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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6)
여귀진이 제대로 본 게 맞았다. 국주의 명을 받고 자신을 시중들던 금군 도위 방산이었다. 자신을 모신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상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것임을 여귀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산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산은 성격이 유약했다. 남회성 명문가 자제로 군에 들어가 공적을 세우고 싶지만 전쟁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울 배짱은 없었다. 칼빛만 봐도 놀라 쥐새끼처럼 허둥지둥 도망치는 그였기에 남을 모시는 정도의 일밖에 하지 못했다. 상양관 전쟁 후 방산은 자신이 만족 세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귀진 곁에 잘 나타나지 않았고 매월 초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기만 했다.
“정말 도위였군요. 번거롭게 이런 일까지 하게 했네요.”
여귀진이 담담히 말했다.
“세자, 집에서 막 잠들었는데 바로 세자를 모시라 불려왔습니다. 이런 일에 서툰 군사들이라 대접이 소홀하진 않았을까 염려가 됩니다.”
여귀진이 자기를 알아볼 줄 몰랐던 방산은 살짝 허둥대며 제 옷을 아무렇게나 툭툭 쳤다. 먼지를 털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추운데 담요라도 더 드릴까요? 귀홍관에서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다 세자께서 사용하시던 것이라 더럽지 않을…….”
“조금 춥긴 하지만 괜찮아요. 곧 죽을 텐데요. 곧 죽을 사람이 추위가 무서울까?”
방산은 제 옷자락을 그러쥔 채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달리 여귀진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행했다.
“세자, 배고프시지요? 어서 드십시오. 세자께서는 양고기 국에 면을 담가 먹는 걸 좋아하시잖습니까. 요리사들을 깨워 바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식사겠지요?”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방 도위, 고생했어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방산은 여귀진의 담담한 말에 묻어난 슬픔이 느껴져 코가 시큰했다.
“방 도위, 부탁이 있는데요.”
방산은 순간 아연해졌다. 그는 온몸을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세자, 세자께서 억울하시다는 건 알지만 국주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종군해 밥 벌어 먹고사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부탁을 들어드릴 깜냥이 못 됩니다.”
여귀진은 당황한 방도위를 보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그냥 질문 하나 하려는 것뿐이에요.”
“질문요?”
“네. 내가 죽으면 시체는 어떻게 처리된다고 하던가요?”
방산은 생각지 못한 질문에 잠시 넋이 나갔다가 이내 정중하게 대답했다.
“국주께서 참수라 하셨으니, 사형수라면 참수 후에 시체를 성 동쪽 황폐한 무덤에 묻겠지요. 그러나 세자는 귀족 자제이니 관례대로라면 가족이 시신을 거둘 겁니다.”
“아, 그렇군요.”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붓과 먹을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네!”
방산이 붓과 먹을 가져다 놓고는 물러갔다.
“방 도위, 그간 고마웠어요. 내가 늘 말 안 듣고 몰래 나가서 놀았는데도 도위는 한 번도 국주에게 고하지 않았죠. 알고 있었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할 기회가 없었네요. 또 내가 멋대로 활개치고 다녀서 방 도위에게 민폐도 많이 끼쳤어요. 사고 치면 방 도위가 몰래 나 대신 돈을 써서 일을 마무리해 줬잖아요…….”
여귀진은 방산의 등에 대고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나도 다 알고 있었어요.”
방산은 편전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진 방산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소리 없이 물러갔다. 발소리가 사라지자 여귀진은 땅바닥에 앉아 밖에서 스며드는 불빛에 의지해 겉옷을 벗었다. 몸이 약하고 추위를 타는 터라 이미 가을 중반부터 안감으로 명주가 덧대어진 가죽 배자를 입고 있었다. 여귀진은 배자 안감을 뒤집어 바닥에 평평히 깔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막간 형님께.
