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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9)
여귀진은 지난 17년간 한 번도 지금 같은 적이 없었다. 이 순간 여귀진은 살아서 내일 아침 뜨는 태양이 보고 싶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벗들을 보고 싶었다. 금빛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빛줄기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향기를 맡고 싶었다.
무심코 닿았을 때 느껴졌던 따스함을 원했다.
가벼운 포옹과 기나긴 시간을 원했다. 호수의 강물이 석양 아래에서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광경을 함께 바라보고 싶었다.
희야의 목소리는 이리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아소륵! 이 바보야! 눈 똑바로 뜨고 봐! 봤어? 죽으면 안 돼! 우연이 널 그리워할 거야!”
여귀진이 입꼬리를 씰룩 하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여귀진은 희야야말로 바보라고 생각했다. 장도 12자루를 가지고 목을 베는 사형대로 돌진한 이유가 고작 그 말을 해주기 위해서란 말인가?
순간, 천지가 고요해졌다!
가슴 속에서 그를 찢어발기던 두 개의 심박이 하나로 합쳐졌다.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피비린내를 머금은 달콤한 향기가 휘몰아쳐 왔다. 몰아치는 해수처럼 어둠이 여귀진을 점차 집어삼켰다. 쇠사슬에 묶인 여귀진의 두 어깨를 짓누르던 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들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형수가 그들 손에 죽어나갔다. 그들 중에는 곰처럼 체구가 장대한 도적들도 적지 않았지만,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에 묶인 채 발버둥 쳐 빠져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쇠사슬에 묶인 소년은 그들을 질질 끌며 조금씩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살점에 걸린 갈고리에 긁혀 깊은 상처가 났지만 이 소년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형을 집행하는 군사들은 모두 얼이 빠진 채 여귀진이 두 군사를 끌고 목침을 기어 넘어 전방으로 손을 내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귀진은 희야가 내던진 장도를 잡으려 했다! 군사들은 불현듯 상황이 파악되었다.
누군가가 한 걸음 앞서 나가 그 칼자루를 뽑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여귀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양손으로 좌우에 있던 군사들의 목을 움켜쥔 채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뒤 그 둘의 머리를 한데 세게 부딪쳤다. 선혈과 뇌장이 뚝뚝 흘러내리며 여귀진의 얼굴에 뿌려졌다. 불긋불긋해진 얼굴은 고대의 신비한 상징 문양 같았다. 여귀진의 수려하던 얼굴은 지금 흉악하고 끔찍했다. 여귀진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마귀가 몸속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여귀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모든 사람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귀진은 장도 앞으로 걸어가 칼자루를 쥔 채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군사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 더러운 손 치워!”
군사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휙 칼을 뽑아 든 여귀진은 그 군사의 멱살을 잡아끌고 가 그자의 목을 목침 위에 눌러 놓았다. 여귀진은 아예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고 그대로 칼을 목에 내리쳤다. 목침과 군사의 목이 한데 토막 났다. 피가 5척 멀리까지 튀었고 머리 없는 시체는 아직도 버둥거렸다. 여귀진은 발로 시체를 한쪽에 걷어찼다. 여귀진이 얼굴을 가리고 나직이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이내 난폭하고 광적으로 변했다. 여귀진은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실성한 듯 웃었다. 얼굴에서는 새빨간 피와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조상의 영혼이 어둠속에서 나를 보고, 내게 존귀한 피와 살을 전해주며, 천신의 축복을 전해주리라. 우리는 초원의 왕이 될 운명이고, 세상의 황제가 될 운명이며, 신의 유일한 사자가 될 운명이다.”
여귀진은 저주와도 같은 주문을 중얼중얼 읊었다.
여귀진의 온몸이 진홍빛을 띠었다. 전신의 피부 아래에서는 박동하는 혈관이 살아있는 뱀처럼 불끈거렸다. 오직 탁발산월만이 주문 같은 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놀란 탁발산월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나아가 백리경홍의 앞을 막아서며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주, 피하십시오. 어서 피하세요!”
