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8화 (24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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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17)

우연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둠 속에서 당황하며 눈을 부릅떴다. 내의도 흠뻑 젖고 호흡도 어지러웠다.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던 우연은 어둠 속을 더듬어 두루마기를 찾아 걸치고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왔다. 하늘색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우연의 눈앞에 피어올랐다. 우연은 깜짝 놀랐다. 익천첨이 우연을 등진 채 입에 흑단나무 담뱃대를 물고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우연은 입구의 돌계단에 익천첨과 나란히 앉았다.

“또 꿈을 꾸었느냐?”

익천첨이 푸른 담배 연기를 뱉으며 우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어지러운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또 언니를 봤어요. 곳곳이 불바다였죠……. 언니는 가장 높은 그 나무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세월이 이리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꿈을 꾸는구나. 내 너를 말에 태워 구과산을 넘는 내내 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한데 첫 번째 만족 유목민의 영채를 만났을 때, 너는 어느새 그 아이들과 말을 타기 시작했지. 그래서 나는 네가 사실 유쾌한 아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구나. 너는 그 광경을 잊지 못했어. 우연, 가끔 나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네 마음은 정말 너무나도 헤아리기 어렵구나.”

익천첨이 담뱃재를 툭툭 쳐냈다.

“사실 별 생각 안해요.”

우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그냥 모두가 즐겁기를 바랄 뿐이에요. 하지만 내게 잘해주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죠.”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익천첨이 고개를 돌려 우연을 보며 말했다.

“과거는, 언제나 다 지나간다. 이리 슬퍼하며 살라고 그들이 모든 노력을 다해 널 살린 것이 아니야.”

“하지만…… 왜 내가 살아야 하는데요? 태격리사 춤을 배운 건 나잖아요! 근데 그들은 언니가 희무신인 줄 알았죠. 언니는 나 대신 죽은 거예요, 맞죠?”

우연은 막막한 아이처럼 제 얼굴을 가렸다.

“왜 언니는 자기보다 내가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언니가 죽으면 공다새도 혼자 살 리 없잖아요.”

“아가, 내가 네 언니를 구하지 않아 미우냐? 미안하지만 천무자라도 두 명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단다.”

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익천첨이 말을 이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단다.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 네 언니에게는 네가 자기보다 더 중요했듯이 말이다.”

우연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소륵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나 아소륵이 좀 걱정돼요.”

“왜?”

“모르겠어요. 며칠 동안이나 보지도 못했어요. 저번에 탕고정에서 만났을 때 뭔가 나한테 할 말이 아주 많았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말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결국 안 하더라고요.”

우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소륵은 항상 그래요. 답답해 죽겠어. 찍 소리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걸 보자니 내가 다 애가 타더라니까요. 어쩌면 북륙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데 아소륵이 대군에 오르면 어떤 모습일지 정말 상상이 안 가요.”

“인자한 군왕이 되겠지? 걱정하지 마라. 녀석은 다른 사람과 다툴 성격이 되지 않으니 오히려 무사할 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왠지 불안해요.”

우연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아래턱을 무릎에 괴었다.

“아까 아소륵이 피리를 불었어요……. 꿈에서요.”

“아소륵이 북륙에 돌아갈 수 있음은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 아니냐.”

“하지만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럼 너는 청주로 돌아가면 기쁘겠느냐?”

“나는 아소륵이 아니잖아요. 아소륵은 형도 있고 대합살도 있죠. 소마인가 하는 애도 고향에 있다고요. 하지만 난 아무도 없죠. 청주에는 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가능하다면 평생 안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네 생에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다.”

“알아요.”

“훗날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익천첨이 손을 뻗어 살며시 우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우연은 익천첨의 바다색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폭풍우가 오기 전 바다 위에 자욱한 짙은 잿빛 안개 같았다. 아주 이따금씩 우연은 익천첨의 이런 눈빛을 느꼈다. 그때면 익천첨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우연이 다가가 익천첨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연의 몸이 살며시 떨렸다.

“할아버지, 나 무서워요.”

“무서워 마라. 내가 널 지켜줄 테니. 그리고…….”

