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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7)
8월 열닷새. 남회성, 능화방.
정오의 햇빛이 날카로운 검처럼 머리 위에 걸렸다. 여귀진은 고개를 숙이고 제 발아래 그림자를 쳐다보며 주위의 떠들썩한 사람 소리를 들었다.
형 집행 장소는 능화방 앞 광장에 마련되었다. 길이며 폭이 전부 수천 보에 달하며 족히 만 명은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국주 백리경홍의 지시에 따라 만족 세자의 처형은 관람이 허용되었다. 이는 하당의 위엄을 보일 기회였다. 광장 중앙에 붉은 모포를 깔고 높은 누대를 세웠다. 백리경홍과 대신들의 자리는 누대 위에 있었다. 여귀진은 멀리 화려한 예복을 차려 입은 백리경홍을 보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귀진은 검붉은색 넓은 도포를 걸쳤다. 혼례복과 매우 흡사했다. 방산은 이러면 목에서 피가 솟구쳐 나와도 검붉은 색에 묻혀 많이 흉해 보이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방산은 또 형이 집행되기 전 볼일도 보라고 했다. 안 그러면 목이 베일 때 전신의 근육이 놀라 제어하지 못하고 위엄을 해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여귀진은 방산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방산이 독주 한 잔을 그에게 건네며 귓가에 다가가 약을 탔다고 조용히 말했다. 이 술을 마시면 정신이 몽롱해져 별 고통 없이 지나갈 거라고 했다. 여귀진은 그 술잔을 밀어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무섭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묵직한 도끼를 보자 겁이 났다. 여귀진은 살짝 몸을 떨었다. 수십 근에 달하는 도끼가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람 목을 베는 것과 닭 목을 베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신이 물러가며 나직이 말했다.
“세자, 무서워 마십시오. 사실 도끼는 무서워 보일 뿐입니다. 도검보다 날카로워서 고통이 덜할 거예요.”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높아졌다. 저 멀리 무당이 춤을 추며 하늘과 선조의 혼령에 제를 올렸다. 소지(燒紙)1) 한 장을 들고 9잔의 독주에 하나하나 불을 붙였다. 형을 집행하는 군사들은 반 무릎을 꿇고 술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잔을 던져 깨뜨렸다. 그중 체구가 가장 우람한 자가 회자수(劊子手)2)였다. 그자가 가슴팍의 가죽 띠를 잡아당기자 흉갑 전체가 벗겨지며 탄탄한 근육의 가슴이 드러났다. 드러난 가슴에는 꼬불꼬불한 검은 털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회자수는 귀를 찌르는 환호성 속에서 도끼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구경꾼들은 더 큰 환호성으로 호응했다.
여귀진은 낯설지만 한껏 흥분된 얼굴들을 보았다.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왜 이토록 흥미로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회자수가 술 한 단지를 통째로 제 몸에 뿌리고 벌게진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마리 열종곰4)처럼 흉악한 모습이었다. 회자수와 눈이 부딪치자 여귀진은 오싹했다. 전쟁에도 나가보았지만 이런 눈빛은 본 적이 없었다. 흉포함 속에는 과시와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여귀진은 불현듯 이 모든 행위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가 알기로 귀족을 사형할 때의 예법은 단순하고 엄숙해야 했다. 국주가 이 모든 것을 능화방 앞 광장으로 옮겨온 이유는 여귀진을 한낱 비천한 사형수처럼 죽이기 위해서였다.
모종의 기운이 그를 떠받쳤다. 뭇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여귀진은 번쩍 고개를 쳐들고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러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외로운 기러기 한 마리가 하늘가를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여귀진의 입가에 한 줄기 엷은 미소가 걸렸다.
인파 속이 또 한바탕 떠들썩했다.
묵직한 쇠발굽 소리가 광장 가에서 들려왔다. 중무장한 기병 넷이 커다란 검은 외투를 덮어쓴 채 말을 몰아 천천히 다가왔다. 손에는 금국화가 수놓아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쇠로 된 면갑(面甲)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슥 훑어본 여귀진은 그중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자는 방기소였다. 제식 갑주를 갖춰 입었지만 방기소는 가문에 전해오는 명검을 차고 있었다.
