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52화 (25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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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3)

희야의 집.

문틀 위로 가로댄 나무에 걸린 홍사등롱 두 개가 문 앞을 검붉게 비추었다. 희야는 조용히 문을 밀어 열고 좌우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담 밑을 따라 자기가 묵고 있는 북쪽 곁채로 걸어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희야의 습관이 되었다. 집 문을 들어서면 중당의 큰 길로 가지 않고 잔디에 스스로 만들어낸 작은 길을 따라 자기 방으로 갔다. 뭐가 두려워서는 아니고, 그 얼굴들이 보기 싫었다.

“희야!”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근심에 잠겨 있던 희야가 휙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의 처마 밑에 희겸정이 서 있었다.

“아버지.”

무심하게 인사를 한 희야는 문득 의아했다. 희겸정은 단 한 번도 한밤중에 희야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희야는 대체로 세 식구가 모두 잠들면 몰래 집으로 돌아왔고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성 밖의 대류영에 가 훈련을 했기 때문에 온종일 만날 수가 없었다. 희겸정은 희야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버렸다. 다만 하녀에게는 문을 열어두라고 하고 집에 붙어 있지 않는 개를 기르듯 내버려 두었다.

“이리 늦게 어디를 다녀오느냐?”

희겸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가서 좀 걷다 왔어요.”

희야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희겸정은 경멸하듯 위아래로 희야를 훑어보았다.

“열여덟이다! 열여덟! 나는 네 나이 때 벌써 황실 소부의 관리였다! 금군 군관씩이나 되는 놈이 위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멍청한 떠돌이 같구나!”

희야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희야는 이미 제 아버지보다 키가 컸다. 그래서 희겸정은 희야가 고개를 숙여도 그의 먹처럼 새카만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희겸정은 그런 희야를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조상께 제사를 지낼 것이다! 맹호소아창을 가져와라. 내 기름칠해서 광을 내야겠다.”

희겸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희야는 대답하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맹호소아창을 꺼내 왔다.

희겸정은 덥석 창을 가져가더니 희야를 힐끗 흘겨보며 말했다.

“요즘 성안이 뒤숭숭해서 내일 제를 올릴 것이니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일찌감치 자라!”

희겸정이 뒤돌아 떠났다. 희야는 그제야 불현듯 8월은 제사를 지내는 달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깨닫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온 희야는 옷도 벗지 않고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며칠째 우연을 보지 못했다. 여귀진을 보지 못한 지는 더 오래되었다. 곧 우연의 생일이었다. 예년대로라면 여귀진과 희야는 당연히 우연에게 선물을 할 것이었다.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 선물을 꺼낼 것을 생각하자 마음속 온갖 짜증이 한꺼번에 치솟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 짜증스럽지 않을 테니까. 일어나 앉아 촛불을 끄려던 희야는 문득 탁자에 놓인 서신을 보았다. 희씨 가문이 망하긴 했어도 황성의 명문 귀족이었다. 그래서 귀족 가문의 법도에 따라 서신은 모두 하녀가 받아 가주와 공자들의 탁자에 가져다 놓았다. 그동안 희야는 한 번도 서신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탁자에는 서신 두 통이 청석 문진에 눌려 있었다. 희야는 서신을 집어 들었다. 더 이상하게도 서신 두 통에는 전부 서명이 없었다.

희야는 첫 번째 서신을 펼쳤다. 익숙한 필체였다. 우연의 글자는 늘 이렇게 삐뚤빼뚤했다. 우연은 동륙 문자와 말에 능숙했지만 붓글씨에는 조금도 공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희야, 아소륵.

미안해. 나 떠나. 고향에서 사자가 왔어. 언젠가는 올 줄 알고 있었어. 한 번도 너희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한 적 없어. 너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언젠가 청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언제일지는 몰랐는데 그날이 갑자기 찾아왔네.

너희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아서야. 이곳에 올 때도 그랬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할아버지와 말을 타고 먼 길을 걸어 도착했지.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돌아올 거야. 할아버지와 말 한 마리씩 나눠 타고 돌아올게.

아주 먼 곳에서도 너희를 생각할 거야. 하지만 맨날 그리워하고 싶진 않으니 금방 돌아올게.”

낙관은 ‘살서마이·근화’였다. 서명이 무척 예뻤다. 여귀진이 시간을 많이 들여 우연에게 이 몇 글자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희야는 우연이 왜 이 글자로 자기 낙관을 만들었는지 몰랐다. 매번 물을 때면 우연은 신비로운 표정을 하고서 이 이름은 비밀이라고만 말했다. 이 이름을 보면 자신의 가장 친한 벗만이 자기가 남긴 흔적임을 바로 알 거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신 귀퉁이에 우연은 아주 작은 글씨로 한마디를 덧붙여 두었다.

“희야, 아소륵에게도 이 서신을 보여줘. 원래 두 통을 쓰려고 했는데 어쨌든 똑같은 내용이잖아. 그래서 너희 둘에게 한 통만 쓰기로 했어.”

희야는 말없이 서신을 여러 번 읽었다. 서신이 희야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리며 촛불에 닿았다. 서신에 구멍이 나는 순간, 희야는 냉큼 서신을 두드려 껐다. 그리고 침상에 앉아 창밖의 흔들리는 해당화 나무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보처럼.

한참 뒤 희야는 다른 서신을 펼쳤다. 역시나 필체가 익숙했다. 여귀진의 아름다운 휘양체는 로 선생에게 직접 전수받은 필체였다.

“희야에게.