“웃기지 말게!”
백리경홍이 분노해 소리쳤다.
“고작 만족 개새끼 한 마리를 내가 왜 피해야 하지?”
“만족 개가 아닙니다. 청동 가문 역대 선조들의 영혼입니다!”
탁발산월의 말과 함께 여귀진이 큰 소리로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저 나이대 소년이 낼 수 있는 종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귀진의 등 뒤로 태고의 거대한 용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여귀진을 향해 달려가려던 군사들은 모두 얼이 빠져 버렸다. 정면으로 한바탕 광풍이 덮쳐오는 것 같았다. 칼날을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도려내는 듯했다. 여귀진은 금군이 가장 밀집된 곳으로 달려갔다. 장도가 거대한 호선을 그렸다. 여귀진 근처에 있던 군사 두 명은 허리가 절단 났다. 여귀진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귀가 쩌렁쩌렁하도록 울부짖었다. 아무도 여귀진의 칼날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다.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철갑이든 도검이든 몸뚱이든 그의 칼날을 막는 모든 것이 반 토막 났다. 무쇠 칼로 종이를 베는 것 같았다. 급하게 동원된 방패 부대는 진을 펼칠 시간도 없었다. 300명이 어지럽게 흩어져 여귀진을 포위해 나갔다. 그들은 구리로 감싼 원형 방패를 들고 일직선으로 서서 밀고 나갔다. 공포가 극에 달한 금군들은 수십 구의 시체를 버리고 방패 부대 뒤로 철수했다. 여귀진은 장도를 헛 휘둘렀다. 너무 많은 뼈와 갑옷을 벤 까닭에 칼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 희야가 무기상에서 산 싸구려 장도는 이미 금이 잔뜩 가 있었다. 여귀진은 부러진 칼을 던져 버리고 근처의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그는 한걸음씩 다가오는 방패 부대 무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귀진은 시체 한 구에서 날이 넓은 동검을 주워 들고 다른 한 구에서 칼등이 두꺼운 중도를 찾았다.
사람들은 여귀진의 얼굴에 어린 미소를 보았다. 방패 부대 무사들이 그가 왜 웃는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그때, 여귀진이 갑자기 뒤돌더니 몸을 낮추고 광풍처럼 방패 부대의 전선으로 접근해왔다. 견고해 보이던 전선은 여귀진의 중검 일격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검을 가로 휘두르자 방패 세 개가 잘려 나갔다. 여귀진은 커다란 독수리처럼 훌쩍 뛰어올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걷어차고는 착지하면서 무릎으로 그자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군사는 이미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곧이어 여귀진은 양손에 든 칼과 검을 동시에 빙빙 돌리며 방패 부대 군사들 사이를 오갔다. 여귀진의 모습은 피를 잔뜩 묻힌 채 회전하는 풍차를 방불케 했다.
“쌍수도검술!”
탁발산월이 여귀진의 모습에서 식연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평소 식연은 중검 한 자루만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탁발산월은 식연이 젊었을 때 쌍수도검술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 하나같이 등신이로군! 기병! 기병이 나가라!”
두려우면서도 화가 난 백리경홍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명령했다.
엉망진창인 방패 부대가 좌우로 철수하고 중기병 넷이 기병창을 수평으로 들고 일렬로 섰다. 그들은 전부 하락인이 만든 중갑을 걸쳐 약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여귀진은 방패 부대를 쫓아가 죽이지 않았다. 방금 전 살육으로 힘을 다 소모한 그는 무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귀진은 양손의 칼과 검을 흙바닥에 꽂아 몸을 떠받친 채 중기병을 등지고 서 있었다. 위험한 쇠발굽 소리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중기병들은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모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미치광이 같은 소년이 어떻게 금군과 방패 부대 군사 수십 명을 도륙 냈는지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 있었다. 그들이 입은 두꺼운 연강 갑옷은 아무리 묵직한 도끼로도 가를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미치광이 같은 소년도 더는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중기병들은 동시에 말을 몰아 나란히 돌진했다. 그들은 기병창과 방패를 앞에 놓고 이중 방어했다.
