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51화 (251/360)

251

4장. 일생의 맹약 (2)

남회성 문에는 진홍색 깃발이 걸려 있었다. 밤이 깊어 인적은 드물었고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은 희희낙락하면서 큰 솥을 에워싼 채 고기를 삶고 있었다.

“누군데 야밤에 성을 나가느냐?”

우두머리인 십장은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말 세 필을 알아차리고 살짝 경계했다.

익한은 바짝 긴장하며 슬그머니 어깨에 건 녹류궁을 쥐었다. 익한이 능력은 출중하나 동륙인을 상대하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익천첨은 말을 몰아 살짝 앞으로 나가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아예 쓰개를 벗고 말했다.

“나리, 저희는 우족 상인입니다. 물건을 운반하러 성을 나가는 길이지요. 청석성에서 출항하는 배에 서둘러 가야 합니다.”

십장은 군사 몇 명을 이끌고 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의 시선이 익천첨의 손에 든 긴 창에 모였다.

“무기를 지니고 있군? 행첩에도 무기를 휴대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쓰여 있겠지?”

익천첨은 행첩 세 장을 올렸다.

“세 사람에 활 하나와 창 하나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첩에 다 쓰여 있지요. 우족의 호위인데 무기도 없이 주인을 어찌 보호하겠습니까?”

익천첨은 긴장한 표정의 익한을 가리켰다. 익한은 걸출한 청년이자 사달극성방의 귀족 자제였다. 얼굴을 굳히고 있으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겨 확실히 이 무리의 우두머리 같아 보였다.

“허허, 이리 나이든 호위라니. 밥 벌어 먹고살기도 힘들군!”

십장이 개탄하더니 또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가지고 나가는 물건이 뭐지? 물건을 운반하러 나간다면서 마차도 없는가?”

익천첨은 흠칫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외투를 덮어쓰고 있는 우연을 가리키며 시정잡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리, 죽은 것만 상품이 아니지요. 산 물건도 상품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장은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 원래…….”

익천첨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손을 붙잡고 슬그머니 금수 한 냥을 손바닥에 밀어 넣었다.

“좋소, 좋아! 문제없소! 나가시오! 밤길 조심하고!”

십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자기 부하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찬란한 금수가 손가락 사이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참 경사스러운 날이로구나! 기분 좋게 양 다리도 하나씩 뜯고, 소소한 횡재까지 하다니!”

익한은 우연을 보호하며 먼저 성문을 나섰다. 익천첨은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무심하게 한 마디 물었다.

“한 사람당 양 다리가 하나씩이나 됩니까? 정말 좋은 날이로군요.”

“오늘 금장궁의 여귀진 세자와 우리 환 공주께서 혼인을 치르는 날이네! 국주께서 야간 수위에게 상으로 두당 술 한 병과 양 다리 하나씩 하사해 주셨지. 거의 다 익었네. 바쁜 자네들은 어서 가보시게. 안 바빴으면 술 한 잔 나누어 마시고 시끌벅적하게 놀았을 것을.”

우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쓰개가 떨어지고 면사도 흘러내렸다. 금색 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렸다.

“아소륵…….”

우연이 나직이 읊조렸다.

익한은 긴장하며 황급히 우연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연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오, 파는 물건이…… 어떻게 우인인가……. 우인을 청주에 팔 필요가 있소?”

십장은 물끄러미 우연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생김새가 참으로…….”

그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명령을 전달하는 군사가 금국화 영패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성문 입구에서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 국주의 명이다. 오늘밤 즉시 성을 봉쇄한다! 어서 성문을 닫아라!”

십장이 황급히 다가가 예를 올렸다.

“왜 또 성문을 닫는답니까?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 아닙니까? 형제들도 막 고기를 삶아 술을 마시며 좀 쉬려고 하는 참인데요!”

전령이 고개를 숙이고 십장의 귓가에 뭐라뭐라 말을 하자 십장의 안색이 돌변했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

십장은 군사들을 향해 고함쳤다.

“빨리 성문을 닫아!”

익천첨의 낯빛도 변했다. 긴 창을 쥔 손에 푸른 힘줄이 불퉁 튀어나왔다. 대담하게 말을 타고 성을 나가려 했던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다. 사실 날개를 펼쳐 남회성 성벽을 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익한의 정보에 따르면 추격해온 학설들이 남회에 거의 도착했을 터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밝은 밤에 날개를 펼치면 상당히 위험했다.