아우는 곧 세상을 떠납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 묘를 찾아가 뵙지도, 형님들과 다시 만나지도 못하게 되었네요. 떠나기 전 짧게 서신을 남기니 형님들께서 고이 챙겨두었다가 대신 아버지 무덤 앞에서 기도를 올려주십시오. 아버지의 영혼이 우리 파소이 가문의 자손들을 굽어살피실 겁니다. 저 때문에 하당에 군사를 보내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정사도, 군무도 잘 모르지만 부디 이 죽음이 청양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어머니도 잘 부탁드려요. 저의 노예였던 소마에게도 형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여귀진은 한 줄 띄우고 말머리에 이렇게 썼다.
“대합살께.
북도에 돌아가 대합살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대합살과 아마칙1)이 보고 싶네요. 파태도 보고 싶고요.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하고 대합살의 기대를 저버렸지만, 대합살의 가르침은 잊지 않았어요. 청양이 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고개를 들겠습니다.”
여귀진은 소마를 떠올리자 불현듯 조금 슬퍼져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귓가에 익숙한 방울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했다. 그 소녀가 바로 문 밖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여귀진은 아주 오래 전 북도성에서의 비 오던 밤이 떠올랐다. 소마는 자기 머리 위의 따뜻한 손을 어루만졌다. 한참 뒤 여귀진은 글을 써내려갔다.
“소마에게.
네가 가르쳐 준 피리 곡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네게 더 많이 배우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가 없어졌네. 비막간 큰형님께 널 부탁했어. 형님은 네가 믿고 의지해도 되는 사람이야. 소마, 내가 널 지켜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 하지만 노력했어. 내가 네게 했던 말도 항상 기억하고 있었어.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는 겁쟁이가 되지 않을 거야. 죽더라도 청동 가문의 사내처럼 죽겠어.”
여귀진은 ‘희야에게’를 쓰고는 옷깃 안에서 은사슬에 묶어둔 반지를 꺼내 소매에 슥슥 문질렀다. 반지가 반질반질해지자 작은 칼로 안감 한 귀퉁이를 갈라 반지를 쑤셔 넣었다.
“내 편지 받았지? 상황이 이렇게 빨리 변하게 될 줄 몰랐어. 나는 곧 죽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상양관 전장에서 죽었을 거야.
미안해. 네 기분을 상하게 해서. 사실 그날 네가 본 광경은 별거 아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우연이 나를 동정해주었던 것뿐이야. 우연은 항상 착하고, 뭐든 다 가여워하잖아. 우연은 널 좋아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넌 알 거야. 우연이 널 좋아하지 않으면 또 누굴 좋아할 수 있겠어?”
여귀진은 또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마지막 문장은 터무니없다는 생각에 붓을 들어 지우고 계속 써내려갔다.
“장군께 대신 안부를 전해줘. 괜히 곤란해지실까 봐 장군께는 서신을 남기지 않았어. 이 옷 속에 쇠붙이가 하나 있으니까 찾아서 네가 갖고 있어. 나보다 그 물건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한 바퀴 빙 돌았지만, 결국 또 그 이름으로 돌아왔다. 늘 그랬다. 피하고 싶어 얼굴을 굳히고 마음도 단단히 옥죄었다. 하지만 버티고 버텨도 결국 그 마음은 깨지기 쉬운 알 껍데기였다. 깊이 잠들었던 새끼 새는 그가 방심한 틈에 깨어나 뾰족한 부리로 껍데기를 톡톡 쪼아 파고 나오려 했다. 여귀진의 손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여귀진은 ‘우연’ 두 글자를 쓰고는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이 크지 않은 배자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가득 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첫 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많고 많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마음속에서 천천히 출렁였다.
지금 여귀진은 우연이 제 곁에 앉아 있기를 바랐다. 엄청난 용기를 내 우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처음 널 봤을 때 공중에서 내 앞으로 뚝 떨어지는데 정말 아름다웠다고. 네가 준 송연묵 먹통도 간직하고 있다고, 밤에 글을 쓸 때면 쓰다가 멈추고 손가락으로 그 먹통을 살며시 어루만진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북륙의 파지국을 아느냐고, 삭방원 전체에 파지국이 만발한 것을 보러 나와 함께 북륙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네가 거절할까 봐 두려웠다고, 그래서 네가 즐거울 때 말하면 기쁘게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니 그때를 기다렸노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여귀진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우연 사실 난 너를…….’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우연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곧 죽을 테니 이 말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여귀진은 지친 듯 벽에 기댔다.