여귀진은 돌아보지 않고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중기병들은 여귀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산발한 머리카락과 그 얼굴에 번지는 두 번째 미소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였다. 아까 여귀진이 칼과 검을 주웠을 때처럼 무시무시하고 참혹한, 지옥이 떠오르는 미소였다.
여귀진의 목구멍에서 새 울음소리 같은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여귀진이 칼과 검을 몸에 지닌 채 공중으로 훌쩍 뛰어 올랐다. 한 사람 키만 한 높이였다. 여귀진은 공중에서 몸을 돌려 회전하며 중기병이 휩쓴 긴 창을 아주 정확한 순간에 피했다. 그리고 칼과 검을 좌우로 내지르며 중기병의 투구와 갑옷 사이 솔기를 따라 베었다. 군마 두 마리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십 수 보를 달려 나갔다. 솔기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쳐 나왔고 기병 둘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식 장군! 식 장군의…… 철기마반신역수살(鐵騎馬反身逆手殺)!”
군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노신이 비명을 질렀다.
“식연! 이 몹쓸 놈! 길러낸 놈들이 죄다 역적이로구나!”
백리경홍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더 이상 기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귀진은 세 번째 중기병의 두 발굽을 베어버렸다. 중기병과 군마가 한꺼번에 먼지더미로 쓰러지는 순간 여귀진은 귀신처럼 다가가 칼끝을 기병의 명치에 붙이고 잠시 멈추었다. 그러다 갑자기 힘을 실어 기병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중갑 위, 손바닥만 한 길이로 도려낸 흔적이 남았고 두꺼운 쇠 가장자리는 말려 올라갔다.
여귀진은 몸을 돌려 마지막 중기병 하나를 보았다. 그 중기병은 자기가 지금 인간 세상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도망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여귀진이 갑자기 속도를 붙여 질주하더니 그 힘으로 휙 뛰어올라 공중에서 기병의 투구 한가운데로 곧장 검을 내리쳤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착지한 여귀진은 수중의 중검이 반토막이 난 것을 보았다. 확실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연강 투구였다. 정면으로 검은 투구에 부딪치자 도로 튕겨져 나왔으니까. 기병은 가만히 말안장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온 얼굴에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더니 기병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투구는 산산조각이 났다.
군사들이 여귀진을 에워쌌다. 여귀진은 한 쌍의 칼과 검을 들고 시체를 밟으며 묵묵히 광장 중앙을 걸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칼끝과 창끝이 여귀진을 겨누었지만 감히 누구도 달려들지 못했다. 여귀진이 가는 곳 반경 1장 내에는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 군사들은 마치 거대하고 위험한 갑충을 에워싼 개미 떼 같았다.
여귀진은 희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군사 둘이 아직 희야의 어깨를 누른 채, 한 걸음씩 다가오는 여귀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중 한 명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군법이고 처벌이고 다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뒤돌아 도망쳤다. 여귀진은 걸음을 멈추고 벌벌 떠는 마지막 군사를 쳐다보았다. 희야와 그 군사가 함께 여귀진을 쳐다보았다. 가슴에 선득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상양관 앞, 난정역 치중 부대 안에서 뇌기군이 철수하던 그날 밤 희야는 처음으로 여귀진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소년은 갑자기 요괴가 빙의한 듯 영월도를 뽑아 들고 커다란 매처럼 날아올라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도 잊은 채 사람을 베어 죽였다. 그때부터 희야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여귀진이 제 몸 안의 끔찍한 그 무언가를 억누르지 못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지금 그들을 내려다보는 여귀진의 눈은 무시무시한 암홍색이었다. 충혈 때문만은 아니었다. 먹잇감을 살피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여귀진은 한 손으로 그 군사를 들어 올렸다. 군사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용기를 내 여귀진의 어깨를 베었다. 칼은 정확히 여귀진의 어깨에 맞았다. 그러나 힘이 들어간 근육에 끼어 칼은 겨우 1촌 남짓밖에 베지 못했다. 여귀진은 그 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움직였다. 말없이 힘을 주어 그 군사의 한쪽 팔을 생으로 잡아 뜯었다. 군사는 처량한 비명을 내지르고는 까무러쳤다. 사냥감에 흥미를 잃은 여귀진은 사람과 뜯어낸 팔을 한쪽에 던져 버렸다.
