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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4)
마침내 철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찰, 네가 멍청하다는 내 말을 넌 안 믿지. 근데 네가 아는 게 뭐야? 대군이 왜 우리를 세자의 심복으로 골랐는지 알아?”
철엽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
철안이 고개를 저었다.
“세자의 체력 때문이야. 세자는 새 대군에 오를 때까지 몸이 버티지 못해! 대군은 그걸 알았어. 세자를 아끼지만 세자의 병은 고칠 수가 없었지. 대군이 정말 세자를 대군에 앉힐 생각에 장생왕이 될 거라고 말한 줄 알아? 청양부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대군 자리에 앉히겠어? 하지만 대군은 세자가 평생 다치지 않고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가장 힘 있는 심복을 찾아준 거야. 대군이 소씨 대연지를 아내로 맞고 흠달한왕이 소씨 가문을 버리지 못한 것과 비슷한 이유지. 소씨 가문은 청양부에서 파소이 가문을 제외하고 가장 큰 가문이니까. 그래서 대군이 북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거야! 유일하게 대군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아들이 1왕자뿐이라는 것을 대군께선 줄곧 알고 계셨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1왕자파 사람이니 우리를 세자의 심복으로 보낸 거야. 우리 막속이 가문은 평생 세자를 지켜야 해. 대군은 바둑을 둔 거야. 우리는 세자를 평생 지켜야 할 말인 거고!”
철엽의 안색이 돌연 잿빛으로 변했다. 철엽은 입술을 두어 번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
철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대군이 어떻게 생각했든 우리는 이미 세자의 심복이야. 우리는 세자를 지켜야 해! 내가 가도 세자를 못 구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우리 가문의 명성을 보전할 수가 없어! 네가 간들 나랑 같이 죽기밖에 더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철엽은 조각상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한참 뒤 철엽은 거칠게 술단지를 통째로 들고 술을 들이부었다.
철엽이 일어섰다.
“난 상관 안 할래! 세자고 뭐고 몰라! 대군이고 뭐고 됐다고 해! 나는 형의 동생이고 형은 내 형이야. 형 버리고 가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야! 그냥 죽는 거잖아? 나는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아!”
술기운이 오른 철엽은 앞섶을 확 젖혀 맨가슴을 드러냈다.
“칼로 여기를 찔러서 심장을 파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야! 형이 가는 곳이 곧 내가 갈 곳이야!”
철안은 멍하니 제 아우를 쳐다보았다. 철엽도 고개를 숙이고 제 형을 보았다. 아까보다 더 빨개진 철엽의 눈이 점점 촉촉해졌다.
“파찰…….”
철안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저었다.
“다 컸구나……. 다 컸어!”
철안은 철엽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기 잔을 들어 올렸다.
“좋다. 우리 막속이 가문의 사내는 그 무엇도 두려워한 적 없지. 당연히 죽음도 두렵지 않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
철엽은 또 고개를 쳐들고 잔에 가득 찬 백주를 들이켰다.
철엽이 고개를 쳐든 그때, 갑자기 철안이 몸을 움직였다. 우람한 체구는 유난히도 날렵했다.철안은 단숨에 아우의 뒤로 가 팔오금으로 아우의 목을 졸랐다.
“형…….”
철엽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술만 튀어나왔다.
철안의 표정은 돌덩이처럼 차가웠다. 철안이 나직이 아우를 꾸짖었다.
“아버지께 아들은 둘뿐이야. 다 죽으면 아버지는 어쩌란 거냐? 한심한 놈!”
“형!”
철안은 철엽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묵직하고 힘 있게 철엽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철엽의 몸이 움찔하더니 힘없이 탁자에 엎어졌다.
철안은 마지막으로 아우를 한 번 쳐다보고는 탁자의 장도를 들어 허리춤에 차고 쓰개로 얼굴을 가린 뒤 주점 입구로 걸어갔다. 주점 문을 열자 서늘한 밤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 철안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입구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사내의 우람한 체구가 담벼락처럼 철안의 길을 막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칼을 뽑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아는 철안은 생각하지 않고 냅다 달려가 상대의 가슴에 부딪치며 교묘하게 그자의 팔을 비틀어 잡았다. 만족인이 흔히 사용하는 씨름 기술이었다. 철안은 이 기술로 대류영의 수많은 동륙 무사들을 물리쳤다. 오직 초원에서 진짜로 씨름을 해본 사람만이 이 단순한 비틀어 내던지기 동작에 얼마나 정교한 변화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철안은 완전히 실패했다. 상대는 매섭게 한 바퀴 돌며 도리어 철안을 그의 품에 가두고 두 팔을 뒤로 잡아당겼다. 힘을 잃은 철안은 어지러웠다. 상대는 놀랍게도 철안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이 녀석! 감히 내게 도전해?”
상대는 철안을 무시하듯 크게 웃었다.
유풍당.
식연은 조용히 못가에 앉아 연못에 물고기 먹이를 한 알씩 던져 넣었다. 벌써 가을 중반에 들어서 밤이 되면 날씨가 추웠다. 물속 깊숙이 가라앉은 나태한 물고기들은 수면으로 떠올라 먹이를 다투지도 않았다. 사방이 고요했고 먹이가 떨어지며 일으키는 물소리만 들렸다. 식원은 제 숙부 바로 뒤에 서서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맞비볐다. 추위에 손을 하도 비벼서 새빨개졌지만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연을 오랜 세월 따랐다 보니 제 숙부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이렇게 무심하게 있을 때는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평소 산만한 식연도 이런 때에는 생사를 가르는 결전을 앞둔, 진짜 장군다운 기개를 풍기며 무척 날카로웠다.