미안해. 나 떠나게 됐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북도성이 몹시 혼란하대. 국주 말론 이제 내가 북륙에 돌아갈 때래. 국주는 환 공주까지 내게 시집보냈어. 네게는 미리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정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비취 팔찌는 우연이 좋다고 했던 거야. 내가 샀어. 우연 생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려고 했는데 곧 떠나게 되었네. 네가 전해줘. 우연이 이 팔찌를 정말 마음에 들어 했어. 여러 번 말했거든. 내가 샀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 혼인한다는 얘기도 안 해서 나한테 엄청 화나 있을 거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너와 우연이 없었다면 난 남회성에서 아무 관심도 못 받는 일개 만족이었을 거야.”

서신 아래에는 ‘아소륵’이라는 서명이 쓰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묵직한 것이 들어 있었다. 희야는 얼른 봉투를 거꾸로 들었다. 푸른 비취 팔찌가 희야의 손바닥으로 쭈르륵 떨어졌다. 희야의 손이 떨렸다. 옥팔찌를 쥐고 촛불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그러자 짙은 청록빛이 탁자에 이리저리 떠다니며 순간 넘쳐흘렀다가 또 다음 순간 사라졌다가 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진 희야는 창가로 달려가 목을 내밀고 크게 밤바람을 들이마셨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슴이 꽉 막힌 듯 유난히 괴로웠다.

담 너머, 저택 밖의 거리에서 다급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탁탁탁 딱따기를 두드렸다. 극도로 드문 일이었다. 군관인 희야는 화급을 다투는 상황에만 빠른 말을 보내 성 전체에 소식을 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희야는 아직까지 메우지 않은 담벼락 구멍을 비집고 나갔다. 군사 하나가 말을 세우고 벽에 포고문을 붙이고 있었다. 다가가 포고문을 흘긋 본 희야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매우 긴 포고문에서 희야는 딱 한 줄만 똑똑히 보였다.

-금장국 인질 여귀진을 내일 아침 참수한다!

성 서쪽 주점.

깊은 밤, 손님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구석의 탁자에만 손님 둘이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졸린 주인장은 벌써 술독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 바깥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번개처럼 밀려왔다가 잠시 멈추지도 않고 그대로 멀어져갔다. 손님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그는 창문을 살짝 잡아당겨 그 틈으로 몰래 내다보았다.

“돌아와!”

탁자를 지키고 있던 손님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우리를 찾고 있어! 형, 저들은 우리를 잡으려고 온 성을 이 잡듯 뒤질 거야!”

창가에 선 손님의 목소리는 낮지만 다급했다.

“파찰!”

철엽은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바위처럼 침착한 제 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철안은 차분하게 술잔을 들고 술을 마셨다.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철엽은 제 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굳은 얼굴뿐이었다.

“궁에서 야간 통행금지 명령을 내렸어. 성 곳곳의 빠른 말들은 내일 세자를 참수한다는 방을 붙이는 거야. 하당 군영에서 오랫동안 훈련해 놓고 어떻게 아직도 동륙인의 규칙을 몰라? 변고가 생기면 우리를 습격당한 사슴처럼 허둥대기나 하고 말이야. 대군께서는 이런 추태나 보이라고 우리를 남회에 보내신 게 아니야. 세자를 보호하라고 남회에 보내셨지!”

철안이 제 아우를 나직이 꾸짖었다.

“저들이 우리 둘을 찾는 것도 맞아. 하지만 저들은 대류영에 사람을 보낼 거야. 여기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어떡해? 세자가 참수되게 생겼는데 북도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잖아. 대군께서 정말 돌아가신 걸까?”

“목소리 낮춰!”

철안이 주인장을 흘긋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저자를 깨울 셈이야?”

철엽도 철안을 따라 주인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칼자루를 꽉 움켜쥐며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멍청한 놈! 그게 이런 사람을 죽이라고 있는 칼이냐?”

철안이 아우의 뺨을 후려쳤다.

“내 말 들어! 지금 바로 성 동쪽의 그 집으로 가서 홍길랄을 데리고 가! 성문 부근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날 밝을 때까지 기다려. 세자를 참수할 때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구경할 테니 현장이 무척 어수선할 거야. 성을 지키는 군대도 이쪽 경비로 차출될 거고. 그때가 네 기회다. 네 실력이면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쯤은 문제없을 거야.”

철엽은 놀라 멍해졌다.

“왜 나야? 내가 왜?”

“홍길랄은 고작 세 살이야! 아직 고향의 초원도 못 봤어! 네가 데리고 돌아가!”

“홍길랄은 형 아들이야! 형이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나 보내고 혼자 남아서 세자를 구하려는 거잖아.”

철엽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난 안 가! 겁쟁이처럼 북도로 돌아가기 싫어. 평생 얼굴도 못 들고 살 거라고!”

“멍청한 놈!”

철안의 안색이 변했다.

“형도 나도 세자의 심복이야. 심복은 주인을 따라 전쟁에 나가 적을 죽여야 해. 형은 영웅이 되려고 하면서 나보고는 겁쟁이가 되라니, 거기에 응하는 거야말로 진짜 바보지!”

철엽은 표독스럽게 제 형을 노려보고는 고개를 쳐들고 잔 가득 담긴 백주를 들이부었다.

“어처구니가 없네! 내가 왜 가려는지 네가 알아?”

“몰라! 상관없어! 내가 아는 건 나는 세자의 심복이고 우리는 형제란 사실이야! 죽을 때가 되어도 우리 만족 사내는 머리를 움츠리지 않아!”

주량이 약한 철엽은 벌써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철안은 제 아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철엽도 전혀 물러나지 않고 매섭게 제 형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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