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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5)
“국정은 모르지만 성인의 책을 읽으며 천하의 큰 도리를 배웠습니다. 법률에 따른 집행도,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일도 저는 잘 모릅니다. 뇌운맹호가 북륙에서 죽었고, 또 금장국이 우리와 단교하고 순국과 동맹을 맺었으니 응당 군대를 보내 토벌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귀진 세자는 북륙과 소식이 단절된 채 오랫동안 남회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이 일과 상관이 없어요. 여귀진 세자가 내 벗이든 아니든 이대로 죽게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탁발산월이 탄식했다.
“욱 세자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다 핑계일 뿐, 실은 벗을 위해 오신 게지요? 욱 세자의 성정에 쉽지 않은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백리욱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쉬웠든 아니든 나는 이미 이곳에 섰습니다. 장군과 함께 아버지를 뵙고 시비를 가릴 겁니다.”
“국사를 위해서건 벗을 위해서건 이리 굳건한 의지는 사람됨의 근간이지요.”
탁발산월이 나직하게 말했다.
“훌륭합니다!”
백리욱은 어릴 적부터 세자였다. 하지만 국정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대신들을 만나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식연의 경우 하당군의 1인자이기에 가끔 사절을 접견할 때면 그래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삼군 통수 탁발산월과는 나눈 이야기를 한 마디 한 마디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백리욱은 어려서부터 탁발산월이 매우 엄격하게 군을 다스린다고 들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경외감이 생긴 터라 종종 말을 안 해도 위축되고는 했었다. 한데 이곳에서 뜻밖에 탁발산월에게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다.
백리욱은 한 걸음 물러나 소매를 정돈하고 큰절을 올렸다.
“그래도 세자께서는 돌아가십시오.”
백리욱은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장군, 어째서…….”
탁발산월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세자께서는 이 일의 관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십니다. 제가 군국의 대사를 들어 국주를 설득하면 만회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자께서 여기 계시면 오히려 머릿수를 내세워 국주께 명을 거두시라 몰아붙이는 형세가 됩니다.”
“하지만…….”
“세자, 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탁발산월이 백리욱을 흘긋 보며 말했다.
“성인의 큰 도리니 선악에 따른 상벌 같은 이치니 하는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귀진 세자는 금장국의 인질로 그가 곧 금장국을 대표하지요. 금장국이 맹약을 깨면 참수해야 마땅합니다! 욱 세자와 제가 이곳에 있어봤자 국주의 노여움을 살 뿐입니다.”
백리욱은 탁발산월의 냉정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여귀진 세자가 참수되어야 마땅하다면 장군은 왜 여기에…….”
“제가 이리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오랜 세월 다져온 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금장국과 순국의 동맹은 초기 단계로 양국의 맹약이 공고하지 않을 수 있어 우리에게도 만회의 여지가 있지요. 하지만 여귀진 세자를 참수하면 양국은 이대로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국주는 사리에 밝은 분이니 이를 간파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어요.”
“그럼…… 아버지께서 장군의 말을 들으실까요?”
탁발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국주께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거였다면 벌써 이 자리에 앉아 계셨겠지요. 제가 기다리는 이는 식연 장군입니다.”
“식 장군을요?”
“하당 내에서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식연 장군일 겁니다. 어전우장군에 황실의 책봉을 받은 백작이니까요. 여귀진 세자는 식 장군의 제자이기도 하고요. 식 장군이 여기 온다면 국주께서도 나와 보실 겁니다. 내 이미 유풍당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큰일에선 늘 정확히 판단을 내리는 식연입니다. 그가 무관심해서는 안 되지요.”
“맞아요, 맞습니다!”
백리욱은 갑자기 고무되었다.
“장군 말이 맞습니다. 식 장군은 제가 알아요. 식 장군이 알았다면 절대 여귀진 세자를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백리욱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청정전 밖에서 묵직하고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탁발산월은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빠르게 문가로 걸어갔다. 근위병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탁발산월의 앞에 반 무릎을 꿇었다. 근위병이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말했다.
“장군! 유풍당 쪽에서 전갈이 왔는데…… 식 장군이 붕당과 결탁한 죄로 자택에 감금되셨다 합니다. 귀복영이 유풍당 부근의 길목을 모조리 봉쇄하고 있어 우리 쪽 사람은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뭐라?”
백리욱은 얼이 빠졌다.
탁발산월은 흠칫 놀라며 근위병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죄라니? 이 상황에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게냐? 국주의 친서를 보았느냐? 귀복영을 동원한 자가 누구냐?”
“부장 뇌운백렬입니다. 국새가 찍힌 국주의 친필 명령을 들고 있는 것을 저희 쪽에서도 확실히 보았습니다!”
탁발산월은 말이 없어졌다. 백리욱은 머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식 장군이 죄를 짓다니…….”
탁발산월이 나직이 말했다.
“누가 내 숨통을 끊으려는 것인가?”
탁발산월이 휙 고개를 들었다. 백리욱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탁발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흉악한 기색이 번득 스쳤다가 무표정하게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탁발산월은 전각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구리 운판이 놓여 있었다.
“장군 안 됩니다!”
내감은 당황했다.