여귀진이 희야와 시선을 맞추었다. 희야는 물러나고 싶었지만 발에 힘이 풀렸다. 여귀진은 곧 죽일 닭을 집듯이 단번에 희야를 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집게처럼 희야의 목을 꽉 조른 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희야는 이 정도로 무력감을 느껴본 일이 없었다. 허공에 매달린 그는 발버둥 칠 수조차 없었다. 그의 무게를 떠받치는 것은 집게 같은 여귀진의 손과 자신의 울대뼈뿐이었다. 희야는 제 울대 쪽에서 나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약한 뼈는 언제든 으스러질 수 있었다. 희야는 반항할 여지조차 없었다. 희야의 목이 시퍼레지며 피가 맺혔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얘진 머릿속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죽는 거야? 네 가장 친한 친구의 손에? 친구라면서? 함께 전쟁에도 나가고 등을 맞대고 포위해 오는 적과 맞서 싸웠잖아. 함께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물건도 훔쳤지. 사냥꾼에게 쫓기는 야생 여우처럼 나란히 남회성의 밤을 내달렸어. 그러니 당연히 가장 친한 친구겠지?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왜 기꺼이 그리 할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귀진의 목이 떨어지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겠지. 그럼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울 테니까.’
그렇다면 자신도 여귀진에게 마찬가지가 아닐까?
순간 강한 확신이 벼락처럼 텅 비어버렸던 뇌리를 관통했다. 희야는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된다. 여귀진이 그를 죽일 리 없다!
흉맹한 야수 같던 여귀진은 사실 망설이고 있었다. 희야를 마주치기 전까지 여귀진의 도검 아래 모두가 단칼에 죽어나갔다. 지금 여귀진의 힘이면 희야의 목을 천천히 으스러뜨릴 필요도 없었다. 손아귀 힘을 분출하기만 하면 희야는 등뼈까지 여귀진의 손에 으스러질 것이었다.
여귀진은 망설이고 있었다!
희야는 눈을 부릅뜨고 여귀진을 쳐다보며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를 불렀다.
“아소륵…….”
암홍색 눈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나야…… 나라고! 정신 차려!”
“멈추지 마…….”
여귀진이 쉰 목소리로 포효했다.
“내 이름을 불러! 내 이름을…… 불러줘!”
여귀진은 여전히 한손으로 희야의 목을 꽉 움켜잡은 채, 한 손으로는 힘껏 제 머리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아…… 아소륵!”
희야는 목뼈의 극심한 통증을 참아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여귀진의 몸이 경직되며 무지막지하던 힘이 사라졌다. 땅에 떨어진 희야가 격렬하게 기침을 뱉었다. 머리에 피가 돌지 않아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희야는 그 자리에 엎어진 채 오래도록 일어서지 못했다.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다시 고개를 든 희야는 익숙한 눈을 마주했다. 호수처럼 맑고 고요한 눈은 갓 깨어난 듯 멍했다. 여귀진은 누군가가 그의 몸에서 모든 뼈를 들어내기라도 한 듯 맥없이 쓰러졌다. 희야는 달려가 여귀진을 부축했다.
“희야……. 너 대체 왜…… 온 거야?”
여귀진이 나직이 물었다.
“난 네 친구잖아! 이 바보야!”
희야는 얼굴의 핏자국을 닦고서 어이없다는 듯 벗의 머리를 툭 쳤다.
그들 뒤로 군사들이 칼과 창을 든 채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방패 부대 군사들도 다시 집결해 철통처럼 두 사람을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