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59화 (25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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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10)

관람대 위. 백리경홍은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며 분노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국주,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노 부대를 출동시켜 저 둘을 죽여야 합니다. 저대로 도망치게 둔다면 황성의 백리 가문 가주께 뭐라 설명하겠습니까? 제후국 사이에서 하당의 체면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탁발산월이 나직이 말했다.

“탁발 경은 내가 저 만족을 살려주길 바라는 줄 알았는데.”

백리경홍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때는 우리가 궁지에 몰리기 전이었지요. 지금은 하당국의 존엄이 걸렸으니 물러설 수 없습니다.”

탁발산월이 침착하게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누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었는지요.”

“귀복은? 귀복영은 어디 있는가?”

백리경홍은 특별 훈련된 척후 군대를 떠올리고는 탁발산월을 무시했다.

금위군 백부장 하나가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보고했다.

“오늘 아침 유풍당에서 식 장군이 친히 명을 내려 금군 내의 귀복 무사 9할을 임시로 동원해 갔다 합니다. 그리고 방금 전갈이 왔는데, 식 장군이 성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신속히 대류영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합니다. 하여 현재 성 안에 남은 병력은 4천~5천 명 남짓입니다…….”

“누가 식연의 명을 따르라 했더냐!”

백리경홍은 어이가 없어 고함을 질렀다.

놀란 백부장이 무릎을 꿇었다.

“국주께서 식 장군의 병권을 박탈한 일은 금군에서도 소수만 압니다. 일반 병사들은 더더욱 모르지요. 식연은 무전도지휘사입니다. 하당군의 최고 지휘자이지요. 식연의 명령은 국주의 명령에 버금갑니다…….”

“그래! 아주 잘났구나! 식연, 이 역적!”

백리경홍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내 네놈을 죽이지는 않으려 했다. 황성에 네놈을 위해 용서를 청하고 이후에도 장수로 쓰려 했건만…….”

백리경홍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노 부대! 노 부대! 노 부대를 출동시켜라! 저놈들을 죽여!”

영기(令旗)가 던져지고, 노수들이 앞으로 나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노수들은 독을 묻힌 짧은 화살을 얹은, 정교하고 질 좋은 십자노를 들고 있었다. 노수들은 노를 방패 위로 내밀었다. 이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놓기만 하면 짧은 화살 수백 대가 날아가 중앙의 두 사람을 파묻어 버릴 것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죽는구나!”

희야가 피가 섞인 침을 퉤 뱉고는 피에 물든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여귀진도 따라서 웃었다.

“이렇게 죽는 게…… 목이 잘리는 것보다 더 좋네! 훨씬 좋아, 훨씬!”

“그걸 말이라고! 일어나! 우리 일어서자!”

희야가 소리쳤다.

“선 채로 죽는 거야! 개처럼 바닥에 눌려 목이 베이는 것보다 낫지!”

희야가 여귀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다시 일어섰다.

희야는 칼을 쥔 손목을 꽉 붙잡으며 마지막 힘을 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소륵! 우리 같이하자, 같이 말하자! 철갑은…… 영원하리!”

여귀진은 배자 안감 사이에서 반지를 끄집어내 조심스럽게 오른손 엄지에 끼웠다. 강청색 빛에 눈앞이 환하게 빛났다. 여귀진은 하늘 높이 칼을 쥔 손을 들어 올리고 외쳤다.

“영원하리!”

두 소년은 잇새에 악물고 있던 그 말을 분출하듯 내뱉었다. 격렬한 천둥처럼 울려퍼지는 둘의 목소리는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큰 소리로 웃으며 다가오는 노수들에게 등을 내주었다.

“천…… 구!”

백리경홍은 사색이 되었다.

“천구! 정말 천구였어! 그럼 식연도 천구……. 나의 남회성에서 나라를 어지럽힌 역적 놈들이 이리 설치고 다녔다니…….”