중무장한 기병이 광장을 한 바퀴 돌며 여귀진의 면전을 지날 때였다. 길쭉한 깃발을 든 사람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깃발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뇌운 형님!”
방기소가 그의 곁에서 나직이 외쳤다.
“위엄을 잃지 말아요! 이 자식은 곧 죽을 겁니다. 그럼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해요!”
깃발을 든 자는 뇌운정가였다. 그의 눈을 보기 싫었던 여귀진은 고개를 돌렸다. 뇌운정가가 왜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는지 이해했다. 어쨌든 자신의 민족이 뇌운정가의 형 뇌운맹호를 죽였으니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던 과거에 뇌운정가는 늘 제 형을 자랑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했다가 또 자신은 평생 형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며 풀이 죽어 말하곤 했었다. 광장을 한 바퀴 돈 기병들은 사형대 네 귀퉁이에 섰다. 형 집행을 담당하는 무사 여덟이 사형대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상반신을 드러낸 회자수는 정말 술에 취한 것인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비틀거리며 사형대에 올라와 여귀진을 흘긋 쳐다보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돼지를 쳐다보는 백정의 눈빛이었다.
회자수가 갑자기 여귀진의 오금을 걷어차며 동시에 손바닥으로 여귀진의 뒷덜미를 세게 내리눌렀다. 여귀진은 원치 않게 무릎이 꿇려지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광장에 한바탕 환호성이 터졌다.
작은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이 머리에 걸리며 여귀진을 구속했다. 회자수가 여귀진의 뒤에서 쇠사슬을 단단히 옭아맸다. 갈고리가 살점에 박혀들고 여귀진의 목구멍에서는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네가 금장국의 작은 주인이든 동전 한 닢만도 못한 천민이든 이곳은 내 구역이다!”
회자수는 여귀진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죽을 목숨, 꼿꼿한 척은 그만하시지. 얌전히 받아들여. 사형을 집행하는 우리도 통쾌하게 끝내줄 테니!”
무사 하나가 거의 1척 두께의 목침을 여귀진의 목 아래에 받쳤다. 다른 한 명은 구리 대야를 목침 앞에 놓았다.
“이제 힘을 쓸 차례군!”
목침을 밀어넣은 군사가 말했다.
“국주께서 위에서 보고 계셔. 체면 구겨지지 않게 깔끔하게 가자고.”
회자수가 수중의 도끼를 들었다.
“문제없어. 목침까지 반토막을 내어주지!”
누대 위에서 백리경홍이 손을 휘두르자 광장은 조용해졌다. 북 장단이 울리기 시작했다. 북채가 북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두드리는 힘이 점점 강해지고 점점 빨라졌다.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다.
여귀진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숨을 쉬고,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볼 기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생각해 두었다. 이렇게 소리 없이 자기 목이 떨어지게 두지 않을 것이다. 군사 둘이 힘껏 여귀진의 어깨를 눌렀다.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던 만족 소년이 갑자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일어서려 했다! 화들짝 놀란 군사들은 전력을 다 끌어 모아 여귀진을 눌렀다. 회자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여귀진의 뒷덜미를 밟아 목침의 반원형 오목한 부분에 눌러 넣었다. 그러나 여귀진은 연신 몸부림 쳤다. 마지막 힘까지 다 쓰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여귀진은 애써 고개를 들고 주위 사람들을 보았다. 눈부신 햇살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다만 사람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다는 느낌만 들었다. 연극을 보듯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 눈들을 상상했다.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는 이들에게 여귀진은 두렵지 않노라고, 청양 여씨 파소이 가문의 사내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만족의 눈빛으로 이들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오만하게 비웃어주고 싶었다.
희야가 이들 중에 있을까? 우연도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그를 버티게 하던 오기가 갑자기 한풀 꺾였다. 여귀진은 살짝 몸을 떨었고 망연자실해 어쩔 줄 몰랐다.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여귀진은 곧 죽는다. 마지막으로 그 진홍색 눈을 볼 수 있을까? 두 사람을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어지럽고 착잡해졌다. 자신이 마음속 아주 깊숙이에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나 희야가 그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희야……. 검은 말을 타고 긴 창을 든, 눈빛이 검은 번개 같은 소년. 언제나 강인하며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벗이었다.
회자수가 여귀진의 목을 세게 밟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죽음이 더 괴로워질 뿐이다!”
