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5화 (24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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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14)

8월 초엿새, 만무원.

기병 부대 하나가 금국화 깃발을 높이 들고 질퍽거리는 초원을 터벅터벅 고생스럽게 걸었다. 말 등에는 소가죽으로 싼 상자들이 지워져 있었다. 상자들은 매우 무거워 보였다. 마부가 휙휙 소리가 나게 허공에 채찍을 거듭 휘둘렀지만 지친 마바리는 여전히 걸음이 몹시 느렸다. 막 비가 내린 탓에 주위에는 온통 희뿌연 안개가 껴 있었다. 초원은 원래 길이 따로 없어서 멀리 구름 사이에 낀 동운산을 목표로 삼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기도위 대인, 이렇게 가면 북도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참장이 말을 몰아 최전방의 인솔자를 쫓아왔다.

“설숭강을 벗어났으니 한나절이면 만무원을 지날 수 있다. 동운산 올사독한합아곡 어귀를 지나 대략 이틀 정도 더 가면 북도성이 보일 것이다.”

뇌운맹호가 부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인내심을 가져라. 저번에 내가 탁발 대인과 왔을 때보다 여정이 훨씬 순조로우니.”

뇌운맹호는 뇌운 가의 차남으로 식원과 함께 남회성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청년 장군으로 불렸다. 그는 상양관에서 전공을 세운 식원보다도 한 수 위에 있었다. 고작 열여덟에 탁발산월을 따라 북륙에 오면서 사절단의 부관을 맡았다. 북도에서 돌아왔을 때는 남회성 전체가 떠들썩했다. 탁발산월이 성대한 입성식을 받지 않아서 황금 국화 휘장을 단 뇌운맹호가 200필의 흰색 준마를 이끌고 맨 앞에 섰다. 젊고 용감한 소년의 모습에 수많은 고관댁 여식들이 쓰러졌었다. 그해 뇌운맹호는 이미 부장(副將) 자리에 올랐다.

“도위께선 이번에 돌아가시면 후장군에 오르시겠지요?”

참장이 알랑거리며 다가가 기름종이로 싼 작은 꾸러미를 올렸다.

“이게 뭐지?”

“연초입니다. 오는 내내 몸에 지니고 있어 비에 젖지 않았지요. 무료함을 달래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뇌운맹호가 손을 내저었다.

“아직 긴장을 풀 때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번 출사(出使)의 위험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도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희들도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 만족 놈들이 정말 저희에게 무례하게 굴까요? 우리를 건드리면 그쪽도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과거 풍염 황제께서 일거에 북도성을 함락하고…….”

“풍염 황제는 북도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뇌운맹호가 참장의 말을 끊고 말채찍으로 자기 발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풍염 철려는 설숭강 상류의 서쪽 기슭에 있었고 대충 이 만목원 즈음에서 청양의 중기병 군단인 철부도를 맞닥뜨렸다. 사실 그 전투에서는 승자가 없었다. 안 그랬다면 풍염 황제의 성격상 절대 쉽게 철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대윤에서는 경 황제와 안 황제 때 만족을 상국(上國)으로 받들었지. 만족 기병의 위력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암요, 도위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 이번 출사에서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요?”

“모든 일은 전에 일러준 대로 하면 된다. 사실 별것 없다. 현재 북도성의 상황을 잘 모르니 그때그때 기회를 봐 움직여야지. 동운산을 넘으면 200명의 인원은 각각 100인 부대로 나눈다. 100명은 나와 함께 북도로 가고 나머지 100명은 올사독한합아곡 어귀에서 대기하다가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즉시 남하한다. 절대 멈추어서는 안 된다!”

“네!”

참장은 대답하고는 눈을 깜빡거리면 물었다.

“그 골짜기 이름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올사 어쩌고 하는 골짜기요.”

“올사독한합아곡.”

“만족인이 지은 이 이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발음이 무척 어렵네요.”