“우연, 널 어떡하면 좋을까?”
여귀진은 혼자 중얼거리며 붓 끝의 먹물이 흰색 명주에 뚝뚝 떨어져 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문이 열리고 칼을 찬 금군이 들어왔다. 앞장 선 이는 방산이었다.
“여귀진 세자, 이제 가셔야 합니다.”
방산이 여귀진의 앞에 와 큰 절을 올렸다.
여귀진은 잠시 멍해 있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며 붓을 던지고 가죽 배자를 입었다. 그리고 막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무리를 받으며 편전을 걸어 나갔다.
여명이 밝았다. 동이 트는 이 무렵은 밤중에서도 가장 추울 때였다. 희야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희야는 쓰러진 돌 비석에 기대 앉아 불타버린 폐허 위를 비추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은 연기가 아직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햇살이 대지를 뒤덮었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동륙의 제후국은 모두 황실의 규칙에 따라 햇살이 가장 강한 정오에 참형했다. 희야는 그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벌써 유풍당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엄청난 무리의 금군이 유풍당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식연도, 식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희야는 우연이 아직 안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우연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 희야도 알지만, 최소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줄 수는 있었다. 나무 그늘이 잘 어울리던 작은 정원은 불에 타 검게 그을린 땅만 남았다. 희야는 돌바닥에 새겨진 검권(劍圈)과 창원(槍圓)을 보다가 어렴풋이 이 모든 일이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벌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되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익천첨과 우연은 애당초 희야의 어느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희야는 남회성에 친구 하나 없이 첩실 소생의 자식으로 외롭게 이 도시에서 살아갔다. 한때 마음을 주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노랫소리, 웃음소리, 벗, 스승은 사실 희야가 지어낸,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자 그들도 사라져버렸다.
마음 한 조각이 빠진 느낌이었다. 줄곧 이 마음 한 조각을 꿈속에 보관해 두었는데 꿈이 사라지니 희야의 마음도 텅 비어 버려 몹시 아팠다.
희야는 고개를 들고 불타는 듯한 새벽노을을 바라보며 그 소년의 미소를 떠올리려 애썼다.
“나는…… 여귀진이야. 여귀진 아소륵. 아소륵이라고 불러도 돼.”
“우족은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구나. 희야는 정말 대단하다. 우족 문자도 알고.”
“나도 이 칼을 네게 줄게. 앞으로 누가 네 얼굴을 밟으면 바로 나, 아소륵 파소이의 적이야. 반달 천신께 맹세해. 이 맹세는 내가 죽지 않는 한 언제나 유효할 거야.”
“희야! 희야, 빨리 도망쳐!”
우연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연이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 셋은 친구예요!”
수많은 기억이 동시에 희야를 덮쳐와 흐르는 물처럼 가슴을 관통했다. 희야의 가슴은 텅 비었다. 희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회성에서 희야는 그저 외롭고 비천한 소년으로 날이면 날마다 긴 창을 끌고 석양 속을 걸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황량한 숲과 폐허를 떠나고 싶었다. 좀 더 따뜻하고, 사람이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를 찾아 말해야만 했다. 벌떡 일어난 희야는 빠르게 숲을 지나고 연못을 지나고 거리를 지났다……. 하지만 거리는 인영 하나 없이 고요했다.
그래서 희야는 멈추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모르는 곳을 찾아서.
희야는 실성한 듯 새벽빛을 받으며 내달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희야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외쳤다.
‘아소륵……. 아소륵이 곧 죽어…….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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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칙은 대합살의 제자 안정룡의 만족 이름이다. - 저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