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9화 (24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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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18)

8월 열사흘 새벽. 황성, 계궁.

뇌벽성이 빠른 걸음으로 궁에 들었다. 시녀들이 막 향을 입힌 방석을 깔았다. 장공주는 긴 머리카락을 빗지도 않고 얇은 잠옷만 걸친 채 후당에서 분주하게 나왔다. 녕경은 장공주의 뒤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들어주었다. 녕경도 무늬가 수놓아진 비단 겉옷만 걸치고 있었다. 열린 앞섶으로 여인처럼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벽성 선생,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이리 바삐 찾으셨습니까?”

다급히 자리에 앉은 장공주는 손을 휘둘러 시녀의 뺨을 때리며 비키라 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하당의 사절단이 만무원에서 전멸했다 합니다!”

“전멸했다고요?”

장공주는 몹시 놀랐다.

“청양부의 새 주인 여수우는 북도성에 가 국서를 전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자는 측근 호위인 귀궁 무사들까지 명해조 계곡 어귀로 보내 사절단 전원을 죽였습니다. 참장 한 명만 탈출했는데 일부러 소식을 전하라 살려두었을 겁니다. 참장이 우리 쪽 사람이라 비둘기를 두 마리 보냈습니다. 한 마리는 막 황성에 도착했고 다른 한 마리는 남회성으로 가는 길일 겁니다.”

“여수우 그자가 지금 뭘 하자는 겁니까?”

장공주가 의자 손잡이를 내리치며 버럭 화를 냈다.

“감히 우리 대윤 황실의 존엄을 무시하다니요?”

녕경이 살짝 몸을 숙여 장공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여수우가 이리 격한 수단을 쓴 것은 우리와 갈라서겠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수중에 그자의 막내아우, 과거의 청양 세자가 있습니다. 동맹의 규칙에 따라 여수우가 사절단을 죽였으니 우리도 인질을 죽여 복수하면 서로 철천지원수가 될 겁니다.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녕경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여수우는 벌써 모든 만족인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아버지 여숭이 죽기 전 모두의 앞에서 청양부를 그에게 물려주었다고 알렸습니다. 지금 이 막내아우는 그에게 쓸모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 되니 아우의 생사 따위 개의치 않고 우리에게, 그리고 장공주께 창끝을 겨눈 것입니다!”

장공주가 손을 내저었다.

“하당국의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여수우가 압니까?”

“누군가가 말해주었을 겁니다.”

뇌벽성이 나직이 말했다.

“제 생각에 여수우의 뒤를 봐주는 자는 동륙에서 중요한 인물일 겁니다.”

장공주가 선명한 눈동자를 굴리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다.

“순국, 양추송!”

“영명하십니다!”

뇌벽성이 절을 올렸다.

“내 진즉 양추송을 의심했습니다. 양추송은 내내 황실에 충성하는 듯 보였지만, 애당초 자립할 목적으로 그간 순국에서 세력을 키워온 것이에요. 양추송도 어쩌면 영무예만큼 위험하겠군요.”

총총거리며 왔다 갔다 하던 장공주가 또 갑자기 멈춰 섰다.

“아니! 양추송은 영무예보다 더 위험합니다. 영무예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라면 양추송은 우리 품에 숨어 있는 뱀이에요!”

“그럼 장공주께서는 만족의 지지를 얻은 양추송이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뇌벽성이 물었다.

“만족을 교사해 남하하겠지요.”

녕경이 대답했다.

“먼저 순국에서 그 전쟁을 받을 겁니다. 그리고 양추송은 패한척하겠지요. 만족 철기병은 순국이 지키던 당올관 요새를 통과하는 순간 곧장 천계로 향할 겁니다……. 문경년 만족 메뚜기(蛮蝗)가 날뛰었던 것처럼요.”

“그보다 훨씬 심각할 겁니다. 70년 전 동륙에 온 이들은 한주에서 살아남지 못한 유목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자들은 청양 대군 여수우의 호표기입니다!”

뇌벽성의 목소리는 금속이 맞부딪치듯 쩌렁쩌렁 울렸다.

안색이 돌변한 장공주는 묵묵히 선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뇌벽성이 장공주 앞으로 다가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공주, 경하드리고 또 경하드리옵니다.”

장공주는 뇌벽성을 흘끗 쳐다보았다. 얼굴에 경계하는 기색이 어렸다.

“축하할 일이 뭐가 있지요?”

“백씨 황족이 다시 동륙을 통일할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축하할 만하지 않습니까?”

뇌벽성의 눈빛이 번득였다.

“동륙을 다시 통일한다?”

장공주는 의아했다.