탁발산월은 묵묵히 바라보며 살며시 제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것이 천구였다. 태고 시대 철황의 후예. 태양처럼 찬란하던 존엄은 오래된 무쇠 반지에 남아 죽지 않고 잠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철황들의 영혼이 깨어났고! 천구의 존엄이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힘껏 반지를 낀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반지를 과시하며 크게 웃었다. 탁발산월은 천구에 관한 소문을 들어보았지만, 왜 천구라는 단체에 사람들이 목숨을 바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일까? 탁발산월은 깊은 밤 중갑을 걸친 채 황야에 모여 불더미를 에워싸고 있는 천구들을 상상했다. 그들은 매우 우람하고 진중해 보였다. 흡사 상고 시대의 어느 신명에게 제를 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저들은 무엇을 믿는 것일까?

그 순간 탁발산월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것,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소년의 뒷모습이 바로 천구였다.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관람대 위의 대신들과 아래에 있던 군사들 모두 낯빛이 변했다. 키가 10장이나 되는 과부가 돌망치로 땅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루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탁발산월의 안색도 변했다. 그것은 지진이 아니었다. 이 진동에는 엄청난 위험이 숨겨져 있다고,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탁발산월은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질주하는 군마의 쇠발굽 소리 같기도 했지만 군마처럼 무겁게 들리지도 않았다. 진동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광장의 석판 틈에서 먼지가 일었다. 쿵쾅거리는 굉음이 광장 맞은편 넓은 거리에서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먼지 위로 햇빛이 비쳐 시야가 흐릿했다.

“철…… 철…… 철…….”

관람대 위, 경직된 채 앉아 있던 노신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노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울대가 격렬하게 떨렸다. 탁발산월은 노신의 눈에서 어마어마한 공포를 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 깊숙이 심어진 공포로 일단 튀어나오면 사람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발길 수도 있었다.

“철…… 철…… 철…….”

노신은 팔을 마구 휘두르며 들개처럼 허둥지둥 날뛰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길을 찾지 못했다.

“철…… 철…… 철…… 철부도1)다!”

노신의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이내 그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종말이라도 본 듯한 모습이었다.

탁발산월은 숨이 멎었다. 얼음장 같은 커다란 손이 심장을 움켜쥔 듯한 강렬한 공포가 밀려왔다. 노신은 벌써 여든이 넘은 고령의 나이였다. 그러나 북리 17년, 그는 열여섯의 소년이었다. 당국(唐國) 위관(尉官)으로 풍염 황제의 ‘2차 철려’를 따라 북벌에 나섰고 한주 철선강까지 공격해나갔다. 그곳에서 노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군대를 보았다. 청양 철부도! 무신(武神) 같은 기병들은 윤조의 한 세대 영웅들을 한주 풀밭에 매장시켰다. 이제 그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땅에 묻혔다. 탁발산월은 한때 그 노신에게 철부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 있었다. 그러나 노신은 손을 내두르며 꾸부정하게 등을 굽힌 채 가버렸다. 이 노신은 철선강에서 돌아온 후로 다시는 말을 타지 못했다고 들었다. 말이 노신의 눈에는 악몽 같은 맹수로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 전쟁은 더더욱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러면 본인이 한밤중에 꿈을 꾸다가 놀라 깨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악몽 같은 군마가 돌아왔다. 탁발산월이 줄곧 느껴왔던 예감이 적중했다.

청양 대군 여숭, 예사롭지 않던 그 사내가 동륙인의 깃발 아래 머리를 숙일 리 없었다. 여숭은 은밀히 철부도를 되살렸다. 동륙과 북륙 사이의 평온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동륙을 향한 만족의 야심이 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악몽 같은 군마가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순흑색 군마에 순흑색 철갑옷이 더해지자 기병이 아니라 흉악한 맹수 같았다. 철갑의 칼날 같은 가시가 햇빛에 반사되었다. 기병들의 손에는 삼엄하게 생긴 쇠창이 들려 있었는데 길이가 1장 2척에 달했다. 게다가 준마의 가슴은 벽처럼 널따랬다. 동륙의 말은 그것들 앞에선 나귀에 불과했다. 그것들은 당당하게 동륙 말의 말머리를 밟아 짓이겨 버릴 수도 있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철갑옷 제작 기술 덕분에 시커먼 기병들은 빈틈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군마의 발목까지 쇄자갑으로 치밀하게 감싸져 있었다. 두께로 보아 철갑은 대략 수백 근은 나갈 터였다.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군마는 여전히 그것들을 감당해내었으며 기병들도 여전히 자유롭게 팔을 움직였다. 면갑(面甲)을 쓴 철부도가 하늘로 향해 있던 기병창을 천천히 뉘여 갑옷의 기괄에 걸고 오른팔을 구부려 제 허리춤의 받침대에 끼워 넣었다. 그들은 왼손으로 서로의 말안장 사이와 기병창 사이에 순흑색 쇠사슬을 채웠다. 그 쇠사슬은 고리마다 균일하게 미늘이 달려 있어서 두 말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은 살이 모조리 베여나가 끔찍한 백골이 될 것이었다. 이어 철부도는 왼손으로 허리칼을 뽑았다. 일련의 소리가 들리고 철부도는 완벽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그들은 사람과 말, 철갑옷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괄로 변했다. 그들이 곧 기병이자 전차였다. 또는 말이 부리는 목뢰(木雷)2)…… 아니, 그들은 애당초 세계의 규칙을 거스르는 요괴였다!

