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3장. 비취 팔찌 (16)
8월 열하루, 깊은 밤 남회성.
백리욱이 가위를 들고 불똥을 잘라냈다. 그러자 방이 조금 밝아졌다.
귀홍관은 조용했다. 나무 병풍으로 겹겹이 나뉘어져 있어도 휑해 보이는 감이 있었다. 여귀진과 백리욱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밖에서 개구리와 귀뚜라미만 울어댔다.
“참 적막하네.”
백리욱이 아무 말이나 꺼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전에는 이쪽으로 잘 걸음하지 않아 이리 조용한 줄은 몰랐어. 내가 머무는 량풍원에 비하면 여긴 겉만 화려하고 실제론 휑하구나.”
“소소와 유유아가 있으면 조금 나아. 근데 오늘 저녁에는 둘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내가 환이한테 가보라 했어. 여자들은 시집가기 전엔 아무래도 두렵기 마련이니 몸종 몇이 함께 있어주는 게 좋잖아. 성격이 여린 아이라 오늘밤 환이 처소에는 여남은 명이 함께 있을 거야. 소소와 유유아가 여귀진 세자의 인품을 누구보다 잘 아니 환이를 안심시킬 수 있을 듯해 두 아이를 보냈어.”
“정말 세심하네. 밤이 깊었는데, 피곤하진 않아?”
여귀진이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말했다. 실은 손님을 보내려는 의도로 꺼낸 말이었다.
“괜찮아. 여귀진 세자와 이야기나 나누지 뭐.”
두 사람은 또 잠시간 말이 없었다. 백리욱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여귀진은 의아해 고개를 들었다.
백리욱이 빙그레 웃었다.
“여귀진 세자가 처음 왔을 때, 내가 말끝 마다 세자를 야만족이라고 불렀잖아. 로 선생 앞에서는 세자에 대해 험담도 많이 했고. 아버지께서 소소와 유유아에게 귀홍관에 가 세자의 시중을 들라고 했을 때도 생떼를 부리며 못 가게 했지. 나중에는 매일 밤 그 둘을 불러 량풍원에서 놀았고 말이야. 세자를 냉대할 의도는 없었어. 지금 귀홍관에 앉아서 그 세월들을 생각하니 여귀진 세자가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이곳에 외롭게 앉아 있었을지 감도 안 와. 나였다면 미쳐 버렸을 거야. 정말 너무 미안해.”
여귀진이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마. 별일 아닌걸. 이곳에서는 다들 내게 아주 잘해주었어. 북도로 돌아간다면 분명 남회가 그리울 거야.”
“남회는 몰라도 우리는 그리워하지 않겠지.”
백리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귀진의 안색이 살짝 변한 것을 알아챘다. 어째서인지, 그 변화와 함께 창밖에서 스며든 가을 추위가 순식간에 강해진 느낌이었다. 백리욱은 웃음을 거두고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또 다시 침묵했다.
“지금 기분이 어때?”
백리욱이 나직하게 물었다.
“사실…….”
여귀진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솔직히 말해 낮에는 심란했어. 그냥 그녀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더라고. 바깥의 인기척을 듣고 있자니 수많은 사람이 내 혼례를 준비하는데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그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더라고.”
백리욱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
“응. 마음 아프다는 말을 책에서만 보았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몰랐거든? 한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누군가가 내 가슴을 꽉 쥐고 있는데 어떻게 해도 뿌리칠 수 없는 느낌이야. 소리도 지르고 싶고 무언가를 깨물고도 싶었어.”
여귀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래서 소병을 아주 많이 먹었어. 배가 부른데도 냅다 욱여넣는 느낌이었달까. 뭔가를 하고 있으면 조금 나았으니까. 소소와 유유아가 이상하게 보더라. 내가 전에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여귀진은 미소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마음은 괴롭더라고. 무척…… 괴로웠어.”
백리욱은 아연해져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귀진이 또 씩 웃더니 말을 꺼냈다.
“근데 여기 앉아서 욱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많은 일들이 떠오르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는 금장궁에 알현 온 소녀들을 가리키며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어. 누가 좋다고 말하면 미리 그 집에 사람을 보내 정혼을 맺어두었지. 남의 집 아들이 채가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때 나는 겨우 네다섯 살이었어. 멋모르고 이 사람도 좋다 저 사람도 좋다 하다가 결국 내가 다 갖겠다면서 모두 나랑 놀자 했지. 아버지와 대합살은 그런 날 보고 웃었어. 이제 드디어 혼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보실 수가 없네. 앞으로 매일 아침 일어나면 내 아내를 보고 함께 아침을 먹겠지. 오후에는 책을 보다가 아내가 밖에서 새나 고양이와 노는 모습을 볼 테고. 저녁이면 나와 대화를 나누어줄 사람도 생겼어. 내가 아프면 아내가 돌봐줄 테고 아내가 아프면 나 역시도 간호해 줄 거야. 전에는 여자들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아내가 말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기쁜 것도 같아.”
여귀진이 중얼중얼 말했다.
백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이는 세자를 보고서 무척 마음에 들어 했어. 처음에야 일부러 수선을 좀 피웠지만 저녁이 되어서는 괜찮아졌지. 낮에 가봤더니 하녀들이 환이를 둘러싸고서 머리를 빗겨주고 혼례복을 입혀주고 했어. 본인도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것저것 장신구를 고르더라. 내가 가만 못 있고 한두 마디 놀렸더니 귀까지 빨개졌어. 오누이로 하루 이틀 지낸 것도 아닌데 내 누이에게 그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그날 남궁에서 욱 세자에게 한 말, 기억하고 있어. 환 공주와 혼인하기로 한 이상 절대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다 너무 철이 없는 것 같아. 사실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몇 번 만나보고 날을 잡고 혼례를 올리잖아. 연애랄 것도 없이 그렇게 평생을 보내지.”
잠시 정적이 흐르고, 여귀진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소주 공주 얘기야?”
백리욱은 흠칫 놀라며 여귀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귀진도 백리욱을 쳐다보았다. 여귀진의 눈빛은 조롱하는 기색 없이 평온했다. 백리욱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
“문득 생각이 났어. 작년 새해에 나와 소주 공주가 떡을 하사받으러 자환궁에 불려갔을 때 소주 공주가 자환궁 앞에서 국주를 위해 생황을 연주했었지. 그때 욱 세자는 한쪽에 서서 연주를 들으면서 손으로 허리춤의 백옥 장신구를 만지작거렸어.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까지 손에서 장신구를 놓지 못했지. 푹 빠진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잖아.”
백리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 세심한 줄 몰랐네……. 그런 걸 다 알아볼 줄이야.”
“소주 공주도 곧 열다섯이 되지? 혼인할 나이가 되었네.”
백리욱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한숨만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 소주 공주는 초위국 국주가 가장 아끼는 딸이야. 동륙 제후국에서 초위국 국주 가문에 어울릴 만한 가문은 몇 없어. 소주 공주에게 어울릴 사람을 꼽으라면 더욱 적지. 소주 공주가 욱 세자에게 시집가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
백리욱이 고개를 저었다.
“다 나 혼자만의 망상이야. 소주 공주는 잘 만나주지도 않아. 선물을 보내도 시문집과 악보만 받고 답례로 자기(瓷器) 같은 걸 보내는데 격식도 흠 잡을 데 없이 갖춰서 보내. 초위와 하당의 교분이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 정말 견고했다면 소주 공주를 하당에 인질로 보냈겠어? 내 고민을 아버지께도 여러 번 말씀드렸어. 한데 아버지께서는 사내란 원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면서 여인 하나를 얻기 위해 장가를 드는 건 저잣거리의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래.”
“국주가 세자에게 기대를 많이 하지?”
“내가 가당키나 하겠어? 나는 나약한 사람이야. 이런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서는 안 되었지. 여귀진 세자는 달라. 세자는 영웅이야.”
“영웅?”
순간 놀라 멍해졌던 여귀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욱 세자,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까? 이 방법이면 소주 공주가 세자를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오?”
백리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가르쳐 준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내가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서? 그냥 내 생각엔…… 소주 공주가 욱 세자를 신경 쓴다면 분명히 욱 세자 주변의 사소한 일들도 신경 쓸 거야. 누굴 좋아하면 처음 만났을 때 그 여인이 입은 옷과 했던 사소한 말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야. 욱 세자는 금과 시로 유명하니까 다음에 시문집을 보낼 때는 직접 쓴 시문 한 권을 옮겨 쓰되 일부러 글자 몇 개를 틀리게 써서 보내봐. 소주 공주가 시문집을 읽는다면 오자를 발견할 테고 답례를 보낼 때 서신에 언급하겠지. 그럼 욱 세자를 신경 쓴다는 걸 알 수 있어.”
백리욱은 잠시 멍했다가 힘껏 박수를 쳤다.
“좋아! 정말 좋은 방법이야! 왜 난 그 생각을 못 했지?”
자리에서 일어난 백리욱은 손바닥을 맞비비며 서성댔다. 당장이라도 가서 시집을 옮겨 쓸 듯한 모습에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났다.
“내일 혼례는 언제지?”
여귀진의 물음에 백리욱이 걸음을 멈추었다.
“내일 황혼. 동륙 문자에서 혼례의 ‘혼’은 황혼의 ‘혼’이거든. 황혼에 혼례를 올리고 밤에 부부의 예식을 치러.”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난 밖에 나가서 피리를 불까 해.”
“여귀진 세자가 피리를 즐겨 분다고는 들었지만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오늘 운 좋게 따라가서 들을 수 있겠네.”
백리욱은 묵묵히 탁자에 놓인 자색 대나무 피리를 어루만지는 여귀진을 보고 자신의 행동이 약간 선을 넘었나 하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두 사람은 노대(露臺)로 나가 달 아래의 동궁 가옥들을 보았다. 서로 잇닿은 처마가 쭉 이어지고 유리기와 위로 겹겹의 푸른빛이 파도처럼 반사되었다. 궁인들이 홍사등롱을 들고 먼 골목을 지나가자 빛이 반짝하더니 사라졌다. 적막 속에서 여귀진은 소매로 피리 관을 슥슥 닦더니 몇 번 소리를 내보았다.
여귀진이 피리를 불자 피리 구멍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백리욱은 깜짝 놀랐다. 이 피리가 만족의 악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륙 악사가 부는 것보다 훨씬 듣기 좋았다. 게다가 지금 여귀진의 피리소리는 낮은 음에서 조용히 맴돌면서도 변화무쌍한 가락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한참 뒤 피리 소리가 높아졌지만 악사의 연주처럼 기교가 다채롭지는 않았고 그저 환희가 잠시 스쳤다가 다시 낮은 가락으로 바뀌었다. 악곡에 정통한 백리욱은 기를 쓰고 음률의 변화와 의미를 음미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만 연주에 푹 빠져버렸다. 여귀진이 연주를 마치자 백리욱은 몸을 흠칫 떨었다.
“한동안 안 불었더니 어설프네.”
여귀진이 고개를 저었다.
백리욱이 박수를 쳤다.
“알겠다! 그리움이야. 정확하게는 가족의 정이겠지.”
“가족의 정?”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나중에 아득한 초원을 떠올리니 이해가 됐어. 세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연주한 거지? 이를 테면 아득히 넓은 초원에서 가족이 멀리 떠난 거야. 피리를 부는 사람은 장막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며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래서 곡조가 내내 낮게 맴돌았던 거야. 이따금 바람만 불어오고, 멀리 목민과 말 떼가 보여 맞으러 가보지만 가족이 아니야. 그래서 또 바람소리만 들리는 초원을 여전히 애틋하게 바라보는 거지. 다만 약간의 실망이 더해진 채로 말이야.”
백리욱은 여귀진의 연주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말하자면 세자의 피리 연주는 이미 최고야.”
여귀진은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소마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가끔 소마를 떠올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곡도 소마가 가르쳐 준 곡이었다. 떠나기 전 소마는 여귀진의 행장을 꾸려주었고 잠을 재워주면서 살며시 여귀진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마의 손길은 무척 따스하고 부드러워 모든 근심이 사라졌고 여귀진은 깊이 잠들었더랬다.
깊은 밤, 잠에서 깬 여귀진은 장막 밖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이 피리 연주를 들었다. 긴긴 밤, 피리 소리가 내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