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50화 (25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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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생의 맹약 (1)

8월 열이틀 저녁. 남회성, 남궁.

양측으로 손님들이 마주 앉아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모두 현홍(玄紅)색 옷을 입었다. 현홍색은 기본색이었다. 동륙 귀족의 혼례복은 모두 검은색에 은은하게 붉은기가 도는 현홍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신랑 신부는 소매를 그러모은 채 혼당(婚堂) 앞에 섰다. 어스레한 햇빛이 창틀 안으로 비추어 들어와 좌석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종이 쟁반에 놓인 표주박을 올렸다. 표주박 옆으로 하얀 비단으로 싸맨 단도가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여귀진은 옆에 선 백리환을 쳐다보았다. 백리환은 고개를 숙인 채 뽀얗고 부드러운 손을 칼자루에 얹었다. 여귀진이 손을 내밀어 백리환의 손을 잡고 함께 단도를 들었다.

밝은 빛이 번쩍이고 표주박 가운데가 예쁘게 갈라졌다.

손님들은 손뼉을 쳤다.

시종이 술 단지를 올렸다. 백리환과 여귀진은 갈라진 표주박을 한 쪽씩 들고 술을 떠 맛보았다.

손님들이 또 손뼉을 쳤다.

여귀진은 말없이 표주박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이제 그도 가정이 있는 사내가 되었다. 혼례식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표주박은 깔끔하게 잘려 온전한 두 개의 바가지로 나뉘었다. 아주 좋은 징조였다. 여귀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은 많지 않았으나 모두 지체 높은 이들이었다. 동륙 귀족은 단순하지만 엄정한 혼례를 추구했다. 혼당에 초대된 손님은 모두 가족과 혈연을 대표하는 가문의 어른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선물만 보내고 수십 보 멀리 떨어져서 혼례식을 구경했다. 노인들은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흐릿한 눈빛으로 전방을 쳐다보았다. 침침한 눈으로는 신랑신부의 얼굴도 잘 안 보일 것 같았다. 말석에 앉은 백리욱만이 여귀진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리욱은 위풍당당한 하당의 세자였지만 거대하고 엄격한 백리 가문에서는 아이에 불과했다. 여귀진은 백리욱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다만 국주 백리경홍이 손님 중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이상했다.

손님들은 일제히 일어나 차례차례 물러갔다. 혼례는 이미 끝났고 이제 신방에 들어 부부간의 예를 치르는 일만 남았다.

큼직한 혼당은 몇 명만 남고 돌연 텅 비었다. 여귀진은 고개를 돌려 갓 혼인한 자신의 아내를 보았다. 백리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새카맸다. 화장이 두꺼워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안쓰럽게도 옷깃 쪽의 눈처럼 뽀얀 목덜미가 발개져 있었다. 백리욱은 가문의 어른들과 함께 떠나지 않고 혼당에 남았다. 금 연주와 시문밖에 모르는 청년은 오늘 군장을 하고 혼당 입구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손에는 백리 가문에 전해오는 명검 ‘청상(靑桑)’을 들고 있었다. 백리 가문에서 젊은 미혼 남자인 그가 신혼 첫날밤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 검을 들고 귀신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

여귀진은 곁눈질 한번 하지 않는 엄숙한 백리욱의 얼굴을 보고 그만 웃음이 날 뻔했다.

시녀들이 다가와 예를 올렸다.

“세자 전하, 공주 전하. 저를 따라오시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긴 보도를 걸었다. 양쪽으로 붉은 초가 놓여 있었다. 불빛에 비친 백리환의 뺨은 새빨갰고 손은 살짝 떨렸다. 여귀진은 슬며시 백리환을 쳐다보았다. 귀하게 자란 소녀의 마음은 아마 기대감과 불안으로 가득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백리환은 여귀진의 아내였다. 긴긴 세월을 이 소녀와 함께할 것이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아플 땐 서로 돌봐주고 봄이 오면 함께 수레를 타고 멀리 유람을 다니며 세월을 보내겠지. 두 사람은 하루 또 하루 흰 머리가 나고 주름이 생기고 이가 빠지고 허리가 굽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어느 날 여귀진이 죽으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소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어줄 것이다. 관 뚜껑에 엎드려 왜 이렇게 빨리 자신을 떠났느냐고, 당신이 떠나면 나는 어떡하느냐고 울부짖겠지. 그리 생각하자 불현듯 여귀진은 백리환에게 연민이 느껴졌고 하여 살며시 그녀의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백리환은 순간 손을 파르르 떨더니 가만히 있었다. 손바닥에서 차츰 온기가 전해졌다. 여귀진은 백리환의 몸이 자신에게 조금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백리환의 팔이 여귀진의 팔에 가볍게 스쳤다. 옷감 너머로 소녀의 비단결같이 보드라운 피부를 느낄 수 있었다.