“거기 자네들, 누구지?”

전령이 익천첨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 상인들입니다. 행첩 검사도 마쳤습니다. 어서 가시게!”

십장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익천첨의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힘껏 쳤다.

“성문을 닫아라! 어서 성문을 닫아!”

익천첨의 백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성문을 달려 나갔다. 그는 우연의 말고삐를 홱 잡아당겨 함께 질주했다. 익한은 그들의 말 뒤를 바짝 쫓았다. 처음으로 공주의 얼굴을 본 익한은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찌릿했다. 우연의 아름다움은 신이 하사한 선물이자 치명적인 독약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들고 또 고통스럽게 했다.

말 세 필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성문은 그들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대체 성문을 왜 닫는답니까?”

군사들이 불평하며 성문을 밀었다.

“금장국에서 우리 사절단을 죽였대. 동맹은 깨졌고 혼인도 파투가 났어!”

십장이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내일 여귀진 세자의 목을 벤다는군!”

자정이 지난 시각.

희야는 나무 위에 웅크리고 앉아 발을 굴렀다. 말랑한 가죽신도 나름 발에 맞는 것 같았다. 지금 희야는 영예로운 금군 갑옷이 아닌 새카만 무복을 입고 어깨에는 긴 밧줄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천라 자객들이 이런 차림을 한다고 책에서 읽었다. 이렇게 입으면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출 수 있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걸을 때도 소리 한 점 나지 않아서 한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사주장전록>에 보면 장미 황제의 군대에 이런 명수가 적잖았다. 종종 병력이 상대보다 못한데도 적장이 밤사이 난데없이 죽곤 했다. 희야는 어느 장사꾼에게서 이 옷을 한 벌 샀다. 밤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들면 검은 옷을 입고 나와 자기가 장미 황제 휘하의 신출귀몰한 신비의 무사라고 상상하면서 창 연습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처음으로 이 옷을 입고 실전에 나섰다.

희야는 갈고리를 비끄러맨 밧줄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빙빙 돌렸다. 한데 밧줄이 회전하면서 휙휙 소리가 나는 것이 고요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힘을 조금 줄이면 또 밧줄이 흐트러져 몸을 휘감았다. 희야는 하는 수 없이 감긴 밧줄을 풀고 다시 휘둘렀다. 얼마간 연습하자 이 비구(飛鉤)1)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조금 왔다. 하지만 비구를 휘둘러 던지자 담 너머의 나무에 걸리기는커녕 담 모퉁이의 낡은 독에 날아가 독이 깨져 버렸다.

고요한 밤 우렁찬 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갔다. 놀란 희야는 나무 그늘 속에 머리를 움츠렸다. 오랫동안 지켜보았지만 길모퉁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갔을 뿐, 사람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희야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장미 황제 군대의 자객들도 전부 대단한 고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남의 집 독을 깼을 테지만, 세심하지 못한 야경꾼들이 무시하고 지나간 것이리라.

연달아 몇 번 시도하자 마침내 비구가 굵은 나뭇가지에 걸렸다. 희야는 기뻐하며 줄을 잡아당기고 휙 뛰어올라 뜰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착지는 나름 순조로웠다. 희야는 민첩하게 몸을 굴린 뒤 허리춤의 청사를 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자신만만해진 희야는 담벼락 밑에 바짝 붙어 몇 걸음 뛰어갔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반쯤 쭈그리고 앉아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내부는 조용했다. 창문으로 불빛도 비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밤빛을 가렸다. 책에 나온 설명대로, 작업하기 딱 좋은 시기였다.

희야는 담벼락에 붙은 채 정문 앞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자물쇠를 따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어 조금 불안했다. 하락 상인에게 구매한 세상 자물쇠의 9할은 열 수 있다는 이 열쇠가 정말 쓸모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희야는 자물쇠를 찾아 잡아당겨 보았다. 한데 툭 소리가 나더니 알아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희야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자물쇠를 손에 잡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자물쇠가 하마터면 일을 망칠 뻔했다. 옥 가게 사람들도 참 칠칠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밤에 문도 걸어 잠그지 않는단 말인가. 전부 금수 수백 냥에 달하는 고가의 물건인데 도둑이라도 들면 모조리 도둑맞기 십상이었다.