이 일은 식연이 무관심할 수 없는 일이라고 식원은 확신했다. 온 거리에 울리는 딱따기 소리가 유풍당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 이전에 분명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한참 뒤 식연이 보온병에서 따뜻한 백주를 꺼내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식원, 내게 할 말이 있구나?”
“숙부…….”
“말할 것 없다.”
식연이 식원의 말을 끊었다.
“나가봐라.”
“나가보라고요?”
식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문이나 열고 나가보려무나.”
고개를 끄덕인 식원은 곧장 유풍당 정문으로 갔다. 대문을 열자 놀랍게도 검은 갑옷의 무사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에는 비수를 물고 있는 박쥐 휘장이 있었다. 손에 든 칼에 달빛이 반사되어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그들은 식연이 직접 훈련시킨 귀복영 무사들이었다. 대류영의 정예 중에서도 정예였다. 그러나 식연은 한 번도 그들을 불러 제 집을 지키라 한 적이 없었다.
우두머리 귀복영이 뒤돌아 식원을 보고는 정중하게 다가와 예를 행했다. 식원은 귀복영의 백부장 중 한 명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뇌운 가문의 장자, 뇌운백렬이었다. 남회성에서는 뇌운백렬보다 아우인 뇌운맹호를 아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군에서는 뇌운백렬의 입지가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아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식원은 알고 있었다. 뇌운백렬은 겨우 스물일곱이지만 식연이 없을 때 귀복영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귀복영 통수였다.
“소장군, 일찍 쉬시지요.”
뇌운백렬이 말했다.
“왜 여기 있습니까?”
식원이 뇌운백렬의 눈을 보며 천천히 물러나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었다. 상대방의 말투에서 적의를 느낀 까닭이었다.
뇌운백렬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소장군, 장군께 세자의 일에는 관여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국주께서 지시하기를 식 장군이 유풍당에만 계신다면 절대 다른 죄목은 더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식원은 깜짝 놀랐다.
“죄목을 더하다니요? 내 숙부께 무슨 죄가 있어서요?”
“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합니다. 누군가가 붕당과 결탁해 국정을 어지럽힌 자로 식 장군을 지목했다더군요. 소 장군도 알겠지만, 우리는 다 장군께서 직접 길러낸 군인입니다. 명령에 따를 뿐, 절대 편의를 봐줄 수는 없습니다. 국주께서 친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식 장군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유풍당 밖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입구를 지키는 것이 저희 임무이며,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식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숙부께 죄를 물으신다니, 내게도 마찬가지겠군요?”
“아무도 드나들 수 없다 하였으니 당연히 소장군도 예외는 아니지요.”
뇌운백렬이 대답했다.
그는 무표정했다. 귀복 무사들은 동시에 칼자루를 잡았다. 수백 자루의 칼이 칼집을 스치며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식원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정, 자환궁 청정전.
탁발산월이 비휴도 칼자루를 꼭 쥔 채 조각상처럼 대전 중앙에 서 있었다. 당직인 내감 둘은 탁발산월의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못했지만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서로 눈짓만 건넸다.
삼군 통수 탁발산월은 저녁 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러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담이 조금 큰 내감이 사뿐사뿐 다가가 차를 한 잔 올렸다.
“장군, 목 좀 축이시지요.”
탁발산월이 고개를 저었다.
“차 마실 때가 아니네.”
내감은 조심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장군, 저희 아랫것들이 참견하려는 게 아니고요. 국주의 성정을 장군도 잘 아시잖습니까. 한번 마음먹은 일은 대신들이 줄지어 일 년 내내 무릎 꿇고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장군이 뵙기를 청한다는 전갈을 세 번이나 전했지만 국주께서는 어떤 의중도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지요. 장군께서 여기 이러고 계시면 저희 아랫것들만 난처해질 뿐입니다.”
탁발산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감을 흘긋 쳐다보았다. 내감은 살짝 몸을 떨었다. 탁발산월의 눈빛에 송곳이라도 숨겨진 것 같았다.
“나랏일이네. 자네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며 나 또한 물러날 수 없네!”
탁발산월이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내감이 다시 설득하려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감은 냉큼 청전전 문 밖으로 나갔다.
“감히 누가 청정전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멀리서 등롱 몇 개가 다가왔다. 내감이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 누군가가 내감의 가슴을 밀쳤다.
“비켜라!”
“네 이……!”
청정전에서 시중을 드는 내감은 모두 지위가 있는 환관이었다. 막 눈을 부릅뜨며 호통치려던 내감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백리욱이 빠르게 청정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어서!”
백리욱을 막으려 쫓아오던 내감들도 허덕거리며 청정전에 도착했지만 세자를 끌어내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한 명이 실수로 문틀에 걸려 넘어졌다.
“아이쿠.”
넘어진 내감은 앞니 두 개가 부러지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 탁발산월은 백리욱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란 두 사람은 이내 한 걸음 물러나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장군께서는 여기 왜…….”
“여귀진 세자를 위해 사정하러 오셨습니까?”
탁발산월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백리욱이 탁발산월의 옆으로 걸어가 그와 나란히 섰다.
“한참을 생각하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무능한 세자에 국정 경험도 없지만 아버지의 이번 결정은 너무 경솔합니다. 말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탁발산월은 고개를 돌려 젊은 청년을 훑어보았다. 유려하게 생긴 얼굴에 놀랍게도 결연한 기색이 어려 있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욱 세자께서 이 일로 깊은 밤 입궁해 알현을 청하시는 이유가 국정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귀진 세자와의 사적인 교분 때문입니까?”
백리욱은 예상치 못한 탁발산월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