“무서워 마시오.”

여귀진이 조용히 말을 건네고는 또 한 마디 덧붙였다.

“사실 나도 겁이 난다오…….”

몇 걸음 걸었다. 여귀진의 귓가에 백리환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버지!”

갑자기 밖에서 백리욱의 외침이 들려왔다.

여귀진과 백리환은 깜짝 놀라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백리경홍의 얼굴이 보였다.

백리경홍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표정은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이마에는 푸른 힘줄이 불툭거렸다. 그의 뒤로 대신 한 무리가 다급히 쫓아왔다.

“국주, 안 됩니다……. 아니 됩니다!”

장사(長史)1) 하나가 국주의 옷소매를 붙잡고 말렸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백리경홍은 세차게 그를 뿌리치고 뒤돌아 여귀진을 노려보았다.

“세자는 아는가? 그대의 형이 우리 하당의 사절단 전원을 죽이고 하당과 동맹을 끊겠다고 선포했네. 그리고 순국과 동맹을 맺었다지?”

여귀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가장 아끼는 딸을 그대에게 시집보내고 청양부에 질 좋은 쇠붙이와 무기도 보냈네. 하당은 장장 8년이나 자네를 귀빈으로 대접했는데 청양은 정녕 이리 보답하는 겐가?”

백리경홍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선택권을 두 개 주지.”

“선택권이라뇨?”

“첫째, 그대는 여전히 우리 하당의 사위인 것이네. 청양의 세자인 그대가 직접 천계성의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서 만족의 주인은 그대이며 형은 폭정으로 대군 자리를 빼앗은 강도라 말하게. 그럼 우리 하당의 10만 병사가 그대를 안전히 북도로 데려가 본래 그대의 것이었던 자리를 되찾아줄 것이네. 그대가 북륙의 대군이자 초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 아니면!”

백리경홍은 허리춤의 패검을 끌러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백리욱과 더불어 백리경홍을 만류하려던 대신도 검 앞에서 더 말을 얹지 못하고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백리환은 이마를 짚고 휘청하더니 시녀의 품에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딸을 등진 채 그녀의 낭군을 뚫어져라 노려보았고 그녀의 낭군은 조용히 바닥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를 하당의 노예로 삼아 전쟁터에 내보내시려는 겁니까?”

여귀진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이미 그대의 형이 즉위했는데, 그대가 어떻게 주인이 되겠는가?”

백리경홍은 온 힘을 다해 음침한 말투 속에 폭발할 듯한 분노를 감추었다.

“이제 누구의 노예가 될지 선택하는 길뿐이네!”

“여귀진 세자! 아소륵! 아직 만회할 기회가 있어. 아버지, 아버지…….”

참다못한 백리욱이 다가가 제 아버지의 소매를 꼭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귀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붉은 비단으로 덮인 지붕에 대고 가볍게 뱉었다.

“청양의 사내는 누구의 노예도 하지 않습니다!”

여귀진은 백리경홍의 눈을 보며 또박, 또박 이야기했다.

이 말을 하고 나자 여귀진은 불현듯 온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소마의 언니가 떠올랐다. 붉은 옷을 입은, 더없이 아름다웠던 소녀 용격심 오앙마 고살이. 그녀가 죽기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여귀진은 이 말을 직접 하고서야 알았다. 정말 멋진 말이란 것을. 뱉은 것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 말이었다.

백리욱은 몸을 바르르 떨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욱 세자, 지난 몇 년간 많이 고마웠어.”

여귀진은 백리욱의 눈을 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여귀진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돌아섰다. 아내를, 그리고 장인을 등진 채 천천히 혼당을 나갔다.

달빛 속에서 익천첨은 마지막 보따리를 말안장에 묶고 잡아당겨 수백 리를 달려도 떨어지지 않을지 점검했다.

“준비 다 됐는가?”