희야는 자기가 바로 그 도둑이라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주위를 더듬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대옥해를 지난 희야는 머리를 숙이고 앵무새 옥 조각 아래를 재빨리 지나갔다. 저번에 왔을 때 몰래 방향을 세심히 외워두었다. 어둡기는 했지만 그림자를 이용해 비슷하게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직 창문에 걸려 있는 푸른색 옥규가 새카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옥규에는 관심 없는 희야는 후당으로 통하는 문을 더듬더듬 찾았다. 바깥의 불빛이 새어 들어와 모든 옥기가 영롱한 빛을 반사했고 덕분에 희야는 간신히 통로를 찾을 수 있었다.

후당 문은 건물 오른쪽 귀퉁이, 어둠 속에 가려져 있을 것이었다. 희야는 몇 걸음만 더 가면 도착할 거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문득 무언가를 밟은 느낌이 들고 희야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무예를 연마해온 그간의 세월이 시간 낭비는 아니었는지 균형을 잃는 순간 허리를 숙이며 옆으로 몸을 굴려 반쯤 웅크리고 앉았다. 속으로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앞에 불씨 하나가 일렁였다. 그 너머로 노쇄한 눈이 보였다. 침침한 두 눈이 몽롱하게 희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희야는 깜짝 놀라 펄쩍 뛸 뻔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그때, 노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리였군요! 그 옥팔찌 찾으러 오신 거죠?”

이 가게의 주인, 나이 많은 옥공이었다.

어리둥절한 희야가 제 얼굴을 더듬었다. 깜빡하고 복면을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복면은 허리띠 안에 들어 있었다. 완전히 자신감을 잃은 희야는 머뭇머뭇하며 부싯깃을 든 옥공을 보더니 아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돌아오겠다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한데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네요.”

옥공은 웃으면서 부싯깃을 후 불어 껐다.

희야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자신이 밟은 것이 옥공의 다리였음을 깨달았다. 옥공이 옥기 더미 안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시면 드리려고 팔찌를 남겨두었는데 낮에 누가 와서 사갔습니다.”

옥공은 다리의 재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분도 전에 왔던 손님이거든요. 마음에 들어 하셔서 거절하기가 곤란했습지요.”

희야는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물었다.

“밤이 깊었는데…… 잠은 안 잡니까?”

“일어나 이것저것 보고 있었는데 누가 들어오지 뭡니까.”

희야는 자물쇠가 왜 열려 있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객이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아 보였다. 그는 한낱 좀도둑도 해내지 못했다.

“돈이 부족하시지요?”

옥공이 온화하게 말했다.

“뒷돈도 요구할 줄 모르는 분 같더군요. 녹봉만으로는 빡빡하겠지요.”

희야의 머리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돈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희겸정이 희야에게 돈을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래저래 모은 돈은 기껏해야 금수 20냥이 못 되었다. 술 마시고 노름하는 돈은 거의 여귀진이 냈다. 희야는 그게 미안해서 모은 금수를 여귀진에게 주었다. 여귀진은 늘 됐다고 했지만 희야가 고집을 부리니 받는 수밖에 없었다.

옥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옥석은 값나가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왜 밤에 잠을 안 자시오?”

희야는 말을 툭 뱉고서도 자기 질문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을 떠나게 되어서요. 아쉬운 마음에 일어나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떠나시오?”

“남회성 집세가 너무 비싸서요. 옥기의 원석도 점점 비싸져 번 돈으로 집세도 못 낼 지경입니다. 가게가 작아서 큰 상점처럼 장사가 잘되는 것도 아니고 열흘에서 보름 동안 물건을 못 팔 때도 있답니다. 조금 모아둔 돈이 있을 때 심양으로 돌아가려고요. 그래도 못내 아쉽네요.”

옥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옥공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이것도 인연인데 사반옥은 없으니 못 드리겠고 다른 옥팔찌 하나 골라보시겠습니까? 제가 마지막 손님께 드리는 선물로 치지요.”

희야는 고개를 저었다.

“벗에게 주시려는 겁니까?”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물에 모래를 씻어내니 계집의 귀밑머리 하얗게 세누나.

빨래를 마치고 느지막이 돌아오면 함께 배를 타고 연을 따리.”

옥공이 나직하게 속요 한 곡을 흥얼거렸다.

어째서인지 희야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잠시 마주앉아 있던 희야는 소리 소문 없이 물러갔다. 옥공도 더는 희야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 * *

1) 밧줄이나 쇠사슬 끝에 갈고리가 달려 성벽 등에 걸 수 있는 형태의 고대 무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