뇌벽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추송과 여수우가 함께 쳐들어오는 일은 매우 얻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일단 만족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제후들에게 군대를 모아 만족에 대항하라 명령할 명분이 생깁니다. 제후국 대군에게 상양관 성문을 열어주고 왕역을 통과해 순국 내부로 들어가 여수우의 기병과 전쟁을 하게 할 수 있지요. 그럼 쌍방이 모두 심각한 사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 장공주를 위해 연격노 4만 장을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무기의 위력은 장공주께서도 이미 보셨지만 그날 상양관에서 백의가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노수(弩手)들은 평민 중에서 모집하면 됩니다. 간단한 훈련만으로도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으니까요. 연격노 1만 장으로 화살을 쏘면 활 10만 장으로 쏘는 것과 같습니다. 장공주께서는 이 힘을 이용해 외부로는 만족을 방어하고 안으로는 제후들을 누르십시오. 그때가 되면 장공주는 황족의 영웅이 될 것이며 제후국 토지도 왕역에 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에 왕의 영토가 아닌 곳이 없으니, 동륙 4개 주의 모든 땅이 왕역이어야 마땅합니다!”

녕경은 몸이 흠칫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장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대윤의 군사력으로 정말 만족과 전쟁을 한다면……. 벽성 선생 앞이니 못 할 말도 없지요. 재정적인 부를 논한다면 대윤의 제후국 하나만으로도 만족 7개 부락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을 겁니다. 하지만 군사력 방면에서는 대윤이 세워진 700년 이래 만족에 대적할 수 있었던 이는 풍염 황제뿐이었습니다. 풍염 황제는 하늘이 내린 영웅에 철사거의 보좌를 더불어 지닌 사람이었지요. 완주 상회를 재물 창고 삼아 천하의 제후국 군대를 모으고 두 차례 북벌에서 모두 승리했음에도 결국 백성의 원망이 들끓고 국력이 쇠약해져 본인도 시름시름 앓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뇌벽성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날 황실은 세가 왕성하지 못하고 제후들은 흩어졌습니다. 진심으로 백씨 가문을 위해 힘을 다할 곳은 초위, 하당, 순국뿐이었고요. 양추송이 순국공을 꼭두각시로 삼고 순국의 대권을 탈취한 현재 초위와 하당 양국의 병력만으로 만족 철기병에 대적하는 것은 거의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지요?”

장공주가 탄식했다.

“맞습니다. 오늘날 제후국 중에 병력이 강한 나라는 북쪽의 순국과 진북, 남쪽의 ‘천남3국’인 초위, 하당, 리국입니다. 진북의 국군 뇌천엽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공손해 보이지만 사실 심보가 흉악하지요. 뇌천엽은 두설산의 백호로 잠에서 깨면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다 하더이다. 5개국 중에 이렇게 3개 나라를 제하면 동원 가능한 곳은 초위와 하당뿐입니다.”

“한 사람을 빠뜨리셨습니다.”

뇌벽성이 미소를 머금었다. 녕경이 불쑥 말을 꺼냈다.

“리국공, 뇌벽성.”

“말도 안 되는 소리!”

장공주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영무예는 사자다. 그자에게 굴레라도 씌워 부릴 생각이냐? 아무 짝에 쓸모없는 헛소리다!”

“아닙니다. 녕경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뇌벽성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때가 되면 동륙의 수사자는 반드시 우리 쪽에 설 것입니다. 만족인이 동륙을 누비는 꼴을 누구보다도 원치 않을 사람이니까요. 영무예는 동륙을 자신의 땅으로 보고 있으니 반드시 우리에게 협력할 것입니다. 게다가 청양부에도 후환은 있습니다. 여수우가 동륙 땅을 밟으면 그 후환이 터질 겁니다. 늑대 한 마리가 이미 북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지가 오래 되었지요. 그 늑대는 줄곧 남쪽의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일단 망자의 냄새가 느껴지면 바로 먹이를 빼앗으러 남하할 것입니다.”

“후환?”

장공주가 물었다.

“삭북 늑대왕,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 그자는 지난 100년간 초원에서 흠달한왕에 버금가는 영웅입니다. 흠달한왕이 다시 부활하지 않는 한 그를 막을 자는 없습니다!”

뇌벽성이 말을 이었다.

“제가 보낸 사람이 이미 삭북의 늑대왕과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벗이 될 겁니다. 비록 늑대왕과 벗이 되는 일은 다소 위험하지만 공통의 적이 있으니 다행이지요.”

장공주는 한참을 침묵했다. 묵묵히 몇 걸음 물러난 장공주는 지친 듯 좌상에 앉았다.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나이가 든 탓인지 살짝 두려워졌다.

장공주는 양옥(凉玉) 빗을 더듬더듬 찾아 말없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빗었다. 한참 뒤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벽성 선생을 믿어왔습니다. 한데 벽성 선생의 전략은 천하를 바둑판으로 삼고 있군요. 이번 판의 승패에는 구주 전체가 걸려 있으니 보통 큰 판이 아니군요!”

뇌벽성이 공손히 예를 올리고 말을 꺼냈다.

“장공주께서는 일전에 황실이 쇠락했을 때, 일개 아녀자의 몸이지만 용감히 나서서 사내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싶다 하셨지요. 이는 당대 최고의 패기입니다. 제가 공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세상 절대다수의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 판이 얼마나 큰지, 승부가 얼마나 험난할지는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신의 뜻을 받들어 장공주의 포부를 실현시키기 위해 왔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고 왕역 하나만 고수한다면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과 같으니 영웅답다 할 수 없지요!”

