짧은 화살 몇 대를 불화랄은 가볍게 피했다. 하당 노 부대는 한 명이 300명을 상대로 돌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쌩 하고 긴 화살이 날아드는 소리가 좌우 곳곳에서 들려왔다. 여기저기에 흩어졌던 귀궁들이 일제히 나타났다. 그들은 화살을 많이 쏘지도 않았다. 그러나 누구든 십자노를 들기만 하면 목구멍이 귀궁의 화살에 관통 당했다. 불화랄의 전술은 완벽했다. 불화랄은 제 사람들이 가진 능력을 정확히 알았다. 불화랄은 정면에서 시선만 끌고 공격의 임무는 부하들에게 맡겼다.

“일제 사격! 일제 사격하라지 않으냐! 남은 사람은 상관하지 마라!”

백부장이 매섭게 검을 들고 군사 하나를 찍어 넘어뜨렸다.

불화랄은 차갑게 비웃으며 등 뒤의 화살집에서 거침없이 화살 한 대를 꺼내 활시위에 얹었다. 불화랄은 이 모든 준비를 하면서 매처럼 예리한 눈으로는 내내 백부장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불화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백부장 본인은 더욱 잘 알았다. 후퇴하고 싶었지만 불화랄의 조소와 냉혹한 모습에 백부장은 이미 눈앞에 닥친 죽음을 감지했다.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은 백부장은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미친 듯이 군사들 뒤로 숨으려 했다. 군사들도 백부장을 피했다. 백부장의 주위로 커다란 공간이 생겼다. 백부장이 달려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방패 부대까지 남은 거리는 100보 남짓. 백부장은 절망하며 두 손을 교차해 제 목을 막았다. 전에 귀궁들이 목을 가장 즐겨 쏜다고 들었다. 그럼 저격할 때 상대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불화랄이 활시위를 놓았다. 휘익.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자 불화랄은 눈길 한 번 더 주지도 않고 즉시 말머리를 돌려 바람처럼 철수했다.

그 검은 화살은 백부장의 교차한 손목을 뚫고 지나가 목까지 관통했다. 화살대가 반 척이나 뒷목으로 튀어나왔다. 시체는 뻣뻣하게 고꾸라졌다. 죽는 순간까지 백부장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포가 모두를 휘감았고 노 부대는 삽시간에 무너졌다.

희야와 여귀진은 철부도의 돌격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두 사람도 피할 수 없었다. 세차게 굽이치는 쇠의 물결이 인파를 휩쓸었다. 신의 채찍이 인류의 자그마한 모래판을 후려친 것 같았다. 정면으로 군마와 부딪친 사람은 날아간 뒤 다시 쇠발굽에 밟혀 짓뭉개졌다. 기병창마다 한 구 이상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이 창들은 갑옷에 완전히 고정되어서 시체와 창의 무게가 철갑을 통해 고스란히 군마에 실렸지만 기병들의 주의력은 왼손의 칼에 더 많이 쏠려 있었다. 말들은 하나같이 하얀 김을 길게 내뿜었다. 새빨간 눈에는 초원에 사는 야생 동물의 난폭함과 흉악함이 서려 있었다. 살육은 말들을 유달리 고무시켰다.

희야는 뇌기의 돌격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고 사나운 전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희야는 또 한 번 전율했다. 뇌기는 철부도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뇌기는 용맹한 무사이고 철부도는 기병의 황제였다. 철부도가 전장을 밟는 것은 오로지 영예를 위해서였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필적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철부도가 희야와 여귀진에게로 다가왔다. 선봉의 10인 부대 중에서 한 사람이 말안장과 기병창을 연결한 쇠사슬을 끊었다. 그러자 10인 부대는 5인 부대 둘로 나뉘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측면으로 거대한 호선을 그리며 스쳐가 뿔뿔이 도망치는 하당 군대를 계속 추격했다. 희야와 여귀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다음 10인 부대가 아주 멀리서부터 말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더니 힘겹게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기병 하나가 얼굴 전체를 덮어쓴 투구를 벗었다.

“철익이 세자를 구하러 왔습니다! 늦어 죄송합니다!”

청양부 명장 철익 파항 막속이가 힘겹게 허리를 숙여 여귀진의 어깨를 꾹 잡았다.

“세자, 다 컸군요. 칼도 들고, 우리 청양의 사내대장부가 다 되셨습니다. 선대 대군께서 역시 잘못 보지 않았어요!”

철익은 고개를 돌려 희야를 보았다. 순간 희야의 새카만 눈동자에 움찔했으나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친구가 제 아들들을 무찌른 동륙 무사로군요? 자네처럼 늙은 호랑이 같은 동륙인이 다 있다니!”

철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들아!”