느닷없이 밀려온 거대한 공포에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밀리면서 양쪽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광장은 사방이 사람들로 득실댔다. 출구를 찾지 못한 인파는 점점 더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철부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 살점을 짓이기는 것 같았다. 정면으로 이들을 맞닥뜨린 사람은 시체가 되어 창끝에 걸렸다. 소수의 사람들은 창끝을 피했지만 철부도의 왼손 칼에 깔끔하게 목이 잘려 나갔다. 말 갑옷의 쇠침에 부딪친 사람도 있었다. 말 갑옷의 철가시에 부딪친 사람도 있었다. 그 시체는 양쪽 군마 사이에 짓눌렸다가 말 사이의 쇠사슬에 걸린 뒤 다시 거대한 쇠발굽 아래로 굴러갔다. 노 부대는 화살을 전부 쏘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철갑옷이 모든 화살을 튕겨냈다. 철부도의 갑옷은 이음새에도 허점이 없었다.

70년 전 철부도에 대한 풍염 황제의 평은 여전히 유효했다.

“화살로는 철부도를 해칠 수 없다. 저들은 중기병 전장의 황제다.”

곧이어 날카로운 화살 소리가 들려왔다. 하당 노수들이 쏜 짧은 화살과 달리 이 화살은 새카맣고 더 길고 더 빨랐다. 철부도의 뒤에서 검은색 모직 옷을 걸친 만족 기사수들이 방패 부대와 노 부대 군관들에게로 3척 길이의 낭아전을 쏘았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갈기를 다듬은 적 없는 흑마를 타고 맨 앞에서 돌격했다. 깃발이 펄럭이듯 검은색 갈기가 휘날렸다. 그는 관람대로부터 300보 거리에서 화살을 얹고 활시위를 당겼다. 탁발산월은 칼을 뽑아 가로막으며 백리경홍의 미간으로 날아온 화살을 쳐냈다. 칼을 든 손이 저릿저릿했다. 백리경홍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서둘러 방패 부대에서 차출한 군사가 구리 방패를 들고 백리경홍을 비호했다. 탁발산월이 손을 내두르자 방패 부대는 정신없이 국주를 관람대에서 끌어내렸다.

* * *

1) 철부도는 윤말섭초 전장에서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중형 기병 군대다. 동륙의 중기병과 비교해 철부도는 하락의 기술을 채용했으며 장비 전체가 중형 금속을 단조한 철갑이었다. 이 갑옷은 여러 겹의 다른 재료를 복합하고 관절 움직임에 따라 설계한, 그 시대를 뛰어넘는 제품이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중량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만족 준마뿐이었다. 철부도와 비교해 동륙의 중기병은 금속 쇄자갑 또는 명광갑을 채용해 방어면에서 효과 차이가 매우 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점은 철부도 군 장비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이유이기도 해서 광범위한 제식 군대를 만들 수가 없었다. 동륙 중기병과 북륙 중기병의 차이는 역사상 동양 철기병과 서양 중기병의 차이에 가깝다. 많은 역사 기록에서 언급되는 중국 ‘철기(鐵騎)’는 추측에 따라 대체로 급소 부위만 금속으로 보호한 경량형 기병에 불과하다. 자부심 강한 프랑스 중기병의 갑주도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만 갖출 수 있었다. - 저자 주.

2) 폭탄이나 사제 지뢰 같은 종류의 화기로 나무로 제작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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