‘괴로움?’
여귀진은 회자수가 우스워 속으로 웃음이 났다.
‘네가 괴로움이 뭔지 알아? 목이 베이면 괴로울 것 같아?’
형을 집행하는 군사들은 이 방면의 고수였다. 양쪽 어깨를 누르는 힘이 놀라우리만치 어마어마했다. 여귀진은 더 이상 발버둥 칠 수가 없었다. 내내 억누르고 있던 절망이 마침내 떠올라 여귀진의 심장을 휘감아버렸다. 희야는 그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여귀진은 생각했다.
‘희야가 뭐라고?’
희야도 그저 집에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사는 아이였다. 가끔 희야는 잔뜩 화가 난 고슴도치 같았는데 그건 두렵기 때문이었다. 뾰족한 가시라도 세우지 않으면 남들이 제 몸을 밟고 지나갈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마지막 북 소리가 끝나고 주위는 온통 적막에 휩싸였다. 여귀진은 갑자기 힘껏 주먹을 쥐었다. 마지막 실낱같은 힘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었다. 앞으로는 그를 겁쟁이라 놀릴 사람도 없었다. 십 수 년을 나약하게 살았으니 한 번쯤은 용감해져야 하리라……. 여귀진은 생에 남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면 떠도는 혼백이 된다 하더라도 마지막 한 번의 용기 덕분에 이번 생에 후회는 없을 것이었다.
무거운 도끼가 여귀진의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졌다.
여귀진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폐에 한껏 공기를 채우고 입을 최대한으로 벌려 숨을 내뱉으면서 모두를 향해 그 이름을 외치려 했다.
“우…….”
우…….
우…….
우…….
여귀진은 마음속에 울리는 메아리를 들었다. 그는 몹시 기뻤다. 전신의 모공 하나, 하나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 강렬한 목소리가 여귀진의 외침을 툭 끊었다. 여귀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화살 소리였다! 우전이 빠른 속도로 공기를 가르는 소리! 상양관 전장에서 제 귓전을 스치는 이런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 소리와 함께 전우들이 피바다 속에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제 목덜미에 어떤 끈적끈적한 액체가 튀었다. 도끼는 떨어지지 않았고, 여귀진은 아직 살아 있었다. 여귀진이 고개를 들었다. 회자수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툭 떨어졌다. 회자수는 힘없이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화살을 뽑으려 했다. 화살은 정확히 회자수의 목구멍을 관통했고 화살 꼬리의 깃털만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때, 뇌운정가가 검은색 외투를 벗어 던졌다. 무시무시한 철 면갑(面甲)도 함께 공중으로 던져졌다. 그는 묵직한 쇠활을 들었고 허리춤의 화살집에는 화살이 가득 꽂혀 있었다. 말안장에는 번쩍번쩍한 장도 12자루가 매어져 있었다. 그는 뇌운정가가 아닌 고슴도치였다. 한 마리 분노한 고슴도치. 그리고 눈빛은 번개처럼 새카맸다.
“희…… 희야……? 어떻게 희야가?”
방기소가 놀라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형장을 급습했다!”
형을 집행하는 군사들 중 한 사람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헙!”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연의 소설 속, 수백 수천 번 연거푸 나오던 상황이 진짜로 그들 눈앞에서 벌어지자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희야는 혼자였다. 열여덟 살 청년 홀로 외롭게 수천 명의 무장 군사가 지키는 형장을 급습한 것이다.
여귀진은 열여덟 살 청년을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 같았다. 처음 연무장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의 벽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했었다. 약간의 낯섦과 망설임이 어린 눈빛을 하고서.
“아소륵. 내가 구하러 왔어.”
희야가 말했다.
희야는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지금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러나 여귀진의 눈을 마주하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난감했다. 그래서 툭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웠다. 석양 아래에서 군마를 몰며 ‘아소륵, 술 마시러 가자’라고 수도 없이 말하던 것처럼.
무척, 자연스러웠다.
* * *
1) 부정(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태우는 종이.
2)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 망나니.
3) 구주 세계에 등장하는 곰의 한 종류. 야북 일대에서 가장 체구가 큰 곰이다. 인류가 생기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짧은 얼굴 곰(Arctodus)에서 모티프를 딴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