철익이 하늘로 칼을 들어 올리더니 둘로 나뉜 첫 번째 10인 부대를 향해 큰 소리로 명령했다.

“한 번 더 가자! 한 번 더! 동륙인에게 보여주어라. 이것이 바로 우리 청양의 진정한 철기병이다!”

10인 부대는 철익의 명령에 따라 인파 속을 파고들었다.

“세자를 무장시켜 드려라!”

철익이 고개를 돌려 부하에게 호령했다.

철부도 한 명이 몸을 돌려 말에서 내렸다.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무거운 갑주를 입은 철기병이 저리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음을 희야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 철부도 무사는 여귀진을 부축해 제 군마에 태웠다. 뒤따라온 사람이 마바리를 끌고 와 방수포를 펼쳤다. 말 등에는 순흑색 철갑옷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10인 부대 전체가 여귀진에게 갑옷을 입혀주었다. 각기 다른 갑옷 부속품들이 여귀진의 몸에서 쩌렁쩌렁 소리를 내며 한데 맞춰졌다. 이어 누군가가 여귀진의 몸에 맞춰 관절 부분을 조정하고 군도와 기병창을 채워주었다. 문약하던 소년은 둔중한 강철에 뒤덮이자 진정한 초원의 군왕 같은 위엄을 풍겼다.

희야는 부러운 눈으로, 심지어 질투 어린 눈빛으로 제 벗을 훑어보았다. 못 알아볼 지경이었다. 저 사람이 정말 자신과 친한 여귀진이란 말인가? 어쩌면 이런 초원의 군왕이 진짜 여귀진일지도 모른다. 여귀진은 사실 나약하고 겁 많은 아이가 아니라 미래 초원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희야는 순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희야!”

여귀진이 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같이 가! 우리 한주로 가자! 한주의 초원은 충분히 넓어서 네가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어. 우린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어! 한주에서 사업을 해서 모든 사람에게 우리 이름을 각인시킬 수도 있어! 우리 청양에는 가장 독하고 맛있는 고이심주도 있어. 마시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마셔도 돼! 자, 희야! 우리 같이 가자!”

희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말없이 여귀진의 손을 쳐다보며 침묵했다.

희야가 갑자기 펄쩍 뛰어올라 여귀진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세게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 손을 잡지는 않았다. 희야는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며 힘껏 고개를 저었다. 희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소륵, 난 북륙에 안 가. 대군의 자리에 오르면 언제 동륙에 한번 와. 모두가 내 이름을 이야기하는 걸 들을 수 있을 거야.”

희야가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나 아주 유명해질 거야!”

넋이 나간 여귀진은 멍하니 제 벗을 쳐다보았다. 마주한 서로의 눈빛 속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일렁이고 반짝였다. 여귀진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 이해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여귀진은 뒤돌아 달려가는 희야를 쳐다보았다. 희야의 뒷모습이 햇살과 자욱한 먼지 속으로 곧 사라지려 했다.

“희야!”

여귀진이 갑자기 소리쳤다.

“동륙의 황제가 될 거야?”

두 사람이 하던 농담이었다. 상양관 군영에서 장미 황제와 풍염 황제를 이야기하고, 또 위무왕을 이야기할 때 했던 농담이었다. 지금에서야 여귀진은 불현듯 그때 그 말이 단지 농담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희야의 이상이었다. 희야는 동륙 당대 최고 제왕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동륙 최강의 패주를 직접 보았다. 심지어 독보적인 그의 칼도 받아보았다. 희야는 그때 이미 영웅의 길을 보았던 것이다.

“황제가 뭐 대단하다고! 내가 황제가 되어 보여줄게!”

희야는 달려가면서 고개를 돌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네가 황제가 되면 우리 동맹 맺자!”

여귀진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희야도 주먹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각자의 쇳빛 반지를 드러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철익이 묵묵히 말머리를 돌리며 나직이 명령했다.

“철수하는 세자를 엄호해라.”

철익의 말 앞으로 멀지 않은 곳, 탁발산월이 비휴도를 들고 갈색 말을 타고 서 있었다. 하당 군대가 탁발산월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철부도……. 이것이 지난 몇 년간 청양의 계획이었던가? 국주께서 대군을 얕잡아 보았군. 대군이 바란 것이 동륙 전체였나?”

탁발산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철익이 천천히 면갑을 벗고 말했다.

“우리 초원의 사내들은 평생 이날만을 바라지 않았던가? 기회가 오면 우리의 말발굽은 당연히 동륙인의 성을 짓밟아 가장 넓은 목장으로 만들 것이다! 탁발산월, 만족의 배신자. 네가 북도성에 발을 들인 그날부터 너와 겨루고 싶었다.”

“이 시대는 정말 모두를 전장으로 내모는군!”

휙. 탁발산월이 칼을 앞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돌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