익천첨이 살며시 우연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한다……. 너는 신의 아이잖으냐.”

8월 열이틀. 동이 트기 전, 유풍당.

익천첨은 식원의 안내를 받아 식연의 서재로 들어갔다. 바닥에 커다란 자리가 하나 깔려 있고 곳곳에 두루마리가 사람 키 반만 한 높이로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식연은 초를 들고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분류하고 있었다.

“자네는 무사라서 문서 작업은 서툴 줄 알았네.”

“저도 우인은 잠을 자야 해서 새벽에는 남의 집에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식연은 여전히 두루마리에 집중한 채 그것들을 옆으로 옮기고 공간을 만들었다.

“탁자와 의자를 전부 밖으로 옮겨둔 터라 그냥 예 앉으십시오.”

익천첨은 식연의 옆에 앉았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가 입을 뗐다.

“이 시간에 방문하는 것이 실례인 줄 알지만 내일 밤 남회성을 떠나게 되었네.”

흠칫 놀란 식연이 천천히 손에 든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요? 여귀진 세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외에 청주의 정세가 혼란에 빠졌다는 정보 또한 입수했습니다. 청양부의 숙적인 삭북부도 최근 상인에게서 칼과 말등자를 구매하고 전부 황금으로 값을 지불했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징후이지요. 이 문서들을 정리하고 나서 전하를 찾아뵙고 제가 판단한 바를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진월이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그들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시기에 종주 중 한 분인 전하가 갑자기 떠나시면 손이 부족해집니다.”

“이 문서들은 뭔가?”

익천첨이 물었다.

“지난 20년간 동륙에서 찾아낸 천구들입니다. 총 1,164명이지요. 동륙 전체에 걸쳐 큰 연락망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매 휘장이 찍힌 서신을 보내기만 하면 그들은 우리의 부름에 응해 다시 매의 깃발을 들 겁니다.”

식연이 두루마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소집령을 내리면 우리의 모든 힘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어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집니다. 그러니 진월과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전하를 찾아뵙고 상의 드리려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겠지? 그건 자네도 나도 원치 않는 바야.”

익천첨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연락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동륙에 최근 몇 년간 새로 생겨난 ‘죽염업’을 아십니까? 이 소금업자들이 황실의 특별 허가를 얻어 동륙 곳곳에서 소금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염상들과 다른 점은 점원이 문 앞까지 배달해 준다는 겁니다. 이 소금은 대나무 통에 밀봉되어 죽염이라 하며 전부 청석에서 나는 최상급 바다 소금인데 값도 심지어 다른 집보다 조금 싸지요. 그래서 죽염 사업이 각 제후국에 두루 퍼졌습니다. 다만 이문을 남기지 않아 동종업자들에게 미움을 받지요. 황제가 허가한 그 소금은 원래 값어치가 매우 높습니다. 한데 이 죽염 업자들은 영리를 추구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받은 대나무 통에는 소금뿐만 아니라 서신도 들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총 1,164명입니다.”

익천첨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네가 이 죽염 상단 행수인가?”

식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큰 장사를 할 돈이 제게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마침 이 장사를 하는 강가 성을 쓰는 벗이 있지요. 그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수십만 금수에 달하는 장사를 이용해 자네를 도와주다니 완주 강씨 가주들은 정말 대대로 정치에 열심이구먼.”

식연이 갑자기 익천첨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전쟁이 일촉즉발입니다. 남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익천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침묵했다.

“지난해 상양관에서 그들을 한 번 막았는데 이렇게 빨리 세력을 회복했다니 그동안 막강한 힘을 쌓아온 모양이군. 10만 명의 죽음이 진월의 눈에는 그저 작은 실패일 뿐인가 봄세.”

“그렇겠지요.”