탁발산월은 나무 채를 들고 힘껏 운판을 쳤다. 운판이 쾅하고 울렸다. 운판의 울림이 대전 전체를 관통하며 어둠 속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자환궁 전체가 거대한 소리에 깰 것 같았다. 탁발산월을 미처 막지 못한 내감은 발만 동동 굴렀다. 운판은 전방에 전쟁이 긴박했을 때 신하가 국주를 알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하당은 평안하여 운판을 사용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그저 예기(禮器)로 진열해 두었을 뿐이었다. 내감이 기억하기로 최근에 운판이 쓰였던 적은 언관 하나가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분한 마음에 운판에 머리를 박고 죽었을 때였다. 그 일로 국주는 크게 노하여 언관의 피가 조정을 더럽혔다면서 언관의 시체를 황량한 교외에 야생개의 먹이로 던져 버렸다.
탁발산월은 이미 운판을 쳤고,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백리욱은 온몸이 오싹해졌다. 백리욱은 어렴풋이 느꼈다. 아까 그 순간 탁발산월의 얼굴에서 본 것은 국사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이빨을 드러낸 맹수의 분노와 불만이었다!
탁발산월은 힘껏 운판을 쳤고 한바탕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안쪽 궁전으로 통하는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자색 옷을 입은 장향 내감이 쟁반을 받쳐 들고 빠른 걸음으로 탁발산월의 등 뒤로 걸어왔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쟁반을 높이 들어 올렸다.
탁발산월은 쟁반에서 서신 조각을 집어 들고 천천히 펼쳤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그 자리에 선 채 넋이 나갔다. 나무 채를 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백리욱은 탁발산월에게로 다가가 보았다. 서신 조각은 한 통의 서신에서 뜯어낸 일부로 쓰인 내용은 단 여섯 글자뿐이었다.
-즉시 참수한다.
그 위로 작은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삼두(三蠹)1), 두 글자였다. 피처럼 새빨간 인주가 아직도 천천히 종이 위를 흐르는 것 같았다.
“장군…….”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백리욱의 마음은 이미 절망에 잠식되었다.
탁발산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막막함에 어쩔 줄 모르는 백리욱만을 청정전에 남겨둔 채 손을 내저으며 뒤돌아 문을 나섰다.
“주인님!”
늙은 하인 파찰이 말을 붙들고 궁 담벼락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탁발산월은 천천히 걸어갔다. 시선은 정면의 먼 곳을 향해 있고 손에는 서신이 들려 있었다.
“주인님, 돌아가십니까?”
파찰이 말안장을 바로 잡으며 다가갔다.
멈춰 선 탁발산월은 대답하지 않고 조각상처럼 침묵했다.
파찰도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옆에서 기다렸다.
탁발산월은 밤바람 속에 서신을 버리고 가장 냉담하고 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리 가문이 요괴로 나라를 다스리니, 방대한 구주가 곧 지옥이 되겠구나!”
동궁 편전.
여귀진은 구석에서 한껏 몸을 웅크렸다. 걸친 옷을 바짝 여미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이 편전은 사방의 모든 창이 문종이나 유리를 대지 않고 투각으로만 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백리욱은 여기에서 로 선생과 바둑을 즐겨 두었다. 여귀진은 바둑에 조예가 얕아 한쪽에서 보기만 했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천당(穿堂)2)을 지나가면 편안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자신이 이곳에 감금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창틀 너머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북극성 빛은 쇳빛을 띤 날카로운 검 같았다. 북극성은 정중앙에서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려는 듯 곧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를 것이었다.
여귀진은 늘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스승이 한 말을 기억했다.
‘지금은 신이 검자루를 주고 이 세상의 누가, 그 검자루를 잡을 수 있는지 지켜보는 시대이다.’
과거 여귀진은 이 말에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제 이 시대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어질 터였다. 이곳에 기대 조용히 생각했다. 사실 이 거대한 세상에 그와 관계된 이는 몇 사람뿐이었다. 백리욱은 여귀진에게 영웅이라 했지만 여귀진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장미 황제처럼 하나의 제국을 세울 수 없었다. 할아버지처럼 외적의 침략도 막아낼 수 없었다. 한때는 칼을 뽑아 들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꿈을 꾸었다. 이제 영월도도 매우 훌륭하게 다루었고 상양관에서 무수한 행시들을 죽이고 살길도 찾아냈다. 그런데 문득 자신은 결국 무능한 아이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하물며 나라는 말해 무엇할까.
이대로 죽는 걸까? 외롭게, 모든 것과 영원히 단절된 채 죽게 될까.
그때 문이 끼이익 열리고 인영 하나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여귀진 세자.”
그 사람은 소리 없이 들어와 쟁반 하나를 여귀진 앞에 놓고 뒤돌아 물러가려 했다. 쟁반에는 술 한 병과 국수 한 그릇,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양고기 국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여귀진은 시선을 들어 그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문득 그 뒷모습이 약간 익숙하게 느껴졌다.
“방산?”
여귀진은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사람이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몸을 돌리더니 공손하게 여귀진을 불렀다.
“여귀진 세자, 접니다.”
* * *
1) 백리 가문의 인장으로 삼두(三蠹)는 ‘의는 행상의 좀이며 인은 군 지도자의 좀이며 정은 인심의 좀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삼두를 경계로 삼고 인의를 남용하지 말라는 의미다.
2) 중국 가옥에서 두 개의 뜰 사이에 있어 통로 역할을 하는 당(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