“살면서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고 왕역 하나만 고수한다면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과 같으니 영웅의 행동이라 할 수 없다…….”

장공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장공주의 눈이 반짝이더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좋습니다! 벽성 선생이 꿈을 꾸는 저를 깨워주셨군요. 이 백릉파, 평생 왕역을 호령하는 데 만족한다면 비웃음을 사겠지요! 후손들은 나를 식견이 얕은 여인, 예쁘장한 얼굴에 원대한 포부는 없는 선조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벽성 선생, 내 어찌해야 할지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뇌벽성이 미소를 지었다.

“장공주께서는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조용히 구경하면 됩니다. 곧 북도성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녕경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하지만 저 소식이 남회성에 전해지면 백리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습니다. 장공주께서 빠른 말로 친필 서신을 한 통 보내시어 안심시키는 게 어떨는지요? 백리 공작은 이번 청양과의 회담에 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또한 청양 세자도 있고요…….”

“맹약을 배신한 규칙에 따라 참수되겠지요.”

뇌벽성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참수요?”

녕경은 살짝 머뭇거렸다.

“지금 인질을 참수한다면 충분히 위협은 되겠으나 실질적인 쓸모는 없습니다. 그 세자는 무예에 조예가 있으나 성격이 나약하다 하니 목숨을 살려두어도 별다른…….”

“아니.”

뇌벽성이 녕경의 말을 끊었다.

“죽여야 하오. 내 그 아이를 본 적 있소. 그 아이는 우리에게 매우 큰 위험이오. 여숭은 죽었고 세자는 쓸모가 없어졌으니 절대 살려둘 수 없소!”

장공주가 녕경을 제지했다.

“한낱 소년이 무슨 대수겠느냐. 벽성 선생이 죽이라면 죽이면 그만이지. 녕경, 내 대신 백리경홍에게 서신을 써라.”

뇌벽성이 말을 보탰다.

“그리고 백리경홍에게 바로 식연을 감금하라 하십시오. 그를 죽일 수는 없더라도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와도 연락을 못하게 막으십시오.”

흠칫 놀란 장공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난색을 표했다.

“백리경홍은 식연을 매우 의지합니다. 식연이 몹시 위험한 자이긴 하나 그간 백리경홍에게는 무척 복종해왔지요. 백리경홍에게 식연을 감금하라는 것은 그의 팔다리를 자르는 셈이니 불만을 가질 텐데요. 게다가 식연이 난을 일으켰다는 증거도 완전히 수집되지 않았잖습니까. 이자는 동륙 군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지극히 높습니다. 또한 황실에 충성하는 신하이고요. 지금 그자에게 손을 쓰면 소동이 일어날 수 있어요. 벽성 선생은 정말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뇌벽성이 재차 허리 숙여 큰절을 올렸다.

“장공주, 저를 믿으십시오. 청양 세자를 죽이려 하면 식연은 반드시 위험을 무릅쓰고 그자의 난당 무리를 전부 소집할 것입니다. 그 난을 진압하는 일은 수백 배 더 어렵습니다.”

장공주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녕경에게로 몸을 돌렸다.

“녕경, 백리경홍이 완주의 부를 차지한 것은 황제의 중신(重臣)이기 때문이지. 현재 그의 지위로 우리의 결정에 반대할 수 있겠느냐?”

“장공주께 아룁니다. 백리 가문은 수백 년간 황실에 불충한 방계들에게 일말의 정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녕경은 옷소매를 정리하고 좌석 아래에 엎드려 절하며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을 걸고 보장합니다. 백리경홍이 장공주께 불충한다면 제가 칼을 들고 천리를 달려가 백리경홍의 머리를 베어 장공주 앞에 바치겠습니다.”

“훌륭하구나.”

장공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녕경, 네 말에서 살기가 느껴지는구나……. 너도 이제 다 컸구나. 더는 얌전한 아이가 아니야. 네 몸에 백리장청의 피가 흐르니 언젠가 너도 네 아비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겠지?”

“그렇다 해도 저는 장공주의 매입니다.”

장공주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휙 손을 내둘렀다.

“녕경, 백리경홍에게 명을 전해라!”

뇌벽성이 소매를 휘두르자, 뒤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제자가 한 걸음 다가와 이미 써둔 서신을 녕경 앞에 놓았다.

녕경은 시녀의 손에서 칼날이 2촌을 넘지 않는 얇은 칼을 건네받아 자기 손가락을 베었다. 그리고 소매에서 검은 옥 재질의 작은 도장을 꺼내 새빨간 피를 도장에 발랐다. 갑자기 새카맣던 도장이 투명하게 변하더니 더는 검은색이 아닌 짙은 홍갈색을 띠었다. 어떤 액체가 도장 속을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녕경은 도장을 서신 말미에 꾹 찍었다. 홍갈색 액체가 흘러나와 서서히 종이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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