식연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세상을 뒤집으려는 자에게 10만 명의 목숨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익천첨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 10만 명의 우인이 죽어나갈지도 모르네……. 내 종손 익림이 우족 각계에서 최강의 힘을 가진 자가 되었네. 우황을 죽이고 제격림으로 쳐들어가고 있어. 우황으로의 즉위를 고대하고 있지. 녀석은 이미 살인과 우족 황제에 오를 꿈에 길을 잃었네. 진월의 사자가 녀석에게 뭔가를 가르친 게 틀림없어. 사방팔방에서 동시에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네. 전면전이 벌어질 징조이니 내 마땅히 남아 자네에게 협조해야 하지만…… 나는 우인이 아닌가? 내 민족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응당 청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야 하네.”

식연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고개를 저으며 속절없는 미소를 지었다.

“반박할 수 없는 이유군요. 천구이기 이전에 우인이니, 민족을 도우러 간다는데 말려서는 안 되겠지요……. 한데 정말 소용이 있을까요? 전하는 우황에게 추방당했잖습니까. 어쩌면 우황이 전하를 몹시 죽이고 싶어 했다는 걸 우족 모두가 알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유장길에게 추살령을 내렸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천구라고 생각했네. 유장길은 천구 대종주의 신분으로 죽어갔어. 그리 생각하니 나나 유장길이나 고집스럽긴 매한가지군.”

“익림을 아는 전하께서 보시기에 진월이 그를 부추긴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익천첨은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익림은 이미 학설단의 지지를 얻었네. 일단 익림이 제격림을 손에 넣으면 진월은 그의 야심을 동륙으로 돌릴 걸세. 우황이 되는 것보다 구주의 황제가 되는 것이 더 영광스러울 테니까. 그럼 학설단 정예병이 천계성 하늘에 나타나 뼈를 관통할 수 있는 화살을 대윤 황제에게 쏘겠지? 그리고 양국은 전쟁을 선포하고 목란장선이 바다를 건널 걸세……. 동시에 만족 기병도 바다를 건너 남하하여 풍염 황제 때 죽은 선조들을 위해 동륙인에게 복수를 할 거야. 그때는 진북의 백호와 리국의 사자가 우리와 손을 잡는다고 해도 대윤 제국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은 막을 수 없네. 동륙은 혼란스러운 전쟁터로 변할 것이야.”

“그것이 바로 진월이 고대하던 붕괴된 세상이지요.”

식연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요. 이런 계획에 비하면 상양관은 그저 작디작은 실패에 불과했어요.”

익천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주 전체를 바둑판으로 삼아 혼전을 일으키다니, 이 얼마나 기세충천한 상상이며, 또 얼마나 강대한 힘인가……. 뇌벽성이 최고 우두머리일 리 없네. 느낌이 와. 뇌벽성 뒤에 서 있는 자는 뇌벽성보다 훨씬 거대하네……. 수십, 수백 배는 더!”

“그럼 배후의 그자를 죽여 버리지요!”

식연이 익천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익천첨은 식연의 손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작별 인사 하는 셈 치고 악수합시다. 전하는 청주로 가시고 동륙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수천 리 떨어져서도 서로 연락하고 협력합시다.”

식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청주에서 늙어죽지는 마십시오. 저도 이제 벗이 얼마 없습니다. 어느 날 이곳에 돌아오면 십리상홍과 금을 연주하는 오랜 벗이 있을 겁니다.”

익천첨이 손을 내밀어 식연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손의 힘이 매우 강했다. 쇠붙이도 쪼갤 듯한 힘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시선을 맞추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놓았다. 익천첨은 일어나 몇 걸음 물러나더니 뒤돌아 문을 나섰다.

입구에서 그가 오른손의 엄지를 들어 올렸다. 검푸른 반지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철갑은 영원하리!”

“영원하리!”

식연이 껄껄 웃었다.

“전하와 저는 오랜 벗이 아닙니까. 그런 예의는 필요 없지요. 배웅은 않겠습니다. 나가시면서 도둑놈이 제 꽃 훔쳐가지 않게 문단속이나 잘해주십시오.”

익천첨은 동이 트기 전 달빛을 밟으며 문을 나섰다. 화원을 지나 대문가에 이르자 뒤에서 현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호방한 기개를 지닌 여인이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하며 높은 누대에서 벗을 배웅하는 듯한 곡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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