“올사독한합아곡은 만족어로 명해조(鳴骸鳥)를 가리킨다.”

뇌운맹호가 군마를 몰고 지나갔다. 참장은 흠칫 놀라며 멀리 안개 속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산골짜기 어귀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불현듯 마음속 깊숙이에서 오한이 사납게 솟구쳤다. 그는 갑옷의 옷깃 안으로 호신용 옥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욕설을 퍼붓고는 뇌운맹호의 말 뒤를 쫓아갔다.

“멈춰라!”

뇌운맹호가 갑자기 손을 들더니 제 군마를 멈춰 세웠다.

골짜기 어귀까지는 1천 보 남짓한 거리였다. 강궁으로 화살을 쏜다 치면 세 발 정도의 거리에 불과했다. 참장은 뇌운맹호의 시야를 쫓아 기를 쓰고 안개 속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는데 주위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외로이 꽂혀 있는 깃발과 이상한 정적에 불안해진 참장은 뒤편의 군사들에게 말안장에서 십자노를 떼어내라고 눈짓으로 넌지시 알렸다. 마부들도 서둘러 마바리를 한데 모았다. 200명의 군사들이 말 떼를 에워쌌다.

“저게 뭘까요?”

참장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대독(大纛)1)이다. 부락의 깃발이지. 청양부의 깃발은 흰색이고 삭북부는 검은색, 란마부는 청색이다. 다른 것은 나도 보지 못했다.”

뇌운맹호가 제 군도를 꽉 잡았다. 앳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대독이 한 차례 휙 흔들리더니 가볍게 펄럭였다. 바람이 분 것이었다. 가로로 큰 장막이 걷히듯 안개가 바람에 빠르게 누그러지고 그 너머의 기병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 검은색 갑옷을 입고 동륙의 군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검은색 준마를 타고 있었다. 가슴을 보호하는 호심경 가장자리는 표범 모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이미 양탄자를 펼치고 그 위에 음식과 술잔을 차렸다. 앞장선 무사가 말을 몰아 대독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하당의 기병 부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리둥절해 서로를 쳐다보던 하당 무사들은 모두 뇌운맹호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청양의 호표기가 우리를 맞이하러 왔구나.”

뇌운맹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난번 탁발 장군과 왔을 때도 이 부근에서 대군의 기병 부대를 보았었지.”

모두가 홀가분해진 듯 미소를 지었다. 인적 하나 없는 황량한 초원을 걸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이따금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마르고 딱딱한, 심지어 곰팡이가 낀 전병밖에 먹지 못했고 물도 설숭강의 여과되지 않은 물을 마셨다. 다들 깨끗하게 씻고 만족의 양갈비 구이를 맛보고 싶었다. 무사들은 갑주를 정돈한 뒤 하당의 금국화 깃발을 높이 들고 가지런하게 일자로 대열을 맞춰 천천히 호표기를 향해 다가갔다.

참장은 국서(國書)가 담긴 금색 함을 들고 뇌운맹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다른 무사들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출사를 나간 적 있는 다른 금군에게 국서를 건네는 것이 극도로 위험한 일이라고 들은 까닭이었다. 국서에 좋은 말이 쓰여 있으면 상대측은 웃으며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나쁜 말이 쓰여 있으면 안색이 돌변하며 칼을 뽑을 수도 있다는 것. 참장은 속으로 벌벌 떨었다. 그는 고생스러웠던 여정을 떠올리며 다시는 승진을 위해 이런 머나먼 곳에 오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보이느냐? 말 다리에 가죽을 감싼 게 맞지?”

뇌운맹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참장은 열심히 살펴보았다. 안개에 가려졌지만 만족 흑마의 말발굽부터 무릎 위까지 감싸져 있는 무언가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발굽 싸개가 아닐까요? 진창길을 걸을 때 말발굽이 진흙에 빠져 접질리거나 찔리지 않게 하려고 가죽으로 감쌌겠지요.”