익천첨이 고개를 돌리고 우연과 익한을 훑어보며 물었다.

“다 됐습니다. 공주 전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한이 대답했다.

익한의 말은 청색 만족 준마였다. 준수하고 우아했다. 익한은 동륙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외투의 쓰개를 덮어 써 은백색 머리카락을 가렸다. 등에는 활을 메고 우연의 뒤로 말 몸통 길이 반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엄호했다. 우연도 차림은 같았으나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익한은 공주의 진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짙은 장미색 눈동자만 보았을 뿐. 지금 공주는 시선을 아래로 드리운 채 발끝만 보고 있었다. 익한은 감히 방해할 수 없어 조용히 기다렸다.

“가죠.”

우연이 고개를 들었다.

익천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횃불을 던졌다. 횃불이 지붕 위에 떨어졌다. 등유에 흠뻑 젖은 짚에 금세 불이 붙었다. 화염이 빠르게 집 전체를 집어삼켰다. 칠흑 같은 밤, 이글대는 사나운 불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익천첨은 9년 전이 떠올랐다. 금수 120냥을 주고 이 집을 샀었다. 지금 이 집을 판다면 금수 180냥은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우연은 이 집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소녀에서 지금의 공주 전하로 자랐다. 기억을 되짚자니 9년이란 세월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탄 익천첨은 말을 몰아 우연과 익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익한을 흘긋 쳐다보았다.

“먼저 성문에 가서 살펴보게. 나는 공주와 곧 뒤따라가겠네.”

익한은 익천첨의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아 주저했다.

“어서!”

익천첨이 말투에 힘을 주었다.

익한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바람처럼 떠나갔다.

익첨첨은 우연이 탄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우연의 말은 곧 익천첨의 말 뒤를 천천히 따라 갔다.

“정말 작별인사도 안 할 게냐?”

한참을 가다가 익천첨이 불쑥 물었다. 우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대로 헤어지죠, 뭐. 걔들도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잖아요. 그냥 왔을 때처럼 이렇게 갈래요. 걔들은 내 이름이 우연이란 것만 알아요. 옥고륜 공주니 우황의 딸이니 태격리사 희무신이니 하는 건 모르죠.”

“너 때문에 화를 입을까 봐 걱정인 게냐?”

“희야와 아소륵은 항상 행복하면 좋겠어요.”

“매의 휘장을 이어받은 아이들이다. 무신의 손에 들린 검이니 행복할 순 없지.”

우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또 한참이 지나고 익천첨이 불쑥 물었다.

“우연, 두 아이 중에 너는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

우연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타그닥타그닥.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드문드문 내리는 봄비를 닮았다.

“사실 마음으로는 알고 있어요.”

우연이 아주 작게 말했다.

익천첨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알면 되었다. 내게 말해줄 필요는 없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알고, 우연이 다 컸구나.”

“우린 돌아올 거예요! 그렇죠?”

우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연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익천첨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르겠구나. 나는 어떤 약속도 해줄 수가 없다. 하지만 네가 마주해야 할 것은 우족 전체의 미래다. 너는 태격리사의 희무신이고, 공주이며 성녀다. 네가 가는 곳마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너를 신이 내려준 숲의 구원자로 볼 것이다. 또 누군가는 너를 죽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겠지. 네 평생 재앙과 영광이 동행할 것이다……. 그런데도 돌아오고 싶으냐?”

“청주는 내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남회도 마찬가지예요.”

우연의 목소리는 작고 가늘었지만 매우 신중했다. 거절도, 회의도 용납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러니 나는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익천첨은 마음속 어딘가가 불현듯 떨렸다. 단단하기 그지없던 얼음이 따스한 바람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나이를 먹고도 열여섯 살 소녀의 순진한 말에 천지만물이 따사롭게 느껴지다니, 자신이 우스웠다.

익천첨은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돌려 말끄러미 우연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나의 전하.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께서는 돌아오실 겁니다! 장애물이 얼마나 되든 익천첨 고막 사달극이 긴 창을 들고 전하께서 돌아오는 길을 수행하지요!”

우연은 익천첨과 눈을 맞추었다. 얼마 후, 우연의 장미색 눈동자에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어렸다.

* * *

1) 중국 고대 관직 중 하나로 시대마다 담당하는 직무가 달랐지만 대체로 막료 성격의 관리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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