“이 비가 언제 내리기 시작했지?”

참장은 생각해보았다.

“이틀 전, 대략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뇌운맹호가 갑자기 군마를 멈춰 세우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는 조용히 뒤로 가서 후방 부대에 멈추고 활을 준비하라 전해라! 전방의 100명은 나를 따라 간다.”

“왜 그러십니까?”

참장은 아연실색했다.

“북도성에서 올사독한합아곡 어귀까지 최소 이틀이 걸린다. 저 군마들은 전부 발굽 싸개를 감고 있으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에 나왔다는 얘기다. 겨우 이틀 만에 저들은 급행군으로 이곳에 도착한 것이지!”

뇌운맹호가 무척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멈춰라! 후방 부대는 멈춰!”

“급행군…….”

참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음속에서 오한이 치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전방의 만족 무사가 갑자기 대독을 휙 추켜올리며 포효하자 모든 호표기가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무사들은 톱날 군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환영 대열은 순식간에 흉악한 야수로 변했다.

하당 사절단은 상대측 공격 기세에 넋이 나갔다. 아무도 이런 변고를 예측하지 못했다. 호표기가 위치한 지세가 더 높았다. 전력을 다해 돌진하는 북륙의 준마는 밟는 것만으로도 이 작은 사절단을 완전히 평정할 수 있었다. 민감한 군마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하더니 기병의 통제에서 벗어나 말머리를 돌리고 도망치려 했다. 둔한 마바리는 당황해 곧장 흩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필사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말 떼가 흉악한 늑대에게 포위될 때 원을 만들어 방어하는 것처럼.

뇌운맹호는 어떻게 수비해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상대는 호표기였다. 호표기의 군도는 늑대 이빨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그들은 순전히 살육을 위해 온 것이었다. 이런 공격이라면 생존자를 남길 리 없었다. 상대는 애초에 생포할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흩어져라! 해산해! 해산!”

뇌운맹호가 포효하며 말안장에서 십자노를 꺼내 화살을 한 대 쏘았다.

하당 기병의 유일한 첫 공격이었다. 화살은 최전방에 있는 흑마의 가슴 정면을 꿰뚫고 들어갔다. 그 준마는 길게 울부짖으며 주인을 태운 채 쓰러졌고 곧 뒤따라오던 쇠발굽에 짓밟혔다.

뇌운맹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말머리를 돌리고 미친 듯이 군마를 채찍질해 전장에서 벗어났다. 호표기가 거의 근접해왔다. 상황을 깨달은 하당 기병들도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마와 불쌍한 마바리 떼가 충돌했다. 겁 많은 마바리와 마부들은 흩어져 서로를 밟았다. 마바리 등의 상자가 열리고 휘황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금괴와 쌀알 크기만 한 진주였다. 하당이 청양에 주려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서둘러 도착한 호표기가 양 갈래로 갈라져 좌우를 따라 빙 둘렀다. 군도가 가로로 휘둘러졌다. 마바리와 마부의 피가 뒤섞여 듬성듬성 흩뿌려졌다. 금괴와 진주는 흙모래처럼 수풀 속에 흩어졌다. 만족 준마는 그것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며 미처 달아나지 못한 기병을 쫓아가 베어 죽였다. 호표기는 말 등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당 기병에게는 애초에 반격의 여지가 없었다. 만족 준마가 도망치는 자들의 뒤로 3척 거리까지 쫓아왔다. 말의 주인은 가볍게 군도를 가로 휘둘러 머리 하나를 베어냈다. 두개골의 피가 막 솟구치는 그때, 목적을 달성한 호표기는 이미 다음 사냥감을 찾아 질주해 갔다.

* * *

1) 보통 군영에서 사용하는 큰 깃발. 고대 중국에서는 춤을 출 때 사용하기도 했고 천자가 타는 수레에 꽂기도 했으며, 군대에서 